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09권 옷차림과 치장의 변천
  • 제5장 전통 사회의 패션 리더들
  • 3. 사대부가의 차림새
  • 조정의 골칫거리, 가체
이민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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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체(加髢)는 16세기부터 있었다. 장기 정씨 묘에서 출토된 다리와 양천 허씨 묘에서 출토된 다리, 그리고 이단하 부인의 다리에 이르기까지 조선 중기부터 전해 내려온 다리가 조정의 골칫거리가 된 것은 숙종 이후부터이다. 이는 다리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크게 하는 것이 문제가 되었다. 서로 과시하기 위해 높고 큰 것을 숭상하였으므로 가체의 값이 천정부지로 뛰어올랐다. 부녀자들은 머리에 가체를 얹기 위하여 중인의 집 10∼12채에 해당하는 대가를 지불하여야 하였다. 이를 일반 백성들까지도 모방하여 혼례 때 가체를 올리기 위하여 가산을 탕진하는 일이 많았다.301)『영조실록』 권45, 영조 33년 11월 기유. 구름 같은 머리가 양옆으로 흘러넘치고 이를 손으로 받치고 있는 여인의 모습이 애처롭기 그지없다. 무거운 다리 때문에 목이 부러져 죽었다는 이야기는 이 시기에 나이와 신분의 고하를 불문하고 여성들 사이에 가체가 얼마 나 유행하였는지 극명하게 보여 주는 희극이자 비극적인 이야기이다.

요즈음 어느 한 부잣집 며느리가 나이 열세 살에 다리를 얼마나 높고 무겁게 하였던지, 시아버지가 방에 들어가자 갑자기 일어서다가 다리에 눌려 목뼈가 부러졌다. 사치가 능히 사람을 죽였으니 아, 슬프도다.302)이덕무, 『청장관전서』 권30, 소사절, 제6 복식.

이에 영조는 가체 대신 족두리로 대체하고자 하였으나 족두리도 크기나 꾸밈이 문제가 되었다. 결국 족두리를 칠보 등으로 장식하는 사치가 심해지자 머리 장식과 관련되는 금옥, 주패 및 진주 댕기, 진주 투심 등을 금하였다. 또한, 혼인 때 칠보족두리를 세놓거나 세내는 것조차도 금지하였다. 그러나 정조 때 이르면 사태가 더욱 심각해져 정부에서는 다리에 대한 논의를 자주 벌였다. 우의정 체재공의 말을 들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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족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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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막대한 폐단 중에 다리보다 더한 것은 없습니다. 지극히 가난한 유생의 집이라 하더라도 6, 70냥의 돈이 아니면 살 수 없고, 만약 모양을 갖추고자 하면 수백 냥의 돈을 들이지 않을 수 없기 때문에 논밭과 집을 팔아야 할 형편입니다. 이 때문에 아들을 둔 자가 며느리를 보아도 다리를 마련하지 못하여 시집온 지 6, 7년이 넘도록 시부모 뵙는 예를 행하지 못하여 인륜을 폐하는 데 이른 자들이 셀 수 없이 많습니다.303)『정조실록』 권26, 정조 12년 10월 신유.

가체는 반가의 문제만이 아니었다. 1788년(정조 12) 얼굴을 드러내 놓고 다니는 상민이나 천민의 여인은 밑머리를 땋아 얹는 것은 허락하지만 다리를 붙이거나 얹는 제도는 각별히 금지한다고 하였다. 이미 가체는 반가 여인만의 소유물이 아니며, 일반 백성에게까지 널리 퍼진 현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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