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09권 옷차림과 치장의 변천
  • 제2장 옷감과 바느질
  • 4. 점점 단순해지는 조선시대의 옷감
  • 옷감의 종류와 명칭
  • 견직물
조효숙

견직물은 상류층이 애용하던 옷감으로 직조 방법은 평직, 능직, 수자직, 익조직, 중조직으로 다양하며 제직법과 사용한 실의 종류에 따라 다양한 명칭으로 불린다.

모두 평직으로 제직된 견직물도 사용한 견사의 상태와 밀도에 따라 견, 초, 주, 추사 등으로 다양하였다.

견(絹)은 가장 상등품의 장견사로 제직하여 씨줄과 날줄의 굵기가 균질하여 표면이 매끄럽고 광택이 나는 직물이다. 1690년(숙종 16)에 사역원(司譯院)에서 간행한 중국어 어휘 사전인 『역어유해』에는 견자(絹子)라 쓰고 ‘깁’으로 언해하였다. 또한, ‘제물엣깁’이라 언해한 수광견(水光絹)과 ‘다은견’이라 언해한 전견(搌絹)이 있다.107)『역어유해(譯語類解)』 직조(織造). 수광견은 잿물에 정련하여 광택이 많이 나는 견을 의미하고, 전견은 다듬질하여 손질한 견을 뜻한다.

초(綃) 역시 품질이 좋은 장견사로 만드는데 일반적으로 정련하지 않은 생사로 제직하므로 생초(生綃)라고도 한다. 얇고 가벼우며 빳빳하다. 생초와 실의 굵기와 밀도는 같으나 미리 정련하여 부드럽게 만든 숙사(熟絲)로 제직한 숙초(熟綃)도 있다. 초는 씨줄과 날줄의 밀도가 주보다 높지만 워낙 실이 가늘기 때문에 얇고 반투명해 보인다. 1612년(광해군 4)의 초로 만든 답호를 금지하자는 논의, 조유도(趙有道)가 생초로 만든 답호(褡護)를 입고 있다가 부끄러워 물러갔다는 기록,108)『광해군일기』 권52, 광해군 4년 4월 을유. 숙종 때에 왕의 교령(敎令)을 모아 정리한 『수교집록』에 기재된 “낮은 직급의 관리는 초나 견을 착용하지 말라.”109)『수교집록』 권5, 형전(刑典), 금제(禁制).는 내용 등 조선시대의 여러 문헌에서 초와 견에 대한 규제를 찾아볼 수 있다. 따라서 견과 초는 동일한 평견직물이라 하더라도 주에 비하여 고급 견직물에 해당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주(紬)는 중등품의 견사로 제직한 평견직물이다. 『역어유해』에는 일반적인 ‘주자(紬子)’를 통틀어 ‘비단’이라고 부른다고 하였다. 우리나라 문헌에는 견방사로 짠 토주(吐紬)나 면주, 정주(鼎紬), 수주(水紬)와 같은 명칭이 많이 나온다. 토주와 면주는 꼬임이 있는 견방사로 제직하여 광택이 없고 면포와 같은 물성을 보이는데 유물로도 많이 출토되었다. 『임원십육지』에 토주는 설면자(雪綿子)로 뽑은 실로 짜서 질기고 따뜻하며 가격이 보통 주의 두 배가 된다고 하였고,110)서유구(徐有榘), 『임원경제지(林園經濟志)』, 전공지(展功志) 권2. 『탁지준절』에도 동일한 색을 기준으로 할 때 토주가 제일 고가이고 다음으로 면주, 정주, 수주가 비슷하다고 하였다.111)탁지부(度支部), 『탁지준절(度支準折)』, 6∼13쪽.

견사와 면사를 혼방하여 제직한 직물도 있는데 조선 전기에는 사면교직이라 하여 16세기 사대부들에게 매우 인기 있는 옷감이었다. 조선 후기에도 아롱주 혹은 반주라는 명칭으로 계속 생산되었으며, 『긔』에는 주로 속옷용으로 사용한다고 기록되어 있다.112)한국정신문화연구원 편, 『고문서집성(古文書集成)』 권13, 1994.

