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09권 옷차림과 치장의 변천
  • 제7장 우리 옷을 밀어낸 양장과 양복
  • 2. 이발소와 미용실
  • 단발령과 이발사
최은수

요즈음에는 남자들이 미용실에서 머리를 깎는 모습이 낯설지 않지만, 10여 년 전만 해도 이발소에서 머리 손질하는 것을 당연히 여겼다. 남성 전문 미용실이 하나 둘 늘어나면서 동네에서 이발소를 찾기가 쉽지 않다.

우리나라 사람으로 이발소를 맨 처음 개업한 사람은 유양호(柳養浩)라는 사람이며, 단발령이 내려진 지 6년째 되는 1901년에 개업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1901년은 단발령에 대한 반발이 심해져 이를 취소한 지 4년째 되는 해이다. 즉, 고종은 개화의 필요성을 강조하여 머리 모양을 서구식으로 바꾸고 백성들도 따르게 하였다. 백성들이 받은 단발령의 충격을 뒤로 하고 고종, 순종, 황태자, 영왕 등 조선 왕가의 남성들과 대신들은 앞장서서 짧게 머리를 깎고 새 사조의 흐름 속으로 뛰어들었다.

창덕궁에 구한말 왕가의 이발실이 보존되어 있다. 관복 대신 연미복을 입고 짧게 깎은 머리에 모자를 옆에 끼고 사진 찍은 구한말 대신들의 모습에서 당시의 정황을 엿볼 수 있다.

단발령이 시행되기 이전까지 조선 기혼 남성들의 전통적 두발은 상투머리였다. 어린아이나 미혼 남성은 머리를 땋아 허리 부근까지 길게 늘어뜨리는 형태를 유지하였다. 상투는 곧 성인을 의미했으며, 소중한 자부심과 존경 그리고 의무이기도 하였다.

확대보기
단발령 지령
단발령 지령
팝업창 닫기

그러나 근대화의 바람은 두발의 모양마저 바꾸었다. 1896년 단발령의 시행으로 일본, 중국과 마찬가지로 조선에서도 단발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단발을 찬성하는 쪽에서는 상투는 구식 생활의 관습이고 미신 행위이므로 마땅히 타파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자진해서 단발을 하기도 하였다. 그런가 하면 단발을 반대하는 쪽에서는 단발은 일종의 신성 모독 행위라며 여기저기서 비통과 울부짖음의 목소리를 토해 냈다.

이발사는 이때부터 남성들과 불가분의 관계를 맺으면서 새로 생긴 신종 직업으로 각광받게 되었다. 처음 개업을 한 곳은 인사동이었고, ‘동흥 이발소’라는 이름으로 문을 열었다. 유양호가 이발소를 개업하자 한국인들 사이에 소문이 금방 퍼졌는데, 서울은 물론 멀리 인천까지 전해졌다. 특히, 서민들에게 인기가 있었다.

고종의 상투는 농상공부 대신인 정병하(鄭秉夏)가 잘랐다고 했으며, 그때부터 단발은 곧 상투를 자르는 것이 되었다. 길거리에는 상투만 잘라 그 아랫부분 머리카락이 너풀거리는 남성들을 흔하게 볼 수 있었다. 어떤 사람들은 반발의 의미로 중의 머리처럼 박박 깎고 다니기도 하였다. 평생 긴 머리로 상투를 틀던 사람들에게는 머리를 자르는 것이 보통 곤혹스러운 일이 아니었다. 머리 처리를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당혹스러워하는 서민들에게 혜성처럼 나타난 동흥 이발소는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왔다. 양반들은 체면치레를 하느라 일본인 이발사를 불러서 점잖게 머리를 하였지만, 서민 들은 단발을 하고 싶어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전전긍긍했고, 이미 상투만 자른 사람들 역시 자꾸 자라는 머리카락을 주체할 수 없어 아예 박박 미는 사람도 있었다.

확대보기
갈모 쓴 노인
갈모 쓴 노인
팝업창 닫기

당시 우리나라를 여행했던 영국인 비숍의 탐방기에는 상투만 자르고 옆머리가 무성한 병사들이 마치 야만인처럼 보였다는 기록이 있다. 이는 100년 전 한국의 모습을 이해하는 데 일말의 도움을 줄 뿐만 아니라 이발소가 등장하게 된 사회적 분위기를 읽게 하는 자료가 되기도 한다.

동흥 이발소에서는 남성들의 머리를 서구식으로 깎아 주었는데, 거울을 통해 상투가 잘리는 것을 보며 통곡하는 사람도 있었다. 스스로 이발소에 왔으면서도 눈물을 줄줄 흘리며 머리를 맡기는 사람도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동흥 이발소 앞에 “상투 짜 줌, 배코도 침”이라는 이상한 문구가 하나 붙었다. 단발을 해주기 위해 생겼다는 이발소에서 갑자기 상투를 짜 주고, 면도로 머리를 박박 밀어 주겠다는 것이다. 이유인즉 상투만 잘랐다가 단발령이 취소되자 다시 상투를 하겠다는 사람들이 늘어났기 때문에 이러한 문구가 나붙게 되었다. 그 당시 상투를 집에서 혼자 쉽게 짤 수가 없었던 것이 상투를 잘라 단발을 하여 윗머리가 없어졌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누군가 머리를 짜 주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이다. 유양호는 이후 이발소를 지금의 교보 빌딩 근처로 옮겨 광화문 이발소로 이름을 바꾸었다. 훗날 이 자리에 ‘조선 극장’이 들어섰다. 그가 개업한 직후에 여기저기에서 한국인 이발소가 생겨났는데, 그때에도 “상투 짜 줌, 배코도 침”은 여전히 나붙어 있었다.397)김은신, 『한 권으로 보는 한국 최초 101 장면』, 가람 기획, 1998, 263∼265쪽 참조.

단발이 단행된 이후에는 상투를 대신할 소품으로 모자가 인기를 끌었다. 신문에는 중산모자, 중절모자, 학도모자, 부인모자 등 다양한 모자 광고가 게재되었으며, ‘모자는 문명의 관’이라는 그럴듯한 선전 문구로 사람들의 이목을 끌었다. 사실 조선인들은 이때까지도 다양한 모자를 착용하고 있었다. 갓 하나만 해도 신분이나 지위, 용도에 따라 매우 다양하였다. 그러나 갓은 더 이상 개명 시대에 어울리는 모자일 수 없었다. 이른바 ‘문명의 관’은 중절모와 같은 서양식 모자였다. 상투와 갓이 미개의 징표가 되는 대신 단발과 중절모가 문명을 상징하게 되었던 것이다.398)부산 근대 역사관, 『광고, 그리고 일상(1876∼1945)』, 2004, 136∼138쪽.

확대보기
서양 모자
서양 모자
팝업창 닫기

이후 한국 남자의 머리는 짧게 깎은 머리와 콧수염이 산뜻한 서재필, 민영환, 윤봉길, 안중근 등 역사의 전면에서 활동했던 남성들의 모습이 스쳐 가면서 머리 땋고 상투 튼 역사는 비켜 간 것 같다. 그 흔적은 이제 상투에 꽂았던 동곳이나 갓, 관모 같은 유물로만 남았다. 지극히 화려하기 짝이 없던 동곳을 담아 두던 수주머니도 한갓 유물로 몇몇 수장가들의 손에서 보일 뿐이다.399)김유경, 『옷과 그들』, 삼신각, 1994, 230쪽.

개요
팝업창 닫기
책목차 글자확대 글자축소 이전페이지 다음페이지 페이지상단이동 오류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