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례를 올린 지 60년이 되는 것을 회혼(回婚), 회근(回巹)이라 하는데, 예로부터 큰 잔치를 베풀어 축하하였다. 이것을 회혼례(回婚禮) 또는 회근례(回巹禮)라 하고, 그때 차리는 잔치를 동뢰수연(同牢壽宴)이라 한다. 1686년 송시열(宋時烈, 1607∼1689)이 권상하(權尙夏)에게 보낸 편지에서 “회혼례라는 말은 근래 사대부의 집안에서 나온 것이다.”라고 한 것으로 보아 17세기를 전후해서 양반가에서 먼저 행해졌을 것으로 보인다. 구체적으로는 1688년(숙종 14)에 양반가에서 회혼례를 올린 기록이 있으며,169)『숙종실록』 권35, 숙종 27년 10월 기묘. “죄인 박명겸이 공초하기를, ‘무인년에 외조부모의 회혼례를 치르고서 또 상경했었는데, 집의 어미가 병이 지극히 위중하였다는 말을 듣고 즉시 창황하게 내려갔었습니다.’고 하였다.” 이후 18세기에 이르러 점차 널리 퍼졌을 것으로 보인다.170)송시열(宋時烈), 『송자대전(宋子大全)』 권88, 서(書), 「권치도(權致道)에게 답함」(병인년(1686) 11월 28일). 회혼은 조혼(早婚)과 장수(長壽)라는 두 가지 조건을 모두 갖추어야만 성립할 수 있는 행사인데, 18세기에 이르러서야 사람들의 수명이 늘어나면서 비로소 회혼례가 널리 퍼질 수 있었던 것이다.171)18세기 노인 인구가 증가했다는 것은 이 시기 간행된 의서에 ‘노인’ 항목이 독립되어 서술되고, 노인의 영양과 관련한 죽의 개발과 보급이 중요하게 취급된 것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김호, 「이규경의 의학론과 신체관」, 『19세기 조선, 생활과 사유의 변화를 엿보다』, 돌베개, 2005, 48쪽). 그러다가 19세기에 와서는 양반뿐 아니라 일반 민에게도 회혼례가 중요한 가정 의례로 여겨졌다.172)19세기에 출간된 우덕린(禹德麟)의 『이례연집(二禮演輯)』에서 회갑례와 회혼례를 관혼상제례와 함께 처음으로 그 의식 절차를 다루기 시작한 것에서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송시열과 같은 사람은 여자의 일생 중에서 한 번이어야 할 혼례를 두 번 치른다는 것 때문에 회혼례 자체를 매우 못마땅하게 생각하고, 퍼져서는 안 될 습관이라 여겼다. 그러나 자식 된 도리로 꼭 해야 한다면 주인공이나 자식들이 상중(喪中)이 아니어야 하며 잔치는 혼인잔치가 아니라 생일잔치처럼 차리라고 권유하였다.173)송시열, 『송자대전』 권88, 서, 「권치도에게 답함」(병인년(1686) 11월 28일).
이날 남자는 사모관대를 입어 신랑같이 꾸미고, 여자는 원삼족두리를 입고 연지곤지를 찍어 신부처럼 차리고 옛날에 지냈던 혼인 예식을 되풀이한다. 주인공들의 복장이 신랑·신부복인 만큼 의식이나 음식도 혼례 때와 거의 같다. 다만 자손들이 장수를 비는 뜻으로 술잔을 올리고(獻壽), 권주가나 음식이 따른다는 점이 다를 뿐이다. 이때 차리는 음식은 더 할 나위 없이 풍성하였다. 1897년(광무 1) 11월 3일에 벌어진 이태용(李泰用)의 회혼일 음식을 통해 그 모습을 알 수 있다.
이태용의 동뢰수연은 “잔치 소문이 굉장하여 인근 읍리(邑里)에서 사람들이 모여드니, 업은 아이들과 젊은 계집, 늙은 사람이 마루 귀틀이 부러질 정도로 모여들어 상을 수백 상씩 차려내고도 모자랐고 잔치는 열흘 동안이나 계속”되었다.174)이진용(1837∼1909)이 맏형 태용의 회혼일을 맞아 송축 가사를 지은 것이 『농운유고(農雲遺稿)』에 실려 있다(『농운유고』 권4, 「근경가(巹慶歌)」, 국립 중앙 도서관 소장 古3648-62-205). 동생인 이진용(李晋用)이 지은 송축 가사(頌祝歌詞)에는 잔치 음식 준비부터 부조 들어온 물건, 큰상에 올린 음식까지 꼼꼼하게 기록되어 있다.
우선 녹쌀 넉 섬으로 국수꺼리를 마련하고, 찹쌀 다섯 섬으로 약주를 만들고 탁박이를 담아 잔치 준비를 하였다. 녹쌀은 녹두나 메밀을 맷돌에 갈아 쌀알처럼 만든 것인데 국수를 만들기 위해서 메밀을 갈아 반죽하여 국수 가락을 뽑아낸 것이다. 11월 3일이 잔칫날이었으므로 더운 국물을 부어 뜨거운 국수장국을 만들어 손님들에게 대접했을 것이다. 술은 두 종류를 장만하였는데 찹쌀로 빚은 약주와 탁박이다. 약주는 보통 청주(淸酒)라 부르는 맑은 술이며, 탁박이는 탁주(濁酒)라고 하는데, 현재의 막걸리를 말한다. 또 잔치 부조로는 남들에게서 양지머리나 갈비 외에도 계란도 수천 개를, 닭도 이십여 마리를 받았다. 그 밖에 국수나 떡은 끊임없이 들어왔고, 산 돼지나 기러기를 받기도 하였다. 친척들도 부조를 하였는데 둘째 형님댁은 약밥을, 셋째 형님댁에서는 조악을 보냈고, 이진용의 집에서는 갖은 편과를 마련하였다. 또한 조카나 그 밖의 친척들이 여러 가지를 부조하였 는데 연육이나 떡볶이, 느르미, 국수 고명과 같은 음식도 있었고 왜접시를 잔치에 쓰라고 빌려 준 경우도 있었다.
