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09권 옷차림과 치장의 변천
  • 제5장 전통 사회의 패션 리더들
  • 3. 사대부가의 차림새
  • 높은 상투, 넓은 소매
이민주

박지원은 『양반전』에서 글을 읽는 사람을 사(士)라 하고, 벼슬하는 사람을 대부(大夫)라 하며, 덕이 있는 사람을 군자(君子)라 하였다. 양반 사대부는 과거 시험이나 채용 시험을 통하여 관리가 된 사람이나 퇴직한 사람 전체를 의미한다. 이들은 성리학의 교양과 경전 해석을 체득한 독서인(讀書 人) 층으로 ‘예’ 사상을 기본으로 한다. 예는 그 특성상 이론과 철학적인 면만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제도와 법률적인 면, 생활 관습적인 면과 연관을 갖는 종합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으면서 조선시대를 지탱해 주는 버팀목 역할을 해왔다.291)고영진, 『조선 중기 예학 사상사』, 한길사, 1996, 25쪽. 이러한 예의 의미는 개인의 사소하고 잡다한 일상생활에서부터 한 나라의 통치술에 이르기까지 명분과 의리에 맞는 합례적(合禮的) 행위를 지향하는 생활 규범이었다.

예를 행하는 데에는 우선 이를 행하고자 하는 마음가짐이 있어야 하며, 다음으로는 행동으로 옮기는 실행이 있어야 한다. 의복은 실행할 때에 감정의 내용을 담아 입고 행동으로 연출하게 한다.292)김영자, 『한국의 복식미』, 민음사, 1992, 177∼18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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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종어제희우시회도
효종어제희우시회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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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조선시대 사대부를 떠올리면, 의관을 정제하고 뒷짐을 진 채 느릿느릿 팔자걸음을 걷는, 약간은 도도해 보이는 남성을 떠올린다. 그들이 과시하고자 했던 그들만의 세계는 무엇일까? 의관을 정제한다는 것은 예의를 갖춘다는 것이요, 뒷짐을 쥐고 느릿느릿한 걸음을 걷는다는 것은 여유를 즐긴다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예의와 여유는 무엇으로 표현할 수 있을까? 과연 의복으로 표현할 수 있는 예의와 여유는 어디에 서 나왔을까?

한편, 사대부들이 상투를 높이고 소매가 넓은 옷을 입는 현상을 경계하는 목소리도 높아졌다. “궁성 안에서 높은 상투를 좋아하니 사방에서는 상투가 한 자 정도나 높고, 궁성 안에서 넓은 소매를 좋아하니 사방에서는 소매를 온필(全匹)의 비단으로 한다.”293)『연산군일기』 권48, 연산군 9년 2월 경술.고 하여, 넓은 소매를 만들기 위하여 많은 비단이 소요되는 것을 경계하고자 하였다. 조선 중기에는 무사까지 넓은 소매를 입어 중국 사람의 조소를 받기도 하였다.

우리나라 무사는 넓은 소매가 달린 품이 큰 웃옷을 입으므로 매번 중국 사람에게 기롱거리가 된다. 그런 때문에 일찍이 금령을 내렸는데, 전연 거행하지 않고 오히려 전의 습관을 따르고 있다가 또 진 유격에게 기롱을 받았다. 지금 무사로서 넓은 소매가 달린 품이 큰 웃옷 차림으로 말을 타는 자와 서인으로서 갓을 쓰거나 패랭이를 쓰는 자는 일체 호되게 금하여 중죄로 다스리고 조관의 경우는 파직시키며, 살펴 다스리지 못한 경우는 본조 및 도감을 아울러 다스릴 것을 사헌부·병조·훈련도감에 이르라.294)『선조실록』 권60, 선조 28년 2월 기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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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제공 초상
채제공 초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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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보다 몸을 민첩하게 움직여야 하는 무사의 넓은 소매가 사회적 문제가 되었을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넓은 소매의 문제가 무사들에 국한된 것은 아니었다. ‘점잖음’과 ‘위엄’을 나타내고자 하는 유학자들의 복식에서도 넓은 소매를 볼 수 있다. 효종어제희우시회도(孝宗御題喜雨詩會圖, 1653)와 채제공(蔡濟恭, 1720∼1799)의 초상화에 보이는 넓고 긴 소매는 어깨에서부터 주름이 지기 시작하여 앉아 있는 무릎 아래로까지 길게 늘어지고 있어 소매의 길이와 넓이를 짐작하게 한다.

옛날에는 소매 넓이가 속옷의 소매 모양 정도에 불과하였다. 어진을 우러러보거나 또는 여러 신하들의 화상을 보게 되면 상상할 수 있다. 이 근래에는 넓은 소매가 점차 더욱 넓어져서 그 넓이가 한 자 하고도 두어 치, 또는 서너 치나 되니 이 역시 낭비의 한 가지이다. 그러나 예전의 모양을 없애려고 이미 지어 놓은 옷을 자르면 보기에 해괴할 터이니 도리어 어떻게 되겠는가.295)『정조실록』 권38, 정조 17년 10월 경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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넓고 긴 소매의 창의
넓고 긴 소매의 창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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넓고 긴 소매는 관복의 문제만도 아니어서 남자 편복의 정수라 할 수 있는 도포의 소매는 물론 중치막, 대창의, 철릭에서도 광수(廣袖)의 두리소매가 압도적이다. 경기도 용인에서 출토된 전주 이씨 변(1636∼1731)의 창의는 겉은 운보문단(雲寶紋緞)이고 안은 주(紬)로 만든 겹옷이다. 뒤가 트여 있으며 소매는 통이 넓은 광수에 진동과 수구 쪽이 같은 두리소매이다.296)단국대학교 석주선 기념 박물관, 『명선』 중, 단국대학교 출판부, 2004, 134쪽. 이렇게 길고 넓은 소매는 1884년 갑신 의제 개혁으로 착수령이 내려지기 전까지 양반의 상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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