그 밖에 『가례도감의궤』, 『역어유해』, 『긔』와 같은 문헌에는 노주주, 화사주, 방사주, 화방주, 수화주, 경광주, 장원주, 삼팔주, 왜주 등 다양한 주의 명칭이 나타나는데 이들의 제직 방법은 계승되지 못하고 모두 사라졌으며 요즈음에는 명주 한 종류만이 전통 직물로 남아 있다.

추사(縐紗) 역시 평직으로 제직한 견직물로, Z방향과 S방향의 강한 꼬임을 준 날줄을 교대로 넣어 마치 요즈음의 지지미와 같이 표면이 까슬까슬한 물성을 보이며 중량감이 있는 직물이다. 『역어유해』에는 한자로 ‘추사(縐紗)’ 혹은 ‘주우사(注雨紗)’라 쓰고 ‘즈우샤’라고 언해하였다. 17세기 후 반부터 화문단을 금지하자 무늬가 없는 추사가 한때 매우 유행하였다.

한편, 바탕은 평직이지만 능직이나 수자직으로 무늬를 제직한 주도 있는데 화문주(花紋紬), 문주(紋紬)라고 한다. 18세기까지의 화문주는 대부분 능직으로 무늬를 표현하였지만 19세기부터는 수자직으로 무늬를 제직한 유물이 많이 출토되었다. 이처럼 제직법에 따라 화문주의 시대를 구분할 수 있다. 빙허각 이씨(憑虛閣李氏, 1759∼1824) 가 쓴 『규합총서』에서 문주는 잉아 셋을 걸고 짜며 성천(成川)에서 나는 것이라 하였다.113)빙허각 이씨(憑虛閣李氏), 정양완 역주, 『규합총서(閨閤叢書)』, 보진재, 1975, 139쪽.

『경국대전』에 상의원(尙衣院)에 소속된 능라장이 105명이라고 한 것을 보면 조선 전기에 능과 나의 제직이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능은 주에 비해 치밀하고 탄력이 좋은 문직물(紋織物)로 능직(綾織)으로 직조하여 직물 표면에 사선의 줄이 나타난다.

대부분의 문헌에는 무늬가 없는 것은 ‘소릉(素綾)’ 혹은 ‘무문릉(無紋綾)’이라 하고, 무늬가 있는 대부분의 것은 ‘화문릉(花紋綾)’이라 기록되었으며, 특별히 작은 무늬가 있는 것은 ‘소문릉(小紋綾)’이라고 하였다. 조선 초기의 학습서인 『조선관역어(朝鮮官譯語)』, 최세진의 『훈몽자회(訓蒙字會)』를 비롯하여 16세기 초기에 최세진이 번역한 『번역노걸대(飜譯老乞大)』까지는 ‘능(綾)’이라 한자로 쓰고 ‘고로’라 언해하였으나, 후대로 가면 한자 발음대로 ‘능’이라 언해하였다. 『역어유해』에도 ‘능자(綾子)’라는 한자에 ‘링’으로 언해하였으며 품질이 좋은 능은 ‘성릉(聖綾)’으로 쓰고 ‘됴흔능’으로 언해하였다.114)『역어유해』 직조. 조선시대 분묘에서 출토된 직물에는 능 유물이 단에 비하여 많지 않았다. 단지 17세기에서 18세기 무렵에 정부에서 생산이 어렵고 고가인 화문단을 적극적으로 금지할 때 비교적 생산이 쉬운 능이 한시적으로 많이 나타났다. 그러나 『규합총서』에 “능라 장인을 주어 아롱주를 짜면 깨끗하고…….”115)빙허각 이씨, 정양완 역주, 앞의 책, 139쪽.라고 기록한 점으로 보아 18세기까지도 능라를 짜는 장인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단은 수자직으로 제직된 것으로 우리가 흔히 ‘양단’이나 ‘공단’이라 고 부르는 옷감이다. 우리나라에서는 1346년(충목왕 2)의 장곡사 철조약사불 복장 유물에서 5매 수자직으로 제직된 백색의 단 조각이 처음 발견되었는데, 그때는 특별히 귀한 옷감으로 보편적이지 못하였고, 조선시대에 들어오면서 비로소 상류층에서 선호하는 고급 옷감으로 확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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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보세화문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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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양화문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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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문단
운문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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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실록』에 의하면 구름무늬와 같이 특별히 많이 쓰는 무늬에만 ‘운문단’이라는 무늬 명칭을 붙이며 그 외 대부분의 단직물은 무늬가 있으면 ‘화문단’이라고 통칭하여 기록하였다. 무늬가 없는 것은 ‘무문단’ 혹은 ‘소단’이라 하였으며 18세기 후반 무렵부터 ‘공단(貢緞)’이라는 명칭이 나타났다. 그러나 조선의 역대 왕 중에 연산군은 유난히 복식에 관심이 많았기 때문에 옷감에 관련된 기록이 비교적 많이 남아 있는데, 이때만은 다른 시대와 달리 옷감 명칭도 백칠보세화문단(白七寶細花紋段)·사양화문저사(四樣花紋紵絲)·운문유청색저사(雲紋有靑色紵絲)와 같이 구체적으로 무늬 명칭을 붙여 옷감을 호칭하였던 기록들이 남아 있다.116)『연산군일기』 권56, 연산군 10년 11월 신유. 이 명칭들을 출토 유물 자료와 비교해 보면 사진 ‘칠보세화문단, 사양화문단, 운문단’과 같은 무늬 의 옷감이 이에 해당된다고 할 수 있다.

