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09권 옷차림과 치장의 변천
  • 제7장 우리 옷을 밀어낸 양장과 양복
  • 3. 모던 보이, 모던 걸
  • 유행의 리더, 모던 보이·모던 걸
최은수

종로 거리를 누비면서 근대의 소비를 조장하며 유행의 첨단을 걷는 사람들을 모던 보이나 모던 걸로 불렀다. 그러나 당시 모던 걸과 여학생 혹은 모던 보이와 지식 청년 사이의 구분은 모호하였으며, 실제로 패션과 흐름을 주도하는 사람은 여학생들이었다.

모던 보이는 두툼한 각테 안경이나 가느다란 금테 안경을 쓰고 폭이 넓은 넥타이를 매고 반짝거리는 백구두를 신었다. 어떤 사람은 머리에 펑퍼짐한 중절모를 쓰고 짧은 지팡이를 짚거나 팔에 걸쳤다. 모던 걸은 파마나 단발머리에 분을 발라 화장을 하고 입술에는 붉은 립스틱을 발랐다. 또한, 무릎에 닿는 투피스나 원피스를 입고 실크 스타킹에 뾰족구두를 신고 가슴에는 커다란 핸드백을 안았다. 또한, 일본어나 영어, 불어를 곧잘 하고 시계와 만년필을 차거나 꽂고 다녔다. 트라데 말크(trade mark)라 불리는 외국제품을 온몸에 휘감고 다니면서 식민지 조선의 소비 보급과 유행을 선도하였다.406)이이화, 앞의 책, 121쪽∼128쪽.

모던 걸과 모던 보이는 특별한 직업 없이 하는 일도 없으나 경제적 여유가 있는 유한 계급으로, 도시의 퇴폐와 향락적 이미지를 대표하는 소비 공간이었던 카페나 바에 몰려들었다. 카페에서 이들은 다리를 꼬고 앉아 맥주나 양주를 마시고 담배를 피웠으며 레스토랑에서 라이스 칼(카레라이스)을 시켜 먹고 바에서는 위스키를 마셨다.407)부산 근대 역사관, 앞의 책, 9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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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던 보이의 산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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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던 걸의 장신 운동
모던 걸의 장신 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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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식 있는 사람들은 이들이 의식도 없이 유행을 좇고 요란한 차림을 한다며 비아냥거리는 투로 모던 보이(약칭 모보), 모던 걸(약칭 모걸)이라는 말을 만들어 사용하였다.

전통 복식에서 근대 복식으로의 변화는 개항 이후 1884년 갑신 의제 개혁을 시발로 하여 1895년 을미개혁을 정점으로 가속화되었다고 할 수 있다. 특히, 을미개혁의 단발령과 함께 1899년 외교관 복장의 양복화, 1900년 관원 대례복의 양복화 등에 의해 조선 왕조의 관복 제도는 완전히 양복화되어 국왕 이하 모든 관원이 서구식 양복을 착용하게 되었다. 이로써 우리의 전통적인 차림새와 서양식 의복이 공존하는 이중 구조가 형성되었다. 그러나 근대화의 일환으로 추진되었던 복제 개혁은 국내 세력의 거센 반발에 직면하였다. 이러한 반발은 전통 의복이 단순한 입을 거리가 아니라 전통적 인 의식과 문화를 대표하고 있음을 보여 주는 것이다. 반면에 우리나라 역사상 최초로 양복을 입은 사람이 개화파 인물들이었다는 사실을 놓고 볼 때 서양 의복인 양복은 근대화의 대표적인 상징이었다고 할 수 있다. 옷차림에 신분적인 관념이 강하게 투영되었던 당시의 시대적 배경에서 지배층에 속했던 개화파 인물들이 서구의 서민복이었던 ‘세비로(背広, 신사복)’를 착용했다는 것은 그들의 개화 의지와 근대화의 열망을 여실히 보여 주는 것이었다.408)구문회, 앞의 책, 7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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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복과 양복의 혼용
한복과 양복의 혼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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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옥균, 박영효, 서광범은 개화파 인사들로 상당히 이른 시기에 단발을 하고 양복을 착용하였다. 그들은 1881년과 1882년, 개화한 일본을 살펴보기 위해 일본에 머무르던 중에 머리를 자르고 양복을 사 입었다. 그러나 아직까지 국내에서는 양복이 공인되지 않았으므로 귀국할 때는 양복을 벗고 다시 한복을 입었다.409)김진식, 『한국 양복 100년사』, 미리내, 1990, 54쪽.

양복과 양장이 시대 사조를 타고 차츰 확산되기 시작하였다. 일본과 미국을 다녀온 개화 신사가 먼저 양복을 입고 돌아다녀 세인의 관심을 끌었으나 친일파 또는 서양 오랑캐라는 지탄을 받기도 하였다. 척사파(斥邪派) 계열의 유생들은 정신의 표상인 의관을 바꾸는 것은 정신을 파는 행위라고 지탄하였다.

