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09권 옷차림과 치장의 변천
  • 제3장 궁궐 안 특별한 사람들의 옷차림
  • 3. 궁궐 안의 특별한 옷차림
  • 왕세자 입학식, 성균관 입학례
임재영

왕세자가 『소학(小學)』을 배울 나이가 되면 성균관 입학례를 거행한다. 입학례는 성균관에서 공자를 모신 문묘에 술을 올리는 작헌례를 행한 후 명륜당(明倫堂)에서 입학의(入學儀)를 거행한다.161)『국조오례의』 권3, 가례, 왕세자 입학에 관한 의식. 국가의 중요한 행사인 왕세자 입학의는 기록화로 남겨 보관하였는데 1817년(순조 17)에 거행된 효명세자(孝明世子)의 『왕세자입학도첩(王世子入學圖帖)』이 현재까지 남아 있어 그 내용을 더욱 상세히 알 수 있다. 입학의는 처음으로 만나는 스승인 박사와의 상견례로 시작되는데 왕세자는 스승에게 가르침 받기를 청하면서 술, 고기, 옷감의 폐백품을 바친다. 이후 첫 공부가 시작되어 박사와 마주 앉아 책을 읽는다. 이때 대부분의 참석자는 평상시 궁궐 내의 관복인 상복을 입으며 당사자인 왕세자는 익선관·곤룡포의 상복 차림이다. 만일 왕세자가 관례 이전이면 익선관 대신 쌍동계(雙童髻)·공정책(空頂幘)을 착용하였다. 왕세자의 곤룡포는 성종 때 녹색을 정색이 아니라 하여 아청색으로 바꾸었다.162)『성종실록』 권214, 성종 19년 3월 을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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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명세자 입학례 중 입학도
효명세자 입학례 중 입학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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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학의가 행해지면 왕세자는 학생 신분으로서 학생복을 입는다. 조선시대 학생, 즉 유생의 복장은 태종 때부터 청금복(靑衿服, 청색의 깃이 달린 옷)을 입도록 하여 청금단령을 착용하였다. 그러나 서리(胥吏)의 복장과 비슷한 것을 꺼린 유생들은 홍단령을 선호하였다. 중인 계층인 서리와 동등하게 대우받는 것을 싫어했기 때문이다. 영조 때 다시 복두(幞頭)·난삼(襴衫)을 입자는 건의에 따라 이 제도가 수용되었다. 난삼은 종달새의 색과 유사하다 하여 앵삼(鶯衫)이라고도 하였다. 박사는 공복을 입고 왕세자의 스승이 되어 주기를 청하는 의식과 폐백을 받는 의식을 치르며 첫 수업 의식에는 상복을 입고 수업을 진행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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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정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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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복 입은 박사
공복 입은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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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관복은 조복·제복·공복·상복의 네 종류가 있다. 공복은 공적인 행사나 나라의 대표로 국외 행사에 참여할 때, 사은(賜恩) 관계로 왕을 알현할 때 등에 입는다. 그러나 용도가 상복과 명확히 구별되지 않은 관계로 혼동되었지만 왕세자의 스승으로서 참석하는 왕세자 입학의 때는 명확한 용도로 착용되었다. 상복과 같은 형태의 단령이지만 색이 다르고, 머리에 사모가 아닌 복두를 쓰는 점이 다르다. 그림에는 홍단령에 복두를 쓰고 끝이 늘어진 야자대(也字帶)를 맨 박사가 보인다. 복두는 사모와 유사하나 모자의 본체가 각졌으며, 양옆으로 달린 뿔 역 시 각이 진 형태에다 길쭉하다. 유물이 남아 있지는 않지만 오늘날 국악을 연주하는 연주자의 복장에서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입학의가 끝나면 종친 및 2품 이상의 문무백관으로부터 축하를 받는 수하의(受賀儀)가 이어지는데, 이때 왕세자는 조복인 원유관·강사포를 입으며, 종친과 문무백관은 평상시 시무복인 상복을 입는다. 이 의식에는 문무백관과 행사를 집행하는 제관·집사관이 참석하며 성균관 유생들이 배석하게 된다. 이들은 모두 평상시 복장을 갖추는데 제관과 집사관은 상복을, 유생은 유생복인 청금복을 입고 건을 쓴 차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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