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10권 자연과 정성의 산물, 우리 음식
  • 제3장 특별한 날, 특별한 음식
  • 5. 남의 제사에 감 놓아라, 배 놓아라
  • 제사 음식의 진설
윤성재

조선시대 제수의 진설 규범을 제시하고 있는 문헌은 이이의 『격몽요결(擊蒙要訣)』 「제의초(祭儀抄)」(1577), 김장생의 『가례집람(家禮輯覽)』(1599, 1685 간행), 이재의 『사례편람(四禮便覽)』(18세기, 1884 간행) 등이 대표적이다. 그렇지만 제사의 음식이나 진설법에는 지방과 가풍(家風)에 따라서 차이가 있는데, 이를 가가례(家家禮)라 한다. 이처럼 집집마다 진설법이 다른 이유는 유교 사회인 조선시대 제사의 지침이라고 할 수 있는 『주자가례』가 기본적으로 중국 문화와 생활 관습을 토대로 한 것이어서 우리 관습에 그대로 적용하기 어려웠다는데 큰 원인이 있다. 이후 우리 실정을 반영한 여러 가지 예서가 등장하였으나, 예법 자체의 해석이 불확실하거나 완전하지 못하여서 조선시대에도 다양한 학설이 있을 수밖에 없었다.

진설의 예를 들면 「제의초」에 고위(考位)·비위(妣位)는 따로 차리며 잔반을 하나만 쓰고, 반과 갱은 생시와 반대로 차리면서 시접은 생시와 같이 오른쪽에 놓고, 특별히 탕을 제시했으며, 과실이 홀수, 서포동해(西脯東醯)가 완벽하지 못하며, 전체를 다섯 열로 차렸다. 『가례집람』은 고·비위는 따로 차리며 시접은 중앙에 있다. 반서갱동(飯西羹東)하는 것과 잔반은 하나씩 두는 것, 과실이 짝수, 서포동해하는 것은 「제의초」와 같으나 탕이 없으며 전체를 4열로 차렸다. 『사례편람』에서는 고·비위를 각설하는지 합설하는지는 말하지 않고, 잔반은 하나씩 제시했으며, 시접은 중앙에 있다. 반서갱동, 서포동해는 분명히 하면서 젓갈(醢)과 감주(醯)를 함께 차리게 했으며 탕(湯)이 없고, 과실은 짝수, 전체를 네 열로 차렸다.193)윤덕인, 「전통 제사상의 진설 규범과 관행 비교 연구」, 『비교 민속학』 28, 2005, 335쪽. 이러한 상황을 통해 당시를 대표하는 예서들조차 제사상 진설에 대한 기준을 마련하기 어려웠던 사정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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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례편람』
『사례편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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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일반 서민들은 경제적 여건이나 문화적 능력에서 유교식 예법을 다 배우고 행할 수 없었다. 이러한 상황은 제사의 음식이나 진설에 공통된 규범은 있었지만, 그와 함께 가가례를 인정할 수밖에 없도록 하였다. 그리하여 제사 음식이나 진설은 각 지방의 전통적인 습속과 형편에 따라 변형된 채 행해졌고 각양각색의 형태를 지니게 되었다.194)윤덕인, 앞의 글, 360쪽.

