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09권 옷차림과 치장의 변천
  • 제5장 전통 사회의 패션 리더들
  • 2. 유행 스타일은 누가 어떻게 만들었을까
  • 사치와 사치 금지의 팽팽한 대결
이민주

패션의 형성과 변화를 설명하는 데 있어서 사회 신분은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요인이다. 사회 내 신분의 존재는 사람들로 하여금 신분의 과시 욕구나 신분 상승의 욕구를 갖게 만들며, 이러한 욕구가 패션을 형성하고 변화하게 만드는 원동력으로 작용한다. 그러나 신분이 존재하더라도 신분 간의 물리적·사회적 접촉이 많고 적음에 따라 영향력도 달라진다. 또한, 사회 이동의 가능성 여부가 패션에 중요한 영향을 끼친다.

전통 사회는 신분 구조가 엄격하며 출생에 의해 신분이 정해지므로 신분 간의 이동이 거의 불가능하다. 이렇게 엄격한 신분 제도가 있는 사회에서 는 신분에 따라 생활양식이 다르며, 착용하는 의복도 형태, 재질, 색채 등에 차이를 둔다. 따라서 의복을 통하여 신분을 구분할 수 있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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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일부 양반들은 더 좋고 비싼 의복을 입어 자신의 신분을 과시하려 했다. 특히, 여러 방법을 통해 신분이 상승한 하층민들 중에서는 자신의 신분을 과시하는 방법으로 사치한 복식을 입는 경우도 있었다. 또는 사치와는 거리가 있지만, 신분을 속이기 위한 방법으로 양반의 복장을 하는 경우도 있었다.

이에 조정에는 사치하는 풍속이 날로 더하고 달로 늘어남을 걱정하는 상소가 많이 올라왔다. 사치란 씀씀이나 치레를 분수에 지나칠 만큼 호화롭거나 고급스럽게 하는 것이다. 조선시대에는 서민들이 화려한 비단옷을 참람하게 경상(卿相)과 견주고 조정 인사들의 거마(車馬) 장식을 거리에서 과시하였으며275)『정조실록』 권10, 정조 4년 10월 계해. 천민들 역시 모두 갓을 쓰고 도포를 길게 끌고 다니는276)『정조실록』 권7, 정조 3년 3월 임진. 등 위아래가 서로 본받아 궁양(宮樣)을 모방함으로써 절도가 없어졌다는 기록 들이 자주 등장한다.

이에 나라의 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방침으로 영·정조대에 수없이 사치 금지령이 내려졌지만 17∼18세기에는 양반은 물론 경제적 능력을 갖춘 중인·상인·서얼·천민이 스스로를 과시하고자 하는 욕구의 발로인 사치를 막을 수 없었다. 사치는 한 경제를 지탱해 가고 진보시키는 좋은 수단은 아니라고 해도 한 사회를 부양하고 매혹시키는 수단임에는 분명하다.

더욱이 사치 풍조는 18세기의 생산력 진전과 맞물려 외제 선호로도 이어졌다. 그리하여 우리나라 사람들은 반드시 본토에서 생산되는 것을 천시하고 반대로 이국(異國)에서 나는 물품을 귀중하게 여겨 복식에 소요되는 것이면 면주(綿紬)는 사용하지 않고 능단(綾緞)을 사용하여 예로부터 쌓여 온 폐단을 고치기 어렵게 되었다고 하였다.277)『정조실록』 권21, 정조 10년 1월 정묘.

다른 나라의 물건은 같은 물건이라 하여도 비싸기 때문에 경제적인 뒷받침이 없으면 구매할 수 없었다. 이국의 물건을 선호하였다는 사실만으로도 당시 경제 활동이 농업, 공업, 상업 분야에서 활발하게 이루어졌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러한 사치 현상이 우리나라에서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서양에서도 부유한 시민들은 귀족보다 약간 늦기는 하지만 이전까지 귀족에게만 한정되었던 새로운 양식을 즐길 수 있게 되었다. 따라서 교회에만 허용된 금, 은, 보석의 사용과 붉은 보라색, 금색, 고급 털, 벨벳, 행잉 슬리브 등의 사용이 증가하자 수차례에 걸쳐 사치 금지령이 내려졌다.278)정흥숙, 『서양 복식 문화사』, 교문사, 2003, 162∼163쪽. 특히, 여성들에 비해 신분 상승에 대한 욕구가 강한 남성들은 거창한 가발이나 화려한 레이스, 넘쳐 나는 루프 다발 등으로 자신을 표현하고자 하였다.

어떤 이유에서든 의복을 통한 계층 구분이 어려워질 때에는 기득권 계층에서는 복식 금제령, 사치 금지령을 통해 풍속을 교화하고자 하였으나 궁극적으로 사치를 통하여 자신을 표현하고 과시하고자 하는 인간의 욕구는 더 이상 억압적인 규제의 대상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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