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09권 옷차림과 치장의 변천
  • 제3장 궁궐 안 특별한 사람들의 옷차림
  • 1. 궁궐 안의 일상 옷차림
  • 고귀한 왕실의 여인
  • 왕실에 봉사하는 궁녀
임재영

궁녀(宮女)는 궁인(宮人), 나인(內人), 여관(女官)이라고도 하는데, 본격적인 궁녀 제도는 고려 때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 고려 초에는 후비(后妃) 이하를 모원(某院)·모궁 부인(某宮夫人)으로 일컫다가 현종 때에 비로소 상궁(尙宮), 상침(尙寢), 상식(尙食), 상침(尙針)의 직명을 정했다.143)『문헌비고(文獻備考)』 제71책, 권254 제9장. 조선시대에는 대체로 500∼600명이 존재하였는데, 이들은 넓은 의미의 내명부에 속하였다. 궁녀는 본궁과 별궁뿐 아니라 제사궁이나 혼궁(魂宮)으로 불리는 왕실의 사당에 종사하는 여인까지 포함한다. 궁녀는 최소 네다섯 살 정도의 어린 견습나인(아기나인)에서 칠팔십 대의 원로 상궁까지 있으며, 신분에 따라 상궁·나인·아기나인의 세 등급으로 나뉜다.

궁녀가 입궁한 지 30년이 되면 왕이 상궁 첩지를 내린다. 상궁은 맡은 바 업무에 따라 제조상궁, 부제조상궁, 감찰상궁, 지밀상궁, 보모상궁, 시녀상궁 등으로 나뉜다. 제조상궁(큰방상궁)은 각 처소의 궁녀를 통솔하는 역할을 한다. 부제조상궁은 각 처소의 재물을 보관하는 하고(下庫)를 관장하기에 아리고상궁이라고도 한다. 감찰상궁은 각 처소의 궁녀를 감찰하는 임무를 맡았다. 지밀상궁은 왕을 시위(侍衛)하며 왕의 측근에서 잠시도 떠나지 않는다. 보모상궁은 왕의 자녀의 양육을, 시녀상궁은 지밀 중에서 문서 관리나 연회 때 웃전을 안내하고 시위하는 임무 및 왕과 왕비의 특사 역할을 한다.

나인은 입궁한 지 15년이 되면 관례를 치른 후 정식나인이 된다. 관례는 머리를 쪽찌고 어른이 되는 성인식인데, 네 살에 입궁한 것을 기준으로 하면 보통 스무 살 전후가 된다. 아기나인(견습나인, 생각시)의 경우 가장 어린 나이에 입궁하는 곳은 지밀(대전·내전 등)로 네다섯 살이며, 침방·수방은 일고여덟 살, 그 밖의 처소는 열두세 살에 입궁한다.

이들은 중병이 들어 임무 수행이 불가능할 때까지 종신제로 근무한다. 부서는 지밀(至密), 침방(針房), 수방(繡房), 소주방(燒廚房), 생과방(生果房), 세답방(洗踏房)으로 이루어진다. 지밀은 침전·안사랑·대청 등이 있는 안채를 말하며, 침방은 바느질하는 곳, 수방은 자수를 관장하는 곳이다. 소주방은 음식을 만드는 곳으로 안소주방과 밖소주방으로 나뉘는데, 안소주방은 주로 일상 음식을 담당하고 밖소주방은 잔치 음식을 담당한다. 생과방은 음료수·죽·다식·약과·전과 등을 만드는 곳이고, 세답방은 빨래·다듬이질·염색 등을 맡은 곳이다.

지밀을 제외하고는 격일제로 일하며 지밀 소속의 궁녀는 하루를 상·하번으로 나누어 아침 8시와 오후 3시에 교대하는 형식으로 근무하였다. 각 부서에 근무하는 궁녀는 지밀을 제외하고는 상궁과 나인을 합하여 15명 정도이고, 지밀은 20명 정도이다. 그러나 전궁(殿宮)의 주인인 왕족의 신분에 따라 다소 차이가 있다. 1897년(광무 1) 대한제국을 수립할 때 정한 궁녀의 숫자는 대전, 대비전, 중궁전이 각 100명, 세자궁 60명, 세자빈궁 40명, 세손궁 50명, 세손빈궁 30명이었다.144)김용숙, 『조선조 궁중 풍속 연구』, 일지사, 1987, 8∼30쪽.