을미개혁 무렵 양복이 공인되었다. 당시에는 기능 면에서 편리하다는 점이 주로 강조되었으나 양복의 공인은 조선이 국제 사회의 일원으로 편입되는 것을 의미하였다. 특히, 고종과 순종은 스스로 전통 제복을 벗고 서양식 양복을 입어 보이면서 간편복 입기를 권장하였다. 대신도 공식복으로 양복을 입고 나타났다. 의제 개혁은 의병 운 동이 일어나는 원인이 되기도 했으나 대세를 거스를 수는 없었다.

통감부 시기에 일진회(一進會) 회원들은 양복을 단복처럼 지정해 입었다. 그들이 양복을 입고 돌아다니면서 친일 행각을 벌이자 민중은 멸시의 눈으로 바라보았으며, 애꿎게 양복을 더러운 물건으로 취급하였다. 그러나 일진회 회원은 양복 보급에 여러 모로 공헌하였고, 일제강점기에 들어와 양복은 차츰 민간에 보급되었다. 이 무렵 신식 신사로서 격식과 품위를 갖춘 모습은 프록코트(frock coat)와 실크해트(silk hat)를 착용하고 지팡이를 짚고 다니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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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복과 구두 광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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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년대에 들어 양복이 크게 유행하였다. 경성과 대도시에서 일본인이 양복을 입고 돌아다니는 모습을 자주 볼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조선인 관리와 상인도 곧잘 입었다. 유행을 선도하던 본정(本町, 지금의 명동)이나 무교동 일대에서는 젊은 양복 신사가 지팡이를 짚고 거들먹거리는 모습을 흔히 볼 수 있었다. 양복 차림에는 셔츠, 넥타이, 넥타이핀, 커프스, 모자, 구두, 지팡이와 가죽 허리띠가 기본 액세서리였으며, 때로는 바지 위쪽에 붙은 작은 주머니에 금딱지 회중시계를 넣고 수시로 꺼내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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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로의 양복점
종로의 양복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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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단은 외국제로 주로 서지(serge)를 썼으나 양복은 모두 국내에서 만들었다. 당시 남촌인 본정 일대에는 일본인이 경영하는 양복점 100여 개, 북촌인 종로 일대에는 조선인이 경영하는 양복점 50여 개가 있었다. 지방 도시에도 드물게나마 양복점이 생겨 영업을 하였다. 기성 제품을 파는 곳도 있었으며 직접 주문자의 체격을 재어 제작하기도 하였다.

철따라 옷감이 달라 양복점의 세일 방법도 다양하였다. 겨울철이 다가오자 종로에 있는 해인옥 양복점에서 다음과 같은 광고를 신문에 냈다.

한래서왕(寒來暑往) 겨울이 왔습니다. 세베로의 겨울 외투와 부인 망토와 학생 망토와 같은 망토 많이 제작하여 놓고 내월 1일로부터 동 30일까지 실가중(實價中) 2할인으로 제공하오니 친림하시어 택용(擇用)하시기를 바라노이다.410)『동아일보』 1921년 11월 3일자.

광고에는 신사, 숙녀의 옷차림을 그려서 실었는데 신사는 중절모를 쓰고 와이셔츠와 넥타이 차림에 양복을 입었으며 구두를 신었다. 숙녀는 파 마 머리에 망토를 입고 발목 위까지 내려오는 치마에 하이힐을 신은 차림이었다. 이것이 이른바 당시 신사, 숙녀 사이에서 유행하던 양복, 양장 차림이었다.

자연히 양복 제조 기술자의 양성이 이루어졌다. 1921년 개성에 반도 양복 실습소가 설립되어 기술을 가르쳤으며, 경성 양복 연구회도 설립되어 보급에 나섰다.

여성 복식에도 상류층과 유학생을 중심으로 양장이 도입되기 시작하였다. 이들 여성의 옷차림과 서양 선교사들의 복식은 당시 여성들에게 자극이 되었음에 틀림없으나 일반 여성들의 복식에 큰 변화가 나타나지는 않았다. 이들의 양장 착용은 양장의 유행을 선도했다기보다는 한국 전통 복식의 개량 논의로 발전했다고 볼 수 있다.411)유수경, 『한국 여성 양장(洋裝) 변천사』, 일지사, 1990, 13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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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장 입은 엄비
양장 입은 엄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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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의 양장은 양복보다 뒤늦게 보급되었다. 외국 여성 선교사나 외국 여성이 조선에 양장을 선보이자 서양인 거리인 정동에는 양장 차림을 보려고 구경꾼이 몰려들었다. 그 뒤 일부지만 미국 유학을 다녀온 여성들이 양장 보급에 선도적 역할을 하였다. 초기에는 윤고라(尹高羅)와 최활란(崔活蘭) 등이, 후기에는 김명순과 나혜석(羅蕙錫) 등이 양장 차림을 하고 돌아다녀 이목을 끌었다. 숙명 여학교에서는 양장을 교복으로 제정하였다.

