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09권 옷차림과 치장의 변천
  • 제6장 멋스러움과 단아함을 위한 치장
  • 1. 머리치장
  • 족두리와 화관
송미경

조반 부인의 초상화를 보면, 머리 위에 관(冠)의 형태를 한 무엇인가를 쓰고 있다. 이와는 달리 16세기를 전후한 여성들의 무덤에서 모자 종류가 수습되기도 한다. 삼각형 여섯 조각을 잇고 이마가 닿는 쪽은 원통형으로 만들었는데, ‘육합일통모’, ‘소모자’, ‘감투’, ‘감토’라고도 한다. 이 모자 외에도 사각형의 모서리만 넣어 만든 모자, 삼각형 형태 네 개를 이어 만든 모자도 있다. 이러한 모자는 남녀 공용으로 사용하였으며, 주로 잠을 잘 때 머리를 단정하게 하기 위해 사용하였던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365)이은주, 「17세기 전기 현풍 곽씨 집안의 의생활에 대한 소고」, 『복식』 51권 8호, 2001, 30쪽.

이유원(李裕元)의 『임하필기(林下筆記)』에 “족두리는 광해군 중년부터 겉은 현금(玄錦, 검은색 비단), 안은 자주로 싸고 속을 비게 하여 머리 위에 썼다.”366)이유원, 『임하필기』 권17, 문헌지장편(文獻指章篇).고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광해군 때부터 족두리가 사용된 것을 알 수 있다. 1698년(숙종 24)에 간행한 『수교집록(受敎輯錄)』에 “상녀(常女)로서 너울(羅兀), 모단족두리(帽段足頭里)를 착용한 자 등을 엄금”367)『수교집록』 지5, 형전(刑典) 금제(禁制).하는 내용이 있는 것으로 보아, 족두리는 양반 부녀자 이상이 착용하였음을 알 수 있다. 또한, 1781년(정조 5)에 편찬한 『추관지(秋官志)』에는 “족두리의 장식을 금하는 것은 이미 금령에 있으니, 혼인할 때 착용하는 칠보족두리를 세놓거나 세내는 것부터 먼저 금지한다. 금령을 공포한 뒤에 이를 범하는 자는 수모(首母), 여승(女僧)을 막론하고 모두 법사로 이송해서 조율해 정배한다.”고 나와 있다.368)『추관지』 제3편, 고율부(考津部) 정제(定制).

오늘날에도 폐백을 드릴 때 신부의 족두리나 화관은 대여한다. 이미 수백 년 전부터 혼례 때는 신부를 화려하게 꾸며 줄 족두리와 화관을 빌려 사용하였다는 것은 재미난 사실이다. 게다가 이런 혼례품을 빌려 주는 사람이 수모나 여승인 것도 흥미롭다.

또 정조는 “각각 남편의 관직에 따라 금권자(金圈子), 옥권자(玉圈子)를 하되 품계에 따라 족두리 위에 붙여서 등위(等位)를 표하는 것이 마땅합니다.”라고 하는 건의에, “족두리 위에 금, 옥을 다는 문제도 시행하지 않겠다.”고 자신의 견해를 밝히고 있다.369)『정조실록』 권26, 정조 12년 10월 신묘. 1897년(광무 1) 반포된 예복을 보면, 관위(官位)가 있는 자의 부인은 대례복으로 화관과 원삼, 소례복으로 당의를 입었으며, 관위가 없는 자의 부인은 대례복은 족두리에 옥색 저고리와 남치마, 소례복은 족두리 없이 옥색 저고리와 남치마를 입었다. 조선시대 말에는 족두리나 화관의 착용 여부가 예식의 중대함을 가늠하는 잣대의 역할도 하였다.