비번에는 다른 처소에 놀러가거나 기술을 익히거나 붓글씨 쓰기, 책 읽기 등으로 소일하였다. 생각시 시절에는 일고여덟 살부터 기초 교양을 쌓게 되는데, 지밀 생각시는 훗날 후궁이 될지도 모르기에 『동몽선습(童蒙先習)』·『소학(小學)』·『내훈(內訓)』·『열녀전(烈女傳)』을 읽는 것에서부터 궁체(宮體) 연습까지 다양하였다. 나인 시절에는 틈만 나면 비단실로 끈을 짜는 다회치기를 하였다. 다회(多繪)는 너비에 따라 주머니인 염낭, 귀주머니 끈, 도포 끈인 세조대(細組帶), 대례복이나 적의(翟衣)의 대로 띠던 광다회(廣多繪) 등에 쓰인다.145)김용숙, 앞의 책, 53∼59쪽.

궁녀의 옷차림은 신분, 품계, 연령에 따라 조금씩 다르다. 가장 어린 생각시는 옷차림에 구애를 거의 받지 않고 노랑 저고리, 분홍 저고리, 옥색 저고리에 다홍 치마·자주 치마를 입으며 머리는 생머리를 한다. 생각시를 제외한 견습나인은 일반 여염 처녀같이 머리를 하나로 땋은 댕기머리를 한다.146)김용숙, 앞의 책, 49쪽. 다만, 비빈(妃嬪)과 같은 색을 입는 것은 제한하였다. 견습 시절을 마친 나인은 관례 곧 계례(笄禮)를 올린 후 정식나인이 되는데 궁녀의 관례 의식은 일반인의 결혼식과 같은 의미로 왕을 신랑 삼아 왕을 위해 평생 봉사한다는 의미와 각오로 행하게 된다. 관례 때에는 어여머리(혹은 화관), 자주 끝동·깃 옥색 저고리, 남치마에 초록 당의와 원삼을 입고 삼작노리개를 단다.147)김용숙, 앞의 책, 41∼42쪽. 정식나인이 되면 궁복(宮服)인 남치마에 옥색 저고리, 초록 곁마기를 입는다. 곁마기는 당의보다는 가벼운 웃옷으로 초록색이며 겨드랑이에 자주 곁마기, 소매에는 흰 한삼이 달려 있다. 근무복과 평상복이 다르며, 아침 근무와 오후 4시 이후 근무 때의 복장도 다르다. 오후 4시 이후에는 야간 근무 시의 간편복을 입기 때문에 치마저고리와 머리 모양을 약식으로 하였다. 평복은 상복(喪服)이나 비빈의 복색만 아니면 구애 없이 자유로운 색상을 입었다. 상궁 복식도 나인과 다르지 않으나 조선 후기에는 나이에 따라 이회장저고리(끝동·고름에 다른 색을 대는 저고리)를 하는 것이 보통이었다고 한다. 나인이 삼회장저고리(곁마기·끝동·깃에 다른 색을 대는 저고리)인 데 반해 나이에 따라 점잖은 차림을 하고자 했던 것으로 여겨지며 궁녀의 치마폭은 민간의 세 폭보다 넓어 보통 네 폭을 입었다.148)김용숙, 앞의 책, 49∼5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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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머리에 원삼 입은 관례 궁녀
큰머리에 원삼 입은 관례 궁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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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찌 보면 궁녀는 어릴 적 궁에 들어와 일평생 왕실을 위해 봉사하다 죽어야만 궁궐 밖을 나갈 수 있는 서글픈 신세이지만, 민간인은 감히 접근할 수조차 없는 구중궁궐 깊은 곳에서 사는 신비로움이 있어서인지 마냥 신비롭기만 한 존재로 여겨졌던 것 같다. 다음은 1885년(고종 22)에 간행된 『화원악보(花源樂譜)』149)1885년(고종 22)에 편찬된 것으로 짐작되는 편자 미상의 시조가집이다. 서문에서 노래는 인간의 감정을 숨김없이 드러내는 매체임을 표명하여 기존의 노래에 대한 관념론적 시가관에서 벗어난 점이 특징적이다.에 실린 어느 궁녀의 시조로 연못에 갇혀 사는 물고기의 신세를 궁궐에 갇혀 사는 자신의 신세에 비유하여 묘사한 내용으로 궁녀의 처량함을 토로하고 있다.