한편, 『역어유해』나 『노걸대』와 같은 중국어 학습서에는 『조선왕조실록』과 같은 역사서보다 자세한 명칭을 기록하였다. ‘짓비단’으로 언해한 우단(羽緞), ‘비단’으로 언해한 저사(紵絲)가 있으며, 섬단(閃緞)·팽단(彭緞)·장단(粧緞) 등은 한자음을 그대로 발음하였다. 또한, 육홍전지목단(肉紅纏枝牧丹)이라 쓰고 ‘육홍비체 넌츨모란문한 비단’이라 언해한 것으로 미루어 유물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모란만초무늬의 단직물의 당시 명칭을 추측해 볼 수 있다.

양단이라는 명칭은 『만기요람(萬機要覽)』, 「한양가(漢陽歌)」, 『탁지준절』에서는 찾아볼 수 없으나 1908년·1917년·1918년의 『긔』에 처음으로 기록되어 1900년 개화기 무렵부터 프랑스나 영국으로부터 수입한 단직물에서 유래되어 지금은 모든 무늬 있는 단직물 명칭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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흉배 금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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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고리에 쓴 연화문 금선단
저고리에 쓴 연화문 금선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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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조선시대의 중요한 단 종류에는 화문단 바탕에 특정한 무늬 부분에만 금사나 은사를 이중으로 넣어 화려하게 제직한 금선단(金線緞)이 있다. 유물 중에는 이처럼 금사와 은사로 무늬를 제직한 직물이 가끔 출토되는데 문헌에는 은사로 무늬를 짠 경우에도 은선단이라 하지 않고 모두 ‘금선단’, ‘금선’으로 기록되었다. 간혹 직금(織金)이라는 명칭을 쓰기도 하였다. 『역어유해』에는 편금(片金) 또는 직금단자(織金緞子)라 쓰고 ‘금션단’ 으로 언해하였다.117)『역어유해』, 직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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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마 스란단에 사용한 금선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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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삼에 사용한 금선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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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선단은 일반적으로 남자 옷에는 흉배 등 특수한 부분에만 사용하였고 주로 여자들의 스란치마, 회장저고리, 원삼과 같은 예복용 옷에 부분적으로 쓰였다. 16세기의 출토품에서 금선단이 가장 많이 나왔으며 시대가 늦어질수록 금선단의 사용은 줄어들어 19세기가 되면 상대적으로 제작이 편리한 금박을 옷감에 찍는 것으로 대치되었다.