이런 분위기에 힘입어 1920년대 신문과 잡지에서는 양장을 만드는 법 등을 소개하였다. 강습회도 자주 열었다. 조선 최초의 양장 디자이너로는 이정희(李貞嬉)를 꼽을 수 있다. 1922년 그녀는 블라디보스토크의 공립 학교를 졸업하고 귀국하여 동덕 여학교의 양재 교사로 부임하였다. 남녀 양복과 아동복 등 양재 기술을 가르치자 다른 여학교와 사회 단체에서도 양복과를 신설하고 강습회를 열었다. 이렇게 하여 양장은 재봉틀의 보급과 함께 가정에서도 손쉽게 만들어 입게 되었다.

양장의 기본 차림은 블라우스와 스커트이다. 정장은 망토에 원피스나 테일러드412)테일러메이드(tailor-made)라고도 하며 드레스메이커(dressmaker, 여성복 제조)에 상대되는 말이다. 특수한 것을 제외하고는 남녀의 복식형은 명확히 구분되고 제조법도 달랐으나 여성이 남성 복장형을 채용하기 시작한 19세기 중엽 이후에 이 말이 생겨났다. 지금은 남성복 제조를 맨 테일러드, 여성복 제조를 드레스 테일러드라고 하여 구별하고 있다. 투피스를 입는 것이다. 액세서리로 스카프, 장갑, 넥타이를 사용했고 다양한 서양 모자를 썼다. 소매는 팔목까지 왔으며 스커트는 바닥까지 내려갔다가 차츰 짧아져 발등 위로 올라갔다. 양복점처럼 여러 곳에 양장점이 생겨 광고로 세일을 알리고 선전하였다. 평상복으로는 가벼운 원피스를 만들어 입었으며 뜨개질로 장갑과 스웨터를 만들었다.

극단적인 모양의 옷도 유행하였다. 1927년에 남자는 치렁치렁한 나팔바지를 입고 중절모를 찌그려 쓰고 길고 검은 우산을 들고 다녔다. 여성은 둥근 모자를 쓰고 민소매 옷을 입어 어깨를 훤히 드러냈다. 스커트는 무릎에서 훨씬 올라가는 미니였으며, 하이힐에 검은 스타킹을 무릎까지 올려 끈으로 맸다. 인조견이 옷감으로 널리 사용되자 속옷인 드로어즈가 훤히 비치는 치마를 입고 돌아다녔다. 손에는 술이 달린 파라솔을 들었다.

이것이 유행의 첨단을 걷는 모던 보이와 모던 걸의 차림이었다. 『별건곤』에서는 ‘가상소견’이라는 제목을 달고 이렇게 풍자하였다.

이러고 다녀야 배우인 줄 알아주니 배우 노릇하기도 한벌 고생이 아니랴. 아이고 사이상(남자)보다도 내가 더 고생이지요. 작은 구두 신고 궁둥이짓을 하노라니 발목이 견디어나야지.413)『별건곤』 1927년 7월호.

배우가 유행을 선도한다고 하지만 바의 웨이트리스, 무도장의 무희 그리고 유한 마담과 기생들이 화려하고 기이한 차림으로 사치와 유행을 선도한다며 사람들의 한탄과 질타가 이어졌다. 학생들도 이런 풍조에 물들어 경성제대 학생이나 전문학교 학생들은 망토를 멋대로 걸치고 사각모를 마구 구겨서 쓰고 다녔다.414)이이화, 앞의 책, 186∼190쪽 참조.

개항 얼마 후까지도 전래 수공업 단계에 머물러 있던 우리나라 직물업은 일제 직물의 범람으로 국내의 직물 생산이 위축되어 가자 근대화에 눈뜨 게 되었다. 외래 면포의 유입을 막아 국민의 생업을 보호할 필요가 있었으며 여러 산업 부문 중에서도 방직업이 선진 공업국의 발전 과정에서 차지했던 비중이 컸다는 인식 때문에 방직업의 근대화는 다른 부문보다 더욱 절실히 요구되었다. 이러한 시대적 요구로 1919년 조선인 자본에 의한 최초의 근대식 방직 공장인 경성 방직 주식회사가 설립되었다.415)동아일보, 『사진으로 보는 한국 백년』, 가톨릭출판사, 1991, 598쪽. 자급자족의 가내 수공업에서 공장화로 바뀌면서 옥삼이 풍부해졌고, 5일 시장이나 재래 시장에서의 구입도 가능해졌다. 1920년대 초부터는 우리나라에서 기계로 생산된 옷감에 대한 광고가 많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는데 주로 면직물과 모시였다. 이에 맞추어 우리 옷감 사용하기 운동의 일환으로 토산 옷감을 쓰자는 주장이 많이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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옷감 광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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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이 되면 모시로 모자 만들 계획”이라거나 “하의 조선(朝鮮) 소산(所産)으로, 금년 옷감은 여러 가지로 개량된 조선 모시로, 동양목과 해동저(海東紵)에 대해서는 국산 애용”하자는 광고가 있었고, 경성 방직 주식회사에서는 “우리 살림 우리 것으로 순 조선 우량복으로”라는 광고와 함께 삼성·불로초·목탁표·삼심산·천도 등 다양한 생산품을 제시하였다.416)고부자, 『우리 생활 100년·옷』, 현암사, 2001, 20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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