족두리와 화관은 모양이 조금 다르다. 족두리가 일곱 쪽의 검정색 옷감을 이어 붙이고 속은 솜을 넣거나 비워 둔 모양이라고 하면, 화관은 딱딱한 종이 위에 자주색이나 검정색 종이를 바르고, 금색 종이나 금칠 혹은 금실로 가장자리를 장식한 것이다. 정면에 수자문(壽字紋) 옥과 비취를 꾸미고 정수리에는 백옥으로 봉황을 올리고 산호·비취·마노·옥 등으로 꾸민 봉을 세웠다. 양쪽에는 파란 죽잠에 떨쇠를 달아 장식한 화관 비녀 한 쌍을 꽂았다. 또 다른 화관으로 개성과 평양 지방에서 혼례 때 사용하던 것이 있다. 이 화관들은 말 그대로 꽃으로 꾸며진 관(冠)이다. 개성과 평양 지방은 혼례복도 여느 지방과 달리 특색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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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왕비의 족두리
영왕비의 족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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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관
화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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족두리는 본디 왕실과 사대부 여인들이 사용한 것이었으나, 가체가 유행함에 따라 가체 금지령이 내리고, 일반인들도 쪽머리를 하고 행사 때는 족두리를 할 수 있게 되었다. 풍속도에서 족두리의 모습을 찾아보면 실제로 보석으로 장식된 것은 없다. 국립 중앙 박물관 소장의 회혼례도(回婚禮圖)를 보면 여주인공은 장식 없는 족두리를 하고 있으며, 상을 받고 있는 나머지 여인들은 작은 다리를 올리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또 다른 국립 중앙 박물관 소장인 김홍도의 모당 홍이상 평생도(慕堂洪履祥平生圖)의 회혼식(回婚式)을 보면 주인공은 원삼과 족두리, 나머지 주변 인물들은 족두리에 치마저고리를 입고 있다. 1781년(정조 5)에 그린 이 그림은 작자 미상의 회혼례도보다 저고리가 훨씬 짧고 좁아져 회혼례도의 제작 시기가 조금 더 앞선 것을 알 수 있다.

족두리는 속이 빈 것과 솜을 둔 것 두 종류가 있다. 다시 각각에는 장식 이 있는 것과 장식이 없는 것의 두 종류가 있다. 속이 빈 것을 홑족두리라고 하고, 솜으로 속을 채운 것을 솜족두리라고 한다. 홑족두리는 소론 집안에서 쓰고, 솜족두리는 노론 집안에서 썼다.370)김유경, 『옷과 그들』, 삼신각, 1994, 131쪽. 장식이 없는 것을 민족두리라고 한다. 혼례 때에는 보석으로 장식을 많이 하지만, 평상시에는 궁중에서조차 보석 장식만 몇 개 한 솜족두리를 하였다. 순종의 계비인 윤황후(尹皇后)와 궁중 여인들이 1910년대에 찍은 사진을 보면 중앙의 윤황후와 그 밖 왕실의 여인들이 당의에 화관과 족두리를 하고 있다. 국립 고궁 박물관에는 영왕비가 사용하던 족두리와 화관이 남아 있다. 여염집에서 화려하게 장식한 족두리를 사용한 것에 반하여 영왕비가 착용했다는 궁중의 족두리는 매우 단순하다. 일곱 개의 꽃잎을 가진 백옥 위에 밀화와 진주로 장식한 꽃송이는 마치 추운 겨울을 지나 봄맞이하기 위해 세상에 나온 수선화 한 송이를 보는 듯 청아하다. 이 족두리에는 검정색 비단으로 만든 긴 끈과 뒷면에는 붉은 끈으로 연결된 작은 비녀가 달려 있어 머리의 쪽에 비녀를 다시 한 번 꽂아 머리에 족두리를 고정시킨 것을 알 수 있다.

수많은 논의를 거쳐 정착된 쪽머리와 족두리, 화관의 착용은 요즈음 혼인한 새색시의 차림에서도 조선시대 말기의 유물과 별 다름없이 전해 오고 있어 전통의 힘을 느낄 수 있다.

족두리와 화관이 궁중에서 시작하여 민가까지 퍼진 것에 비해 첩지는 궁중에서만 사용한 머리 장식품이다. 첩지는 왕비를 비롯한 내·외명부가 쪽머리의 가르마에 얹어 신분을 나타내며, 화관이나 족두리를 할 때는 그것이 흘러내리지 않게 하는 역할을 한다. 내명부는 궁중에서 항상 첩지를 하였고, 외명부는 궁중을 출입할 때나 예장을 할 때 하였다. 황후는 도금한 용을 올린 첩지를, 비와 빈은 도금한 봉황 첩지를, 내·외명부는 신분에 따라 도금이나 은 그리고 놋쇠로 만든 개구리첩지를 사용하였다. 첩지는 몸체를 검정색·자주색·홍색 비단 위에 붉은 실로 고정한 후, 그것을 다시 가체 위에 붙여서 정수리에 오게 하고 본 머리와 함께 고정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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