압 못세 든 고기들아 뉘라셔 너를 모라다가 넉커늘 든다

북해청소(北海淸沼)를 어듸 두고 이 못세 와 든다

들고도 못 나는 정은 네오 내오 다르랴.

탄식 어린 궁녀 스스로의 심정적 묘사와는 달리 일반인은 궁녀를 마치 화려한 옷차림과 머리 장식을 한 달나라 선녀 항아(姮娥)인 양 눈부시게 바라보고 있다. 다음은 조선 후기 가사(歌詞) 「한양가」에 묘사된 궁녀의 모습이다.

윤주라(毛緞) 너울 두록 대단(大緞) 드림이며

홍융사(紅融絲) 유소(流蘇) 매듭 빛 좋게 늘어지고

남수화주(藍水禾紬) 긴 너울은 누른 화판 조밀(稠密)하다

설한단(雪漢緞) 남치마와 불빛 모단(毛緞) 족도리며

어여머리 늦은 낭자 오두잠(烏頭簪) 금죽절(金竹節)과

긴 원삼 짜른 당의 요지연(瑤池宴) 모셨는 듯

분대(粉黛)도 절등하고 주취(朱翠)도 화려하다

항아가 적강(謫降)한가 속태(俗態)도 전혀 없네

나이 많은 무수리는 적은 머리 긴 저고리

아청(鴉靑) 무명 넓은 띠에 문패(門牌)를 빗기 차고.

고운 화장에 족두리와 오두잠·금죽절 비녀로 장식하고 윤주라·두록대단·홍융사·남수화주·설한단·모단의 고급 비단 옷감으로 몸을 감싼 품위 있는 자태, 긴 너울로 얼굴과 몸을 가린 신비로운 모습은 마치 궁녀를 이 세상 사람이 아니라 선녀인 듯 고고한 이미지로 여겼던 듯하다.

궁녀들은 아기나인일 때는 선배 상궁의 방에서 훈육을 받지만 계례를 치르고 정식나인이 되면 마음에 맞는 친구와 함께 따로 방을 꾸며 생활한 다. 그래서 비번에는 비자(婢子, 계집종)에게 취사, 청소, 빨래 따위의 일을 맡기고 독립 생계를 영위한다. 물론 당번일 때는 소속 처소에서 식사를 해결한다. 상궁은 비자와 침모(針母)를 각각 한 명씩 두고, 그 밖에 손님이라 하여 친척 중에서 가정부같이 살림을 맡아 주는 여인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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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울 쓴 궁녀
너울 쓴 궁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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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녀로는 상궁, 나인의 여관이 아닌 궁의 천비나 비자, 방자, 무수리도 있는데 이들은 보통의 궁녀와는 옷차림이 구별되었다. 「한양가」를 보면 궐내 잡일을 하는 무수리는 검푸른 무명 치마저고리에 너른 허리띠와 궁궐 출입증인 패(牌)를 차고 다닌다고 묘사되어 있다. 또한, 심부름꾼인 비자도 무수리와 같은 옷차림이지만 우체부 역할로 궐밖 출입을 자유로이 하는 빗장나인의 비자를 제외하고는 패를 차지 않는다. 상궁의 식모인 방자들은 여염집 여인들과 같은 옷차림을 하였다.150)박영규, 『환관과 궁녀』, 김영사, 2004, 26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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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리마를 쓴 기녀
가리마를 쓴 기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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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밖에도 의녀(醫女)가 있는데 이들은 조선시대 여자 의사들로 대개 관비(官婢) 출신이다. 그러나 내의원(內醫院)에 소속된 의녀들은 궁궐을 출입하였기 때문에 궁녀로 인식되기도 하였다. 엄격히 말해 궁궐에 상주하는 궁녀라고 하기에 적절하지 않으나 비자나 무수리도 궁궐에 출퇴근하였기에 그런 면에서는 비슷하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조선시대 행사에 관한 기록을 그린 반차도(班次圖)에 의녀의 모습이 다수 그려져 있어 신분에 비해 역할이 컸던 것을 알 수 있다. 의녀는 평상시 검은색 천을 접어서 반듯한 형태로 만들어 이마 에서 정수리를 거쳐 뒤로 넘겨지게 쓰는 가리마를 쓴다. 가리마는 차액(遮額)이라고도 하는데 신분이 낮은 기녀나 의녀가 썼던 머리쓰개로 조선 후기 족두리가 유행하면서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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