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09권 옷차림과 치장의 변천
  • 제6장 멋스러움과 단아함을 위한 치장
  • 3. 발치장
  • 남산골 딸깍발이의 나막신
송미경

오늘날에는 한강을 중심으로 서울을 강남과 강북으로 구분하듯 조선시대에는 청계천을 중심으로 북촌(北村)과 남촌(南村)으로 나누었다. 궁궐이 가까운 북촌은 권력이 있는 사람들이 살았고, 상대적으로 먼 남촌은 가난한 사람들이 살았다. 남촌인 남산골에는 선비들이 많이 살았는데, 비가 올 때 신고 다니는 나막신을 마른날이나 진날이나 신고 다녀, 융통성 없고 가난한 선비를 ‘남산골 딸깍발이’라고 불렀다. 남산골 샌님은 지나 마르나 나막신을 신고 다녔으며, 마른날은 나막신 굽이 굳은 땅에 부딪쳐서 딸각딸각 소리가 유난하였기 때문이다.388)이희승, 『딸깍발이』, 범우사, 1976, 21∼26쪽. 나무로 만든 나막신은 비 오는 날이나 진흙길에 신는 신으로 알려져 있지만, 풍속화나 구한말 사진을 보면 맑은 날에도 신었던 것을 알 수 있다. 모양은 굽이 있는 것과 없는 것, 무늬를 새 긴 것, 색칠을 한 것 등 다양하였으며, 나무의 특성상 터지는 것을 막기 위해 밀랍을 발라 간수하기도 하였다. 이익(李瀷)은 『성호사설(星湖僿說)』에서 “진흙 길에서만 신는 것이 아니라고 하면서 나도 평시에 말을 타고 원행하지 않으면 극(屐, 나막신)을 신는데, 나무의 성질이 마르면 터지기가 쉽기 때문에 밀랍을 녹여 겉을 다 칠해서 말라 터지지 않도록 미리 방비하는 것이다. 친구에게 선물로 받은 굽이 없는 나막신이 있는데 모양이 혁리(革履)처럼 되어 있다고 하면서 가죽은 비에 젖거나 햇볕에 쪼이면 터지고 간수하는 데도 수고롭게 될 것이니 밀로 칠한 나막신에 못 미칠 것”이라고 하였다.389)이익, 『성호사설』 권6, 만물문(萬物門), 목극(木屐). 우리나라에 나막신은 임진왜란 전에 들어왔는데, 통영(統營)에서 만든 것을 제일 귀하게 여겼고, 제주에서 만든 것 가운데는 해동(海桐)으로 만든 것이 상품(上品)이었다.390)이규경, 『오주연문장전산고』, 목극변증설(木屐辨證說). 상류층은 나막신을 은행나무, 참죽나무에 옻칠을 올리고 양각(陽刻)을 하거나 색칠을 하여 신었고 서민층은 소나무, 배나무로 소박하게 만들었다. 오동나무는 가벼워 아동용, 여성용을 비롯하여 상하 구별없이 모두 선호하였다.391)박성실, 『화(靴), 혜(鞋), 이(履)』, 단국대학교 출판부, 2004, 2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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