조선 후기 이병상(李秉常, 1698∼1761)은 제상에 올리는 떡으로 가래떡 (權枚)을 썼다. 원래 사대부 집안의 제사에서는 고명을 얹은 시루떡을 쓰는 것이 상례였기 때문에 주위 사람이 궁금하여 묻자, 집에 있고 없는 것에 맞추어 상을 차렸을 뿐이라고 대답한 것도 이와 같은 맥락이다.195)이규상(李圭象), 『병세재언록(幷世才彦錄)』 ; 민족 문화사 연구소 한문학 분과 옮김, 『18세기 조선 인물지』, 창작과 비평사, 1997, 59∼60쪽. 그러므로 제사 음식은 각 지방이나 가문에 따라 다소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다. 다만 모든 선인들은 한결같이 제사 준비에 정성이 담겨 있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제사 음식은 각 가정의 형편과 분수에 맞추어 마련하되, 제사 준비의 으뜸 덕목으로는 정성을 무엇보다도 중요하게 여긴 것이다.196)그러나 이러한 유교적인 규범의 생활화도 실상은 상류 사회의 표층에서만 그러하였을 뿐이고 서민 생활의 기저에는 고유의 전래 습속이 성행하여 왔다. 왕실에서도 전래해 오던 세속에 따랐음을 기록에서 볼 수 있다(윤덕인, 앞의 글, 331쪽). 그래서 이덕무는 지금 세상 부인들이 제사 음식을 풍부하게 갖추지 못하는 것을 큰 수치로 여겨 집안 재정이 부족하면 반드시 빚을 얻어서 제수를 장만한다고 하면서, 제사란 재계를 힘쓰고 정성을 다하면 될 뿐이라고 주장하였다. 이를 위해 그는 제사 음식을 장만할 때에는 시끄럽게 웃거나 말을 많이 하지도 말고, 아이를 때리거나 여비(女婢)를 나무라지도 말라고 하였다. 또한 제사는 깨끗한 재계를 힘쓰고 슬픈 정성을 다한다면 한 그릇의 쌀밥과 한 그릇의 나물국으로도 족히 귀신을 흠향할 수 있다고 하면서 제사에서 정성이 가장 중요하다고 강조하였다.197)이덕무(李德懋), 『청장관전서(靑莊館全書)』 권30, 사소절(士小節)7, 부의(婦儀)2, 제사(祭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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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상(祭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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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의(交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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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지만 제상에 올리는 음식을 진설하는 데는 일정한 격식이 있다. 일반적으로 신위(神位) 앞에 시접과 잔반을 놓고 밥(메), 국(탕) 등을 놓는다. 다음으로 둘째 줄에는 적과 전을 놓는다. 셋째 줄은 나물, 맨 끝줄에는 과실과 조과(造菓)를 진설한다. 이처럼 전통 규범에 따른 제사상의 구체적 상차림은 다음과 같다.198)이 진설은 『사례편람』을 따른 것이다(윤덕인, 앞의 글).

첫째 줄에는 반(飯), 갱(羹), 시접(匙蝶), 잔반, 초첩(醋牒)을 놓는다. 반은 제삿밥이며, 신위 수대로 주발에 담는다. 갱은 고기와 채소를 섞어 끓인 국으로 신위 숫자대로 대접에 담는다. 대갱은 고깃국, 채갱은 채소로만 끓인 국이다. 탕에 어육을 쓰면 갱에는 나물을, 어육을 쓰지 않을 때는 갱에 고기를 쓴다. 시접은 숟가락과 젓가락을 담아 놓는 대접이다. 뚜껑을 덮기도 하지만 일반적으로 뚜껑이 없다. 신위 수대로 제사 시저(匙箸, 숟가락과 젓가락)를 시접에 담는다. 잔반은 잔 받침에 받친 술잔으로 신위 수대로 준비하고 강신 잔반을 하나 더 준비한다. 초첩은 식초로 종지에 담는다. 간장을 놓으면 초첩은 놓지 않아도 좋다고 하지만 조선시대 제사상에는 간납(전)이 반드시 놓이므로 초간장을 놓았다.

