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09권 옷차림과 치장의 변천
  • 제6장 멋스러움과 단아함을 위한 치장
  • 2. 몸치장
  • 돈이 많아도 달 수 없었던 선추
송미경

부채는 요즈음과 같이 냉방이 잘 되지 않았던 과거에 선비들의 여름철 필수품이었다. 더위가 시작되는 단오에는 부채를 서로 주고받는 풍속이 있었다. 이러한 풍속은 고려 중기부터 시작하여 조선 말기까지 성행하였다. 『경도잡지』에는 “단옷날 또 새 부채를 나누어 준다. 이를 ‘단오선’이라 한다. 경관(京官)에게 궁중의 부채를 나누어 주는데 대나무 살에 종이를 바르고 새나 짐승의 그림을 그렸는데 오색의 비단을 감았다.”378)유득공, 『경도잡지』.는 내용이 있다.

남자들은 외출할 때 접는 부채인 쥘부채를 쓸 수 있었지만 여자들은 사용하지 못하였다고 한다. 접는 부채는 고려시대에 우리나라에서 발명하여 중국과 일본으로 기술이 전파되었다. 고려에 온 중국 사신이 쥘부채에 그림이나 글씨를 넣은 고려 서화선(書畵扇) 하나 얻는 것을 귀히 여기게 되자 조선시대에는 중국이나 일본에 본격적으로 수출까지 하였다.379)금복현, 『전통 부채』, 대원사, 1990, 17쪽. 서양에서는 동양에서 수입한 부채가 18세기 여성들의 필수 액세서리가 되었다. 동양의 부채가 종이로 만들어 빈 여백에 그림이나 시를 적어 넣는 등 남자들의 예술 활동에 도움을 주었다면, 서양의 부채는 비단이나 레이스로 만들어 여성들의 장신구로 사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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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상청앵도
마상청앵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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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남자들의 부채 용도는 다양하였다. 더울 때 더위를 식히는 것은 기본이었고, 외출 때 얼굴을 가리는 역할도 하였으며, 풍류를 즐길 때는 춤사위에, 그리고 부채의 면 위에 서화를 그리거나 시를 쓸 때 이용하였다. 그뿐만 아니라 마음을 전하는 정표로 주고받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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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래터
빨래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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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홍도의 빨래터에는 허벅지까지 속옷을 걷어 올리고 빨래를 하는 여인들의 모습과 머리를 빗는 여인이 그려져 있고, 오른쪽 상단에는 부채로 얼굴을 가리고 숨어서 보고 있는 선비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이렇게 떳떳하지 못한 은밀한 용도에도 부채가 사용되었다. 김홍도의 다른 그림에는 부채가 계절에 관계없이 사용되었다는 것을 보여 주는 단서가 있다. 마상청앵도(馬上聽鶯圖)는 동자(童子)를 데리고 말을 타고 기행을 즐기는 자신의 모습을 김홍도가 50대에 그린 것인데, 친구인 이인문(李寅文, 1745∼1821)이 쓴 발문(跋文)에는 안개비가 오는 봄의 날씨라고 밝히고 있다. 그림의 주인공은 언덕 위의 버들가지가 돋기 시작하는 쌀쌀한 봄날임에도 불구하고 조그마한 부채를 펴서 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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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영복 초상
조영복 초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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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인 화가 조영석의 맏형 조영복(趙英福, 1672∼1728)의 54세 모습을 그린 초상화를 보면 평상복 차림에 허리에는 붉은 술띠와 부채를 매달고 있다. 매우 간단한 장신구로 선비의 차림새가 완성되는 느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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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채를 든 외국인
부채를 든 외국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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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비나 관리는 상징적으로 부채를 들고 있다. 구한말 외국인이 우리나라 관복을 입고 찍은 사진에도 부채가 등장한다. 고종 때 조선 주재 2대 프랑스 공사 겸 총영사의 신임장을 가지고 1892년(고종 29)에 서울에 왔던 프랑뎅(Hippolyte Frandin)이 사모에 쌍학흉배를 단 단령을 착용하고, 딸기술이 달린 쥘부채를 오른손에 쥐고 찍은 사진이 남아 있다.

선추(扇錘)는 부채의 균형을 이루기 위해 부채의 끝에 다는 장식품이다. 조선시대에는 벼슬이 있는 사람들만 할 수 있는 장신구였으나, 개화기에는 규제가 없었다. 선추는 장신구와 더불어 매우 실용적인 용품으로 구성되었다. 나침반, 향갑, 이쑤시개, 침통 등 실용품 이외에도 장식으로만 쓰는 것이 있었다. 상아, 밀화, 옥, 향, 나무, 금속 등을 재료로 사용하였다. 선추는 장식물과 매듭 그리고 술로 구성되어 있는데, 매듭과 술은 대부분 장식물을 돋보이게 하는 범위에서 매우 간단하게 꾸며 단아해 보인다.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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