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09권 옷차림과 치장의 변천
  • 제7장 우리 옷을 밀어낸 양장과 양복
  • 3. 모던 보이, 모던 걸
  • 최초로 고무신을 신은 순종
최은수

1919년경에 처음 소개된 고무신이 1930년에는 하루 종일 종로 거리에 서 있어도 짚신 신은 사람을 몇 사람 만나기 어려울 만큼 신지 않은 사람이 없었으니 1년의 소비량이 560만 원에 이르렀다.420)『별건곤』 1930년 1월호. 구두는 신여성의 필수품이었다. 하얀 저고리에 종아리까지 내려오는 검정 치마를 입은 여학생들도 구두를 신었으며 심지어 임산부들도 굽이 있는 신발을 신고 다녔다. 그래 서 고무신을 신고 걸을 때도 구두를 신고 걷듯이 발뒤꿈치를 치켜들고 걸어 항상 구두를 신고 있는 것 같이 하기도 하였다.

1920년대 후반에 구두가 부쩍 유행하였다. 처음 나온 구두는 끈을 좌우로 얼기설기 얽어매는 목이 긴 ‘목구두’라는 것이었고 이것이 없어진 후에는 단화로 바뀌었다. 1930년대에 들어 이화 학생들이 신던 단화에는 앞부리에 꽃무늬를 파고 비단 리본으로 끈을 하였으며 간단하게 매서 구두 앞 등에 리본 귀를 늘어뜨리는 것이 한창 유행하였다. 이 구두는 굽은 있지만 중힐보다 낮은, 걷기 좋은 넓은 것이었다고 한다. 여기자 최은희는 쌀 한 가마에 5원이 채 안 될 때 17원짜리 악어가죽 구두에 5원어치 보석을 박아 신기도 하여 장안의 멋쟁이 기자로 통했지만 당시 구두의 비싼 가격 때문에 신여성이 사치를 한다는 비난의 대상이 되었다.421)김희정, 앞의 책, 22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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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륙 고무신 포스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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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륙 고무가 제조한 고무화의 출매함이 이왕 전하께서 어용하심에 황감함을 비롯하야 각 궁가의 용명하심을 몽하며 우 여관(女官) 각위의 사용을 수하며…….422)『동아일보』 1922년 9월 20일자.

『동아일보』 1922년 9월에 자주 실린 대륙 고무 공업 주식회사의 광고 문구이다. 국왕이 고무화를 신었는지 100% 확신할 수는 없지만, 당시에 고무로 만든 신발이 최신식 고급 상품이었던 만큼 궁궐에서 사용했을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만월표 고무신도 ‘이강(李堈) 전하가 손수 고르셔 신고 계시는’ 신발이라고 광고했으니 말이다. 선뜻 신뢰하기 힘든 광고지만 만월표 고무신이 구체적으로 ‘이강 전하’, 즉 고종의 둘째 왕자요, 순종의 아우였던 의친왕 (義親王)을 꼭 집어 거론한 데는 또 다른 이유가 있었을 듯하다.

강철은 부서질지언정 별표 고무는 찢어지지 아니한다.

고무신이 질기다 함도 별표 고무를 말함이오 고무신의 모양 조키도 별표 고무가 표준이도 고무신의 갑만 키도 고등품인 별표 고무…….423)이규태, 「고무신 공장」, 『조선일보』 1996년 2월 22일자 재인용 ; 김태수, 앞의 책, 33쪽.

콩으로 메주를 쑨다고 해도 못 믿을 게 광고 문구라지만 별표 고무신은 정도가 지나쳐 강철보다 내구성이 강하다고 큰소리를 쳤다. 모자 쓴 남정네를 모델로 삼은 인장표 고무신도 견고하기가 강철보다 낫다고 과장 광고를 하였다. 허황된 광고를 소비자들이 어떻게 받아들였을까 궁금하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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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표 고무 광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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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북선표 고무신은 물결무늬로 바닥을 처리해 미끄럼을 방지했다는 걸 강조하기 위해 이례적으로 바닥을 드러냈다. ‘물결 바닥과 거북선표를 쥬의하시요’라고 한 걸 보면 바다 물결을 헤쳐 가는 거북선에 고무신을 비유하고 싶었던 건 아니었을까. 거북선표 고무신은 일 년 사용 보증, 버선에 묻지 않는 것, 뒤축이 닳지 않는 것, 가벼워 신기 편한 것의 네 가지 특징을 내세워 소비자들을 유혹하였다.

고무신이 하나같이 내구성을 강조한 것은 막강한 경쟁 상대인 짚신을 공략하기 위해서였다. 볏짚으로 만든 짚신은 너무 잘 닳았다. 한 사람이 1년에 70켤레를 신었다는 통계가 있는 걸 보면 내구성이 형편없었다.424)문소정, 『일제하 한국 농민 가족에 관한 연구-1920∼30년대 빈곤층을 중심으로-』, 서울대학교 박사학위논문, 1991년, 161쪽 재인용 ; 김태수, 앞의 책, 34쪽. 게다가 바닥이 울퉁불퉁해서 편하지 않았고 비만 오면 물기가 스며들어 축축한 데다 쇠망치처럼 무거워졌다.