둘째 줄에는 면(麵), 병(餠), 어(魚), 육(肉), 적(炙)을 놓고, 여기에 편청과 적염을 올린다. 면은 국수를 삶아 건더기만 그릇에 담고 그 위에 달걀노른자로 지단을 만들어 얹는다. 제사떡으로는 녹두편, 거피팥편, 흑임자편 등을 편틀에 포개어 괴고 주악, 단자 등의 웃기를 얹는다. 그릇 수는 신위 수대로 하기도 하고, 한 그릇만 올리기도 한다. 떡을 쓰지 않을 때는 면도 안 쓴다. 떡을 신위 수대로 올릴 때는 국수도 신위 수대로 올린다. 병은 떡으로 미식(米食)이라고 한다. 편청은 떡을 찍어 먹을 꿀이나 조청, 설탕을 담는 그릇이다. 그릇 수는 떡 그릇 수와 같다. 어육은 가축이나 산짐승, 생선류 가운데 어떤 것이나 쓸 수 있다고 하였으나, 조선시대 생선, 고기류의 간납(전), 어적, 육적으로 규격화된 것 같다. 생선은 통째로 양념하여 살짝 굽는다. 적은 간 한 꼬치, 고기 두 꼬치를 쓰는데 초헌에는 간, 아헌과 종헌에는 고기꼬치를 올린다. 적은 구이로 제수 중 특별한 음식이다. 육적, 어적, 계적의 세 적을 쓰는데 술을 올릴 때마다 적을 바꿔 올리기 때문이다. 적염은 적을 찍어 먹는 소금으로 접시나 종지에 한 그릇을 준비한다. 전은 기름에 튀기거나 부친 것으로 기제사에서는 전이라 하고, 큰 제례에서는 간납이라 하여 수육, 육회, 어회 등과 함께 모두 접시에 담는다. 원래 예서에는 기름에 지진 것은 제상에 올리지 못하게 되어 있으나 우리나라에서는 기름 냄새를 맡고 귀신이 내려온다고 할 정도로 지지는 음식이 제사 음식의 으뜸을 차지하였다.

셋째 줄에는 포(脯), 식혜, 해(醢), 소(蔬), 장(醬), 침채(沈菜)를 놓는다. 육포, 생선 말린 것, 문어나 마른 오징어 등을 사각의 접시에 한 그릇만 담는다. 문어 다리나 오징어를 가위나 칼로 오려서 장식하기도 한다. 식혜는 건더기를 접시에 담고 잣이나 대추 저민 것을 얹는다. 식혜는 주로 차례상에 올리는데, 식해 대신에 쓴다. 해는 생선 젓갈로, 대개 소금에 절인 조기를 쓴다. 채소는 고사리, 도라지나 무, 배추나물 등 삼색 나물을 곁들여 한 접시에 담는다. 장은 청장(淸醬)을 종지에 담는다. 침채는 희게 담근 나박김치로 보시기에 담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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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실(龕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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넷째 줄에는 과실, 다식이나 유밀과 등을 놓는다. 과일은 나무 열매로 먹을 만한 것이면 다 쓰며, 2∼6품으로 한다. 공자는 복숭아를 하품(下品)이라 하여 쓰지 않는다고 소개하는데, 우리나라에서는 복숭아가 귀신을 쫓는다 하여 제사 음식으로 쓰지 않는다. 생률은 겉껍질을 벗긴 날 밤의 모서리를 쳐낸 것이다. 실제로는 생실과뿐만 아니라 밤, 대추, 곶감이 필수적이었고 다식이나 유밀과 중 한두 가지를 썼다.

현재는 셋째 줄에 탕을 진설하여 모두 다섯 줄로 놓는 것이 일반적이다. 왼쪽에서부터 육탕(肉湯)·소탕(素湯)·어탕(魚湯)의 순서로 놓는다. 그렇지만 조선시대에는 「제의초」 이외에는 제상에 탕을 진설하는 관행이 없었다. 여러 예서를 종합하여 현재 행해지는 진설의 관행은 다음과 같다.199)이춘자, 『통과 의례와 음식』, 대원사, 1997, 119쪽.

① 내외분이라도 남자 조상과 여자 조상은 상을 따로 차린다(考妣各設).

② 시접은 신위 앞 중앙에 놓는다(匙楪居中).

③ 술잔은 서쪽에 놓고 초첩은 동쪽에 놓는다(盞西醋東).

④ 메는 서쪽이고 갱은 동쪽이다(飯西羹東).

⑤ 적은 중앙에 놓는다(炙楪居中).

⑥ 생선은 동쪽이고 고기는 서쪽에 놓는다(魚東肉西).

⑦ 국수는 서쪽이고 떡은 동쪽에 놓는다(麪西餠東).

⑧ 포는 서쪽에 해·혜는 동쪽에 놓는다(西脯東醯).

⑨ 익힌 나물은 서쪽이고 생김치는 동쪽에 놓는다(熟西生東).

⑩ 하늘에서 나는 것은 홀수이고, 땅에서 나는 것은 짝수이다. (天産陽數地産陰數).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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