단의 제직법은 17세기까지는 대부분 5매 수자직이었으나 1722년에 사망한 안동 권씨의 당의와 저고리용 화문단에 처음으로 8매 수자직이 보였다. 이처럼 18세기 이후부터 8매 수자직이 서서히 나타나기 시작하여 19세기에는 대부분 단류가 8매 수자직으로 제직되었다.

이러한 단 조직의 변화는 시간이 지나면서 제사 기술이 점점 발전하여 좀 더 가늘고 균질한 견사를 생산할 수 있었기 때문에 조직점이 드물게 나타나는 8매 수자직으로 변화될 수 있었다. 정조 때에 여러 차례에 걸쳐 청나라에서 보낸 옷감 명칭에 오사단(五絲段), 팔사단(八絲段)이라는 기록이 있는데118)『정조실록』 권39, 정조 18년 2월 경진 ; 권48, 정조 22년 2월 계축. 5매 수자직과 8매 수자직의 단을 뜻하는 명칭으로 생각된다.

사, 나는 인접한 씨줄끼리 꼬임을 주어 직물의 투공 효과를 내는 익조직의 직물이다. 무늬가 없는 직물은 각각 ‘소사(素紗)’, ‘소라(素羅)’라 하고, 무늬가 있는 직물은 대부분 ‘화문사(花紋紗)’, ‘화문라(花紋羅)’라고 기 록되었으나 무늬에 따라서 ‘운문사(雲紋紗)’, ‘운문라(雲紋羅)’와 같이 특정 무늬 명칭을 지정하기도 하였다. 중국어 학습서에는 사(紗), 나(羅)라 쓰고 각각 ‘사’, ‘로’로 언해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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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고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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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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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문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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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올의 씨줄을 교차하여 제직한 사는 고려 말기부터 나타나지만 조선시대에 들어서면서 더욱 보편화되었다. 그래도 평직이나 수자직에 비하여 많이 출토되지는 않았다. 16세기 변수(邊脩)의 단령과 철릭을 연화문사로 만들었고, 17세기 해평 윤씨(1660∼1701)의 당의, 치마, 속바지 모두 연화문사로 되었으며, 김여온이나 이응해(1547∼1626)의 출토품에도 운문사로 만든 직령이 출토되는 등 춘·하절기 옷감으로 일부 사용되었다.

그러나 조선 말기에는 얇은 사 종류의 옷감이 유행하여 조선 말기 궁중 의복과 옷감을 기록한 각종 『긔』에는 춘·하절기 복식 외에도 사철 입는 예복이나 두루마기, 배자, 속옷에까지도 숙고사, 생고사, 갑사, 화문사, 도류사, 순인과 같은 다양한 종류의 사가 두루 사용되었다.

한편, 서너 개의 씨줄을 교차시켜 제직한 나는 일찍이 삼국시대나 고려시대부터 유행하였던 옷감이지만 조선시대에는 점차 사라졌다. 그래도 16세기까지는 1566년(명종 21)에 사망한 파평 윤씨의 너울과 1574년(선조 7)에 사망한 것으로 추정되는 연안 김씨의 단령, 저고리, 치마 등에도 나가 사용되었으나 17세기에는 더욱 드물어져 여흥 민씨(1586∼1656)의 너울에만 보일 뿐이다. 그 대신 이때부터는 과거의 나에 비하여 제직 방법을 단순하게 변형한 항라(亢羅)가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항라는 항저우(杭州)에서 제직하여 항라라는 이름이 붙여졌는데 평직과 익조직을 교대로 하여 가로줄 무늬가 나타난다. 『긔』에 항라는 단속곳, 속바지 등의 속옷에 많이 쓰였다. 조선 말기에서 개화기 무렵에는 항라 바탕에 꽃무늬가 드문드문 있는 항라도 유행하였는데 ‘세까루’라는 이름으로 판매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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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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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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