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10권 자연과 정성의 산물, 우리 음식
  • 제4장 명절 음식 , 그 넉넉함의 향연
  • 2. 천오백 년을 이어온 대보름 약밥
  • 쫄깃쫄깃 맛있는 약밥과 묵은 나물
이정기

정월 대보름에 떠오르는 둥근 달은 풍요로움의 상징으로 금쟁반(金盤)에 비유하기도 하며, 동시에 한 해 농사의 풍요를 기원하는 대상물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대보름날 음식상에는 갖가지 풍요로운 음식이 올라야 하겠지만, 실제로는 기나긴 겨울을 지내고 변변한 수확도 없는 시기이기 때문에 풍요로운 음식을 기대하기란 어렵다. 이런 의미에서 오곡밥과 묵은 나물은 ‘황후의 밥, 걸인의 찬’에 비유할 만하다. 다른 작물에 비해 비교적 저장성이 높은 곡물을 이용한 오곡밥과 지난해 말려 두었던 여러 야채로 무쳐 놓은 나물은 풍요로움보다는 오히려 작년에 수확하였던 음식을 소비한다는 의미가 크다. 소멸은 곧 새로운 생장을 의미한다는 세시풍속의 순환론에서 봤을 때, 농사의 시작인 대보름에 오곡밥과 묵은 나물을 먹는 데에는 새로운 해를 맞이한다는 의미가 깃들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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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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찰밥(糯飯)에 대한 기록은 ‘점반(粘飯)’, ‘나미(糯米)’와 같이 찹쌀로 지은 밥을 의미하기도 하고, ‘약반(藥飯)’, ‘향반(香飯)’과 같이 우리가 흔히 약식(藥食)이라고 부르는 음식을 의미하기도 한다. 1500년 전 대보름에 먹었다던 찰밥은 음식의 종류는 조금 다르지만 약밥이나 현재의 오곡밥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인다. 조선시대의 기록에는 대부분 ‘약밥(藥飯)’이라는 표현이 자주 쓰이며, 간혹 찰밥의 용례가 보이지만 명확한 구분 없이 동일한 의미로 사용하고 있다. 약밥이라고 이름 지은 것도 우리나라에서는 꿀을 약이라고 생각하였기 때문으로 보인다. 약밥 이외에 약과(藥果)나 약주(藥酒)에도 ‘약(藥)’ 자가 들어가는데, 이는 음식 중에 별미이고 귀중한 음식을 가리킬 때 사용한다. 약밥은 꿀을 넣었다고 하여 꿀밥, 밀반(蜜飯), 밀이(蜜餌), 종밀(粽蜜)이라고도 한다.

약밥은 찹쌀에 진간장으로 색을 내고 대추, 밤, 잣 따위를 꿀과 함께 넣어 시루에 쪄내 참기름을 발라 달콤하고 고소한 맛을 낸다. 이하곤(李夏坤, 1677∼1724)의 『두타초(頭陀草)』 권4에 “꿀같이 단 곶감, 주먹만 한 밤, 겨울이 지나 빛깔이 더욱 선명해진 붉은 대추로 약밥을 쪄 까마귀에게 먹이는 풍습은 지금까지 전한다.”라고 하여 약밥에 들어가는 재료를 설명하고 있다. 『조선 무쌍 신식 요리 제법(朝鮮無雙新式料理製法)』과 『요리 제법(料理製法)』에 약식(약밥) 만드는 법이 전한다. 좋은 찹쌀을 물에 담가 놓는데 오래 담가 두면 밥이 질게 되므로 한나절 정도만으로 충분하다. 좋은 대추, 밤, 실백을 찹쌀과 함께 시루에 넣고 진간장을 섞어 쪄 내는데, 오랫동안 쪄야 빛이 검어진다. 진간장은 약밥의 빛을 내기 위해 넣는 것이기 때문에 빛이 검고 맛이 좋은 간장을 사용하여야 한다.