아침밥을 먹은 후에 일가친척이 모두 모여 상을 차렸다. 글에는 독좌상(초례상)을 차렸다고 하는데 올라간 음식을 보면 큰상차림이다.
아침밥 조식 후에 / 일문이 단취하여
독자상을 차려노니 / 용안 여지 당대초며
귤병 사탕 오화당과 / 각색 당속 다 고이니
옥춘당도 볼만하다 / 유자 셩유 왜감자며
조율이시 벼려놓고 / 호도 은행 실백자는
이편자편 놓았더라 / 유밀과는 몇 가진고
약병 다식 빈사과며 / 매화산자 강졍이라
맛읍는 타래과며 / / 보기조은 요화로다
자두치식 고여내니 / 고인솜씨 능란하다 ……
난간문어 국화새김 / 봉전복이 천연하다
건정 수정 약밥 등속 / 웃지이로 기록하라
양편의 봉황계는 / / 밤대추를 물어놓고 ……
접시접시 수팔련은 / 이삼월 꽃밭이라
올라간 음식을 종류별로 나누어 보면 과자로는 약과(약병)·빈사과·다식·매화산자·강정·타래과·요화가, 과실로는 유자·석류(셩유)·귤(왜감자)·조율이시(대추, 밤, 배, 곶감)·호도·은행·잣이, 정과(正果)로는 건정·수정·약밥이, 당속(糖屬)으로는 귤병·사탕·오화당·옥춘당이, 생실과(生實果)로는 용안·여지·당대추(당대초)가, 어물새김으로는 난간문어·국화새김·봉전복이 있다.
이것들은 높이 쌓여 큰상에 올려졌을 것이다. 그런데 이진용은 큰상에 오른 음식을 기록하면서 귀하고 값진 것부터 차례대로 나열하고 있다. 맨 처음 나오는 용안(龍眼)과 여지(荔枝), 당대추는 모두 중국에서 가져온 귀한 열대성 과일이다. 그 가운데 여지는 리치(Litchi)라고 부르는 과일로, 지금이야 중국 음식점에서 후식으로 흔하게 나오는 것이지만 당시에는 매우 구하기 힘든 귀한 과일이었다. 귤병, 사탕, 오화당, 옥춘당은 당속, 즉 설탕을 졸여 만든 음식에 속하는데, 귤을 졸인 귤병(橘餠)과 다섯 가지 빛깔이 나는 사탕인 오화당(五花糖), 쌀가루에 여러 빛깔로 물을 들여 만든 옥춘당(玉春糖)도 만들기 힘든 것이었다. 다음에 나오는 유자와 석류, 귤은 우리나라에서 나기는 하지만 남쪽에서 나는 과일로 11월 한겨울에는 구하기 어려운 과일이다. 그에 비해 바로 다음에 서술한 조율이시(棗栗梨柹)는 비교적 구하기 쉬운 과실들이며, 호도, 은행, 잣은 견과류로 보존성이 좋기 때문에 한겨울에 배나 대추보다도 더 구하기 쉬운 것들이다. 약과, 다식, 강정은 설명이 필요 없을 정도로 대표적인 과자 종류이다. 빈사과(氷沙菓)는 강정의 부스러기를 흰 엿에 버무려 굳힌 것이며, 매화산자(梅花饊子)는 찹쌀가루로 반죽하여 기름에 지져 꿀을 묻힌 과자이다. 타래과는 흔히 매잡과(梅雜菓)라 하는데 밀가루를 반죽하여 한번 꼬아 튀겨낸 것이며, 요화는 여뀌꽃 모양으로 만든 과자이다. 둘 다 맛은 별로 없으나 모양이 아름다워 상에 올린 듯하다.
이러한 음식들을 1자 2치 높이로 고여 큰상을 만들었다. 음식을 다 고이고 난 후 제일 위에는 문어나 마른 전복으로 어물새김을 올렸다. 문어는 칼로 오려 꽃 모양도 만들고 난간 모양도 만들어 접시의 꼭대기에 올려놓고, 마른 전복으로 봉황을 새겨 접시 위에 장식으로 올린다. 또 접시마다 수파련(水波蓮)이라는 종이꽃을 꽂아 화려하게 장식하였다. 큰상에는 이처럼 차린 것 이외에도 부조로 들어온 연육이나 느르미, 각색 편과, 조악 등이 더 올랐을 것이다. 또 곁에 차린 입맷상에는 탕이나 국수를 비롯한 여러 가지 찬물을 올려 주인공이 먹기 쉽도록 하였다.
회혼례는 자손, 일가친척, 친지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행해진다. 그런데 이러한 잔치를 벌일 수 있는 사람은 드물다. 배우자가 먼저 죽거나, 자손이나 직계 후손 중에 한 사람이라도 먼저 죽은 사람이 있으면 회혼례를 하지 못한다. 그래서 드물고, 드문 만큼 더 귀한 행사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