반면, 고무신은 여러 장점을 가지고 있었다. 종이와 마로 만든 미투리와 견주어도 가격 경쟁력이 있었다. 비가 와도 나막신으로 갈아 신을 필요가 없었다. 겉모양도 특수층이나 신던 갖신, 비단신과 비슷한 데다 가볍고 착용감까지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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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무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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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에 처음 들어올 때만 해도 고무신은 구두 형태였으나 이병두 덕분에 현재와 같은 모습으로 바뀌었다. 평양에 있는 일본인 잡화상 ‘내덕(內德) 상점’에서 사환으로 일하던 이병두는 일제 고무 단화가 가죽 단화가 함께 일본의 청년들에게 인기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당시 고무 단화는 ‘호모화’라 하여 바닥창만 고무이고 그 외에는 가죽이나 베로 만든 것이었다.

일본 제조사에 직접 고무신을 주문하여 행상으로 쏠쏠하게 재미를 본 이병두는 내친 김에 고무신 점포를 차렸고 끝내 고무신 공장을 설립하였다. 일본으로 건너가 거래 공장에서 수개월 동안 제조 공정과 고무 배합 기술을 배워온 것이다.

고무 단화가 서민에게는 별로 환영받지 못하자 이병두는 고무신의 형태를 조선인의 기호에 맞게 바꾸었다. 남자 고무신은 짚신을 본뜨고, 여자 고무신은 코신을 본떠 ‘조선식 고무신’으로 탈바꿈시켰다. 결과는 큰 성공이었다.

고무신이 인기를 끌자 고무신 공장도 급증하였다. 반도 고무 공업사, 조선 고무 공업소, 서울 고무 공업소 등 고무신 공장이 우후죽순 격으로 증가하였다. 초콜릿 빛깔을 탈색한 흰 고무신이 나오자 여성들은 뜨거운 반응을 보였다. 정비석이 1937년 『조선일보』에 발표한 단편 소설 『성황당』에 묘사된 흰 고무신은 요즘의 ‘발리’나 ‘페라가모’ 같은 명품 구두 못지않은 귀중품이었다.

순이는 밤새도록 자지 않고 신만 신었다 벗었다 하였다. 신코가 뾰족한 것도 신기스럽거니와 휘어잡으면 한 옴큼 되었다가도 손을 놓으면 팔딱 제 모양대로 돌아지는 것이 퍽은 재미스럽다. 순이는 버선 위에도 신어 보고 맨발에도 신어 보았다. 그는 참말 별안간에 하늘에 올라간 것만치나 기뻤다. 이런 신은 아무리 돈 많은 사람이라도 함부로 신을 것이 못 되어 보였다. 아랫마을에도 흰 고무신 신은 여편네라고는 구장댁 한 사람뿐인 것만 보아도 알 것이라고 순이는 등잔을 끄고 그만 자리라고 자리에 누웠다가도 다시 불을 켜고는 고무신을 어루만져 본다.425)김태수, 앞의 책, 40쪽

고무신 수요가 급증하던 1920년대에 들어서면서 양화점도 속속 늘어났다. 한국 양화계의 간판인 박덕유 양화점을 비롯해 세창, 청년, 원창 등 제법 규모가 큰 양화점들의 광고가 신문을 도배하였다. 한 개의 지면에 서너 개의 양화점 광고가 실리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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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무신 가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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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사람 가운데 최초로 고무신을 신은 사람은 창덕궁에 유배되어 있던 순종이었다. 누가 선물했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으나 순종은 하얀 고무신을 즐겨 신었다.

고무신의 등장으로 신발에 일대 혁명이 일어났다. 남성용은 코 없이 펑퍼짐하고 여성용은 코가 뾰족하고 폭이 좁았다. 모양이 예쁘기도 하거니와 질기고 물이 새지 않아 실용성까지 두루 갖추었다. 또 질이 좀 낮은 재료로 만든 검정 고무신이 등장하여 도시 빈민이나 농민이 애용하였다.

문늬를 넣거나 색깔을 넣은 고무신도 등장하였다. 일제 고무신에 대한 수요가 폭발적으로 증가하여 때때로 품귀 현상이 일기도 하였다. 어린이들은 고무신을 잃어 버릴까 봐 머리맡에 놓고 자거나 길을 걸을 때도 아까워서 들고 다 녔다.

미국 대리 공사를 지낸 이하영(李夏榮)은 자본을 모아 경성과 용산 부근에 대륙 고무 공업사를 설립하고 고무신을 제조, 판매하였다. 처음으로 국산을 생산한 것이다. 이때부터 고무신 제조에 치열한 경쟁이 벌어졌다. 고무신은 누구나 신었으므로 신발만으로는 황제인지 양반인지 상인인지 백정인지 신분을 알 수 없었다. 고무신은 평등한 신발이었다.426)이이화, 앞의 책, 2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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