이렇게 만드는 약밥은 조선 후기까지만 해도 부잣집 자녀들이나 맛 볼 수 있는 귀한 음식이었다. 조선시대 문집을 보면 맛이 매우 좋아 정월 대보름에 귀밝이술과 함께 친한 친구에게 선물로 보내었다고 한다. 약밥은 중국에도 없는 우리의 고유한 음식으로 중국인들이 이를 ‘고려반(高麗飯)’이라고 하였다. 『열양세시기』에 역관들의 입을 통해 우리나라 사신이 연경(북경)에 갔을 때 정월 보름이 되어 옹인(饔人)에게 약밥을 만들라 명하고 이를 연경의 귀인들에게 맛보이니 그 여러 가지 맛을 매우 좋아하였다고 전한다.

『동국세시기』에도 약밥에 들어가는 대추, 밤, 잣 등은 서민들이 구하기 어렵기 때문에 대신 오곡밥을 지어 먹었다고 할 정도였다. 요즘 우리가 정월 대보름에 먹는 오곡밥은 조선 후기의 모습인 듯하다. 오곡밥은 말 그대로 다섯 가지 곡식으로 지은 밥인데, 흔히 찹쌀, 수수, 팥, 조, 콩 같은 것이 들어간다. 대추, 밤, 잣 같은 특수 작물에 비해 구하기 쉬운 농작물임에 틀림없는 것 같다. 이렇게 많은 곡식을 넣어 밥을 지어 먹는 것은 그해의 모든 곡식에 풍년이 들기를 바라는 뜻이 담겨 있다. 이렇듯 약밥은 신라시대 찰 밥에서 유래하였으며, 현재 대보름에 먹는 오곡밥의 이전 모습인 듯도 하다. 찰밥, 약밥, 오곡밥을 시간의 흐름에 따라 명확히 구분할 수는 없으나 이들의 출현 시기는 짐작할 수 있겠다.

찰밥이나 오곡밥과 함께 먹는 묵은 나물은 지난해에 말려 두었던 박나물, 버섯, 대두황권, 순무, 무, 외꼭지, 가지고지, 시래기, 호박고지 같은 것을 삶아 먹는 풍습인데, 한자어로는 진채(陳菜)라고 한다. 대보름에 묵은 나물을 먹으면 여름에 더위를 이긴다는 속신이 있다. 이는 겨우내 부족했던 채소의 섭취를 도와주는 실질적인 효과가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묵은 나물과 여름 더위가 어떠한 상관관계가 있는지는 알 수 없다. 혹시 수분을 모두 빼앗기고 햇볕에 빠짝 말린 나물을 미리 먹어 두면 여름의 땡볕 더위에 쉽게 적응할 수 있다는 믿음이 있었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대보름에 찬물을 마시면 여름 내내 더위를 먹는다는 속신이 있는데,208)국립 민속 박물관, 『한국의 세시풍속』 Ⅰ·Ⅱ, 1997 ·1998. 이와 비슷한 경우라고 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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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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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은 나물
묵은 나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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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보름에 오곡밥과 함께 먹는 나물은 몇 종류나 될까? 이와 관련된 기록은 없지만 현대 민속 조사 자료에 의하면, 대개 아홉 가지의 나물을 무쳐 먹는다고 한다. 이는 대보름에 모든 행위를 아홉 번씩 하는 풍속에서 비롯된 것 같다. 곧 조수삼(趙秀三, 1762∼1849)은 칠언 절구시인 「상원죽지사(上元竹枝詞)」 ‘구식(九食)’에서 “여자는 아홉 번 밥 짓고, 남자는 아홉 번 나무하네” 하고 읊고 있다. 지금까지도 각 지방에서는 밥을 아홉 번 먹고 나무를 아홉 짐 하면 그해에 좋은 일이 있다고 믿는다. 아홉(九)이라는 수는 1에서 9까지의 수 중 가장 큰 수이자 가장 많은 수를 뜻하는데, 대보름에 모든 일을 아홉 번하므로 풍년을 기원하는 의미를 담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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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곡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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