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09권 옷차림과 치장의 변천
  • 제4장 상징과 의미가 가득한 의례복
  • 6. 근신하며 정성을 다하는 상례복과 제례복
  • 제례복
이은주

예서에는 시제(時祭)나 기일(忌日), 정지(正至)나 삭망(朔望) 등에 제사를 지내는 것으로 규정되어 있다. 그뿐만 아니라 향사(享祀)와 같이 문성공(文成公, 공자)과 유학자들에게 제사를 지낼 때도 제례복을 착용하였다. 예서에는 성복(成服)을 한다고 하였는데 화려함을 배제한 경건하고 근신하는 모습을 원칙으로 하였다.

조선 전기에는 관직이 있는 자의 경우, 흑단령으로 제사를 지내는 것이 허락되었다. 사제(私祭)는 사모에 흑단령, 품대, 흑화를 착용하였다.250)김성일, 『학봉집(鶴峯集)』 권6, 16쪽. 이러한 규정은 1428년(세종 10)에 관직이 있는 사람들이 시향제(時享祭)에 사모와 품대를 착용하도록 한 것에서 비롯되었다.251)『세종실록』 권42, 10년 11월 갑자. 조선 전기 『미암일기』에도 제사 하루 전에 목욕재계하고 의관을 정제하는데 갓을 쓰고 흑단령에 띠를 둘렀다는 기록이 보인다.

한편, 기일에 소복(素服)을 입기도 하였다.252)오희춘, 『쇄미록』하, 제7, 90쪽. 하얀 소복을 입는 것은 조선 후기에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특히, 제례에는 도포를 많이 입었다.253)이익(李瀷), 『성호사설(星湖僿說)』 권5, 만물문(萬物門) 도포(道袍). 도포는 사대부의 외출복이나 유생의 옷으로도 입었는데 길복(吉服)으로 입을 때는 주로 청색 도포를 입었던 반면에 평상복이나 제복으로는 주로 백색을 입었다.254)이규경, 『오주연문장전산고』 권45, 도포변증설(道袍辨證說). 요즈음에도 안동 지역에서 문중 제사나 향사 등을 지낼 때 유건(儒巾)이나 갓에 도포를 착용하고 있다.255)권오봉, 「도산 서원 향사」, 『Morning Calm』, 대한항공, 1994년 11월, 119쪽. 때로는 간편하게 양복 위에 도포나 두루마기를 입기도 한다.

여자 제례복은 남자와 마찬가지로 성복으로 한다. 본래 예서에는 제사에 두 번째 잔을 올리는 아헌(亞獻)은 주부가 담당하도록 되어 있다. 그러나 조선 후기에 남성들이 제사를 주관하게 되면서 여성들이 제사에서 배제된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설령 예서에 여성이 제사에 참여할 때 입는 옷에 대한 언급이 있었다 할지라도 소용없었을 것이다.

조선 후기 예서에는 대의에 장군을 입는다는 기록과 더불어 중국의 고대 제도에 근거한 소의를 입는 것을 권장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 옷을 입는 경우는 극히 드물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만약 여성이 제사에 참여하였다면 원삼을 착용하였을 것이다. 참여하지 않는 경우라도 천담복(淺淡服)의 색상인 옥색 계통의 치마저고리를 입고 화려한 복색을 피하는 예를 갖추었다.

이상으로 우리의 전통 의례 복식에 대해 간략하게 살펴보았다. 전통 의례 복식에는 관혼상제의 복식과 더불어 일생에 걸쳐 치르는 몇 가지 의례와 그에 관련된 복식이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조선시대 이전의 의례 복식에 대해서는 자료가 부족하여 단편적인 모습만을 확인할 수 있었으나 유교가 정신적 바탕을 이루었던 조선시대에 들어서면서 예학의 융성과 더불어 의례가 중요한 의미를 지니게 되었고 엄격한 격식을 갖추어 실제 생활 속에서 실행되었음을 알 수 있었다. 따라서 의례와 관련된 복식도 그에 따라 다양하게 전개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조선 말기 이후에 들어온 서구 문물의 영향으로 전통 생활 방식에 변화가 초래되었다. 따라서 의례 자체는 물론 방식이 변화되면서 복식도 변화되어 갔으니 다시 그 시절의 아름답고 정겨운 모습을 볼 수 없게 되는 것이 아쉽다.

개요
팝업창 닫기
책목차 글자확대 글자축소 이전페이지 다음페이지 페이지상단이동 오류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