• 한국문화사
  • 09권 옷차림과 치장의 변천
  • 제2장 옷감과 바느질
  • 3. 중요한 교역품 고려시대의 옷감
  • 불상 속에서 나온 금빛 찬란한 옷감
조효숙

고려시대의 유물로 남아 있는 옷감은 찬란했던 불교 문화의 영향으로 대부분 불상 속에서 나온 것들이다. 고려시대에는 수많은 사원의 건립과 함께 호화스러운 불화, 불상, 석탑의 제작이 왕실이나 귀족 사회에서 성행하였다. 특히, 불상을 조성할 때는 불상의 복부 내에 불경, 발원문, 오향, 오약, 오곡, 오색실을 넣고 발원자의 명복을 기원하기 위하여 그들이 입었던 복식과 옷감 조각을 함께 넣고 밀폐하던 습속이 있었다. 이러한 물품을 불복장품(佛腹藏品)이라 하는데, 일반적으로 몇 백 년 후 불상에 새롭게 금칠을 할 때에야 비로소 바깥 세상에 나오게 된다. 신기하게도 그 속에 들어 있던 복식과 옷감은 별로 손상되지 않고 색상도 원형 그대로 남아 있다. 그 이유는 불상을 처음 조성할 때 거의 진공 상태로 밀폐하기 때문이다. 현재 고려시대의 불복장 직물은 300여 점이 넘게 남아 있어 그 시대의 옷감을 알 수 있는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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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시대의 직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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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시대의 직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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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시대의 직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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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상에서 나온 옷감은 견, 주, 초, 능, 나, 직금, 금, 저포, 마포 등 종류가 다양하지만 그 중에서도 다른 시대와 달리 고려시대만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는 옷감은 단연 직금(織金)과 나이다.

직금은 무늬를 표현하기 위하여 별도의 씨줄이나 날줄을 사용하여 제직한 다중 직물(多重織物)로 금사나 은사를 사용하여 무늬를 만든다. 고려시대에는 특히 직금 직물이 유행하였는데, 이러한 현상은 고려와 밀접한 관계를 맺어 온 주변 국가인 원나라·요나라·금나라의 유물에서도 특징적으로 나타난다.

특히, 고려 말기에는 원나라의 영향을 크게 받았으며 충렬왕은 원 세조의 딸 홀도로게리미실 공주(원성공주)와 결혼하여 양국 간에는 혼인 관계가 이루어졌고, 관리·학자·귀족·상인의 왕래가 빈번해졌으며, 몽고 풍습과 함께 화려한 옷감도 고려 사회에 유입되었다. 1278년(충렬왕 4) 원나라 황후가 공주에게 답자포(塔子袍)를 보냈고, 왕의 신하들에게도 금답자를 보냈으며, 1296년(충렬왕 22)에는 왕에게 직금단(織金段) 네 필을 비롯한 많은 옷감을 선물하였다. 왕을 따라간 신하에게도 금단 18필, 수단 열 필, 능소단 578필, 견 486필을 주었다. 1297년(충렬왕 23)에도 태후가 왕에게 금단의(金段衣)를, 3품 이상의 신하 20명에게도 각각 금단의를 하사하였다. 또한, 금단 100필과 능소(綾素) 800필을 주었다. 이듬해에는 황제가 공주에게 금포(金袍)를 보내왔다.93)『고려사』 권28, 충렬왕 4년 ; 권29, 충렬왕 6년 ; 권30, 충렬왕 15년 ; 권31, 충렬왕 20·22·23·26년. 여기에서 금답자·직금단·금단과 같은 옷감 명칭도 모두 금사나 은사를 넣어 직조한 금빛 찬란한 옷감을 뜻하는 것이며, 답자포·금단의와 같은 옷의 명칭은 직금으로 만든 복식을 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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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시대의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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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문헌 자료를 입증하듯 고려시대 불상에서 나온 옷감 중에는 금빛 찬란한 직금 유물이 수십여 점에 이를 정도로 많이 남아 있다. 1302년(충렬왕 28)에 조성한 아미타불, 1346년(충목왕 2)에 조성한 문수사 금동여래불, 1346년 장곡사 철조약사불의 복장 직물에도 직금이 수십 점 포함되어 있는데 모두 청색, 녹색, 주황색, 분홍색, 흰색의 비단 바탕에 화려한 금사와 은사로 무늬를 짰다. 무늬의 소재는 다양하였는데, 특히 토끼나 새와 같은 동물무늬와 작은 꽃을 작고 단순하게 도안하여 반복 배열한 것이 많았다. 이렇게 금빛 무늬가 찬란한 옷감은 고려 불화의 하단에 그려진 불공을 드리는 귀족들의 옷차림에서도 나타나 고려시대에 이러한 옷감 이 얼마나 유행하였는지를 확인할 수 있다.

직금 직물은 조선시대에 이르면서 수자직(繻子織)의 단 직물 바탕에 금사로 무늬를 넣은 금선단(金線緞)으로 전통이 이어졌지만 고려시대만큼 유행하지는 않았다.

다음으로 특징적인 불복장 직물은 나이다. 나는 익조직(搦組織)의 직물로 얇고 반투명하며, 백제나 신라의 유물에서도 나타날 정도로 오래된 옷감이다. 문헌 자료에 의하면 나는 고려의 모든 시기를 통틀어 대표적인 직물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관리의 공복이나 기타 의복의 옷감은 물론 외국과의 교역품으로도 빈번히 사용되었다.94)국사편찬위원회, 『국사관논총』 55, 1996, 40∼5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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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시대의 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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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불화의 공양자 의복
고려 불화의 공양자 의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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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시대의 불복장 유물에도 나가 많이 남아 있어 문헌에 기록된 나의 유행을 확인할 수 있는데, 특히 온양 민속 박물관에 소장된 1302년의 아미타불의 복장 유물에는 다양한 나의 옷감 조각이 남아 있다. 주황색, 자색, 황색 등 다양한 색상이 있으며 밀도가 치밀한 것, 거미줄같이 성근 것, 바탕 무늬가 은은하게 들어간 것, 화려하게 금박을 찍어 무늬를 표현한 것, 금사로 무늬를 직조한 것 등 형태가 다양하다. 주황색 사경교라(四經絞羅) 바탕에 금박을 찍은 불복장 옷감 역시 고려 불화에 그려진 옷감과 색상이나 무늬까지도 흡사하여 당시에 유행하던 옷감을 살펴볼 수 있다.

나의 제직 방법은 크게 세 종류로 구분되는데 씨줄 두 올이 교차된 이경교라, 세 올이 교차된 삼경교라, 네 올이 교차된 사경교라가 있다. 사경교라는 네 올의 씨줄이 1조가 되어 다시 옆에 있는 다른 조의 씨줄과 연속적으로 교차되어 그물 모양과 같이 직조한 것으로 이경교라나 삼경교라보다는 덜 투명하고 마치 니트 직물처럼 탄력이 있다. 반면에 두 올이나 세 올의 씨줄이 교차된 나는 마치 한 가닥이 직선으로 내려온 씨줄처럼 보이기 때문에 각 조의 씨줄군 사이에는 방형(方形)의 구멍이 생겨 마치 성글게 짠 평견직물처럼 보인다. 후자와 같이 방형의 구멍이 있는 나직물은 조선시대에 사(紗)로 명칭이 바뀌어 전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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