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09권 옷차림과 치장의 변천
  • 제7장 우리 옷을 밀어낸 양장과 양복
  • 4. 한복과 양복 교복
  • 양장의 선두 주자, 여학생 교복
최은수

1910년대부터 한복 개량 논의가 본격화되었는데 가슴을 꽁꽁 동여매 가슴을 압박하는 한복의 치마허리는 고쳐야 할 점으로 늘 지적되었다. 1914년 이화학당의 교사 월터(Miss Walter)는 오늘날 ‘어깨허리’라고 부르는 모양을 생각해 내고 재봉 시간에 학생들의 치마를 모두 고치게 한 후 체 육 시간에 이를 검사하였다. 학생들이 방학 때 고향에 돌아가서 친구들에게 이 간편한 신식 허리 만드는 법을 알려 줌에 따라 어깨허리는 전국으로 확산되었다.435)유수경, 앞의 책, 151쪽

조선시대 말기의 치마는 보행이 불편할 정도로 길고 저고리는 허리와 가슴을 가리기 힘들 만큼 짧아서 활동하기 불편했으므로 전도 부인, 여학생, 사회 활동을 하는 여성을 중심으로 짧은 통치마와 긴 저고리로 개량된 한복이 유행하였다. 발의 노출을 꺼리는 기존 관습에 비추어 볼 때 발목이 보이는 짧은 통치마의 등장은 획기적인 것이었다. 치마 길이가 점점 짧아지자 신여성과 여학생의 짧은 통치마 차림은 종종 풍자의 대상이 되었다.436)유수경, 앞의 책, 172쪽

1900년대에는 자유로운 한복 차림으로 저고리는 길이가 짧고, 치마는 발목까지 오는 긴 풀치마에 띠허리를 달아 입었다. 옷감은 주로 흰색이나 물들인 목면이었다. 머리는 길게 땋아 늘였고, 나이 든 학생은 트레머리437)1920년대 신여성 사이에 유행한 머리 모양으로, 앞에 옆가르마를 타서 갈라 빗은 다음 뒤통수 한가운데에 넓적하게 틀어 붙이는 머리이다. 넓적하고 클수록 보기 좋다고 하여 속에다 심(다리의 일종)을 넣고 겉에만 머리를 입혀서 크게 틀었다.를 하였다. 겨울에는 갖저고리를 덧입거나 솜두루마기를 입었으며 가마를 타고 쓰개치마나 장옷을 쓰고 다녔다.

숙명여학교 학생만이 1907년에 자주색 원피스를 입어 선구적인 양장 차림을 하였으나 1910년에 한복 저고리와 자주색 치마를 다시 입었다. 이 무렵에 여러 학교에서 흰 저고리에 검정 짧은 통치마를 입게 하고 쓰개치마와 장옷을 벗게 하였다. 장옷이나 쓰개치마의 사용을 금지하자 등교하는 학생 수가 줄어들어, 몇 학교에서는 검정 양산을 쓰개치마 대신 쓰고 다니게 하였으며, 어떤 학교에서는 흰 수건을 쓰고 다니게 하기도 하였다. 겨울에는 검정 두루마기를 입고 목도리를 둘렀다.

여학생 교복도 개정되어 이 무렵 거의 양장으로 통일되었다. 1931년 둥근 깃을 단 백색 블라우스에 감색 점퍼스커트와 백색 스타킹에 자주색 리본을 단 백색 밀짚모자를 쓰는 하복이 등장하였다. 동복으로는 감색 세일러복에 리본을 단 감색 캐플린을 썼으며, 감색 주름치마를 입었다. 양장으로 통일은 되었으나 학교마다 색깔과 모양이 조금씩 달라 교복만 보고도 어 느 학교 학생인지를 알 수 있었다.438)이이화, 앞의 책, 186쪽.

1930년대에는 점차적으로 양장 교복을 입었으며 흰색 블라우스에 남색 주름치마를 많이 입었다. 겨울에는 남색 또는 자주색 세일러복을 입었고 스웨터를 짜 입기도 하였다. 1940년대에는 양장 교복을 입도록 권하였고, 제2차 세계 대전이 심해지자 여학생도 전투복 차림으로 슬랙스나 몸뻬를 권장하여 여름에는 블라우스에 몸뻬, 겨울철에는 재킷과 몸뻬를 입었다. 그러나 주체성이 강한 학교의 학생들은 양장 교복을 입지 않고 몸뻬 입기도 거부하며, 오히려 무궁화색 저고리를 입어 무궁화를 상징하였다고 한다.

학생들의 교복이 1930년대에 양장으로 변화하면서 일반 부녀자들도 양장을 많이 입게 되었고, 양장을 하는 사람 수가 크게 증가하여 우리나라 여성의 복식이 양장화되는 계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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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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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0년대 일제는 전시 체제(戰時體制)를 표방하면서 여성들에게 일본여성의 노동복인 ‘몸뻬’를 입도록 강요하였다. 처음에는 입기를 권장하다가 차츰 생활복으로 국민복화를 강요하는가 하면, 전시형 부인복으로 방공 연습에 필요하고, 새것보다도 낡은 것으로 만들도록 하는 등 전시 체제의 긴박함을 나타냈다. 그들은 우리나라 여성들의 반발이 심하자 몸뻬를 입지 않고서는 관공서나 공공 집회장의 출입을 금지시키고 전차와 버스의 승차도 금지했으며, 쌀 배급·노력 동원·징용 등을 통해 보복하는 등 강력한 정책을 통해 몸뻬 착용을 확산시켰다. 여학생들에게도 몸뻬를 강요하고 교복도 모두 전쟁 수행의 노력 동원에 적합한 것으로 개정하게 했는데 몸뻬 착용을 끝내 반대했던 숙명여학교는 교복으로 몸뻬 대신 바지를 착용하면서 몸뻬의 착용을 피하고, 눈속임으로 치맛자락을 두 가랑이 사이에 끼워서 모 양이 비슷하게 하여 모면하기도 하였다.439)최경자, 『최경자와 함께한 패션 70년』, 국제 패션 디자인 연구원, 1999, 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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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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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 무주에서는 강제로 동원시켜 신사 참배와 훈련도 시켰는데, 참석하지 않으면 벌칙을 내리기도 하였다. 훈련받으러 갈 때 상의로는 조끼 적삼이나 블라우스를 입고 신발은 게다나 고무신을 신었으며, 하의로는 검정 몸뻬를 입었다. 훈련에 동원되었던 사람들의 경험담에 의하면 “시숙이나 시아버지 앞에서 가랑이가 좁은 몸뻬를 입고 손을 번쩍번쩍 쳐들고 호령을 지르면서 훈련을 받았는데 민망스러워서 혼났다. 시아버지는 ‘젊은 년들 갈구쟁이 쳐들고 운동장 돌아다닌다.’고 매우 역정을 내셨다.”고 한다. 우리나라에서 여성이 가랑이나 엉덩이를 드러내 보이는 일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몸뻬는 전통 사회의 가치관을 무시하고 단순히 실용과 경제성만을 위주로 하였기 때문에 많은 물의를 일으켰다.440)고부자, 앞의 책, 109∼11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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