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09권 옷차림과 치장의 변천
  • 제5장 전통 사회의 패션 리더들
  • 3. 사대부가의 차림새
  • 모자의 나라, 조선
이민주

개항기 우리나라를 방문했던 외국인들이 조선을 ‘모자의 나라’284)G.W. Gilmore, 신복룡 역주, 『서울 풍물지』, 집문당, 1990,라고 했던 것처럼 우리 전통 양식의 관모는 다양하게 발달하여 종류가 무척 많다. 그 종류를 보면, 관(冠)·모(帽)·입(笠)·건(巾) 등으로 분류하는데, 신분과 의식에 따라 차등이 있다. 관·모는 중국제를 그대로 수용한 것으로 공식석상에서 착용한다. 입은 흑립·초립·전립·평량자·벙거지 등이 전통 양식의 특징을 잘 나타내고 있으며, 건도 망건·탕건·치건·두건·청건·평정건·감투 등이 다양하게 쓰였다. 그 중에서도 흑립은 양반 사대부를 상징하는 대표적 이미지로 흑립이란 명칭은 이미 고려 말 공민왕 때 기록이 보이나 형제(形制)는 조선시대에 들어 와서 완성되었으며, 양반들의 격조 높은 관모로 자리 잡았다. 그러나 시대에 따라 유행 스타일에 차이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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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립과 갓집
흑립과 갓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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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금이 근래의 갓 모양은 모(帽)가 짧고 대(臺)가 좁아서 예전과 크게 다르다 하여, 특별히 법사(法司)로 하여금 신칙(申飭)하여 예전 제도를 따르게 하였다.285)『숙종실록』 권23, 숙종 17년 2월 계미.

시대에 따라 변천 양상을 보면 국초에는 모정(帽頂)이 둥글고 테가 넓었던 것이 차차 모정이 높고 테가 넓은 것으로 변하였다. 명종대에는 대우(갓모자)가 너무 낮아 식기 두 개를 덮은 듯하고 양태는 작은 우산을 편 듯 하였다. 이것이 승립(僧笠) 같다고 하여 모양을 바로잡으려고 한 것이 대우가 너무 높고 양태가 너무 좁아 조롱거리가 되는 등 시대에 따라 변화를 보였다. 그 후 효종대에는 양태가 너무 커 문호 출입에 방해가 된다고 했고, 숙종대에는 다시 모정이 짧고 테가 좁아져 구제에 어긋난다 하여 논란이 되었다.286)이경자, 『우리 옷의 전통 양식』, 이화여자대학교 출판부, 2003, 192쪽.

그러나 유행의 속성이 그러하듯 약간씩의 변화를 거치며 후대에는 입첨(양태)의 크기가 더욱 극대화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옛날의 입첨은 겨우 어깨를 덮을 만하던 것이 지금은 또 넓어서 반좌를 지나쳤으니, 족히 미관이라고 할 것이 없고 사용하기에도 적당하지 않으므 로 개탄스럽고 의아스럽습니다. 그 넓은 것은 모두 사치와 허비에 속하는 것이니, 지금 정말 구제를 준행하고 이미 익숙해진 풍속을 따르지 말아야 폐단을 제거할 수 있겠습니다.287)『순조실록』 권48, 순조 34년 4월 29일.

또한, 양반 사대부들의 교만한 습속이 모두 갓으로부터 생겨났다288)이덕무, 『청장관전서』 권61, 양엽기.고 한 이덕무의 말대로 반투명의 갓은 비나 햇빛을 막지 못했지만 갓에 대한 남성들의 애정은 특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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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금상련(聽琴賞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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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갓은 모양뿐 아니라 갓끈의 치장이 대단하였다. 『경국대전』에는 당상관 이상만 갓끈에 금옥을 쓰도록 규정하였으며, 당하관이 마노·호박·산호·청금석을 사용하는 것은 금지하였다. 그러나 사회가 어지럽고 법 질서가 올바르지 않아 갓끈의 신분 규제가 사회적 문제로 대두되기에 이르렀다.

호박 갓끈은 당상관이 쓰는 것인데, 요즈음 사치 풍조가 나날이 심해져 서 문관·음관·무관이나 당상관·참하를 막론하고 호박이 아니면 쓰지를 않는다. 이 어찌 복장으로 신분의 귀천을 나타내는 뜻이겠는가 하고, 이어 당하관으로서 호박 갓끈을 쓰는 자를 일체 금지하고 자만호나 자수정으로 대신 쓰게 하였다.289)『정조실록』 권32, 정조 15년 4월 18일.

더욱이 사대부들의 갓끈은 상아영, 마노영, 죽영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길이는 복부를 지나기도 하고, 긴 길이의 패영(貝纓)을 귀걸이처럼 턱밑을 지나 귀 곁에 말아 걸고 있는 모습도 보인다. 또한, 갓끈에 있어서도 비단 끈의 겸용이 보이기 시작한다. 영조가 온천에 거둥하여 과천현에 묵었을 때 패영이 끊어질 것을 염려하여 견영(絹纓)을 패영과 같이 쓰기 시작하였다.

패영에다 견영을 함께 맨 것은 지난날 온양에 거둥할 때 처음 하기 시작한 것으로, 대개 끊어질까 근심해서였는데, 그 후에도 이 때문에 풍습이 되고 말았다.290)『영조실록』 권74, 영조 27년 9월 12일.

갓의 크기와 갓끈의 화려함을 다투었던 것은 양반 계층의 신분 과시 때문만은 아니었다. 갓을 올바르게 착용하기 위하여 걸리는 시간과 수고야말로 자유 시간을 즐길 수 있는 시간이 있음을 보여 주는 척도가 되어 멋과 풍류를 겨루는 대상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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