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10권 자연과 정성의 산물, 우리 음식
  • 제5장 천년을 함께한 차
  • 2. 일상 속에 들어온 차
  • 국가 의례와 진다 의식
김지원

고려시대에는 찬란했던 불교 문화와 함께 차 문화도 꽃을 피웠다. 중국 차 문화의 절정기로 볼 수 있는 송(宋)나라와 비슷한 시기로 고려시대는 중국에서 전래된 차 문화를 따르면서도 독창적으로 발전시켜 나갔다. 고려 왕실에서 차 문화는 매우 중요하고도 화려하였다. 중요한 행사를 할 때 차를 올리는 진다 의식(進茶儀式)은 빼놓지 않고 행하였다. 진다 의식이란 국가적인 행사의 연회에 앞서 임금께 차를 올리는 의식을 말한다.

『고려사』는 유교의 오례(五禮) 체계인 길(吉)·흉(凶)·군(軍)·빈(賓)·가(嘉)의 항목으로 예지(禮志)를 구성하여 의례 절차를 수록하고 있다. 예지에 나오는 여러 종류의 차와 관련된 의례를 살펴보면 고려시대의 조정과 왕실의 차 문화에 대해 잘 알 수 있다. 오례 중에서 진다 의식과 관련된 의례는 주로 가례와 빈례였다.

가례(嘉禮)는 왕실의 혼례, 왕자·공주의 탄생, 왕실 책봉례 등과 같이 통과의례적인 성격이 강하다. 의례를 통해 왕실의 존엄성을 보이고, 연회를 통해 왕실과 신하들 사이의 화목을 추구하는 의미가 있다. 가례 중에서 상원 연등회(上元燃燈會), 팔관회(八關會), 설날 아침 임금께 하례를 드리는 원회의(元會儀), 왕비·왕태자 등의 책봉, 원자의 탄생, 공주의 결혼, 대관전(大觀殿)에서 백관을 위한 연회 등에 진다 의식을 행하였다. 왕과 신하가 함께 차를 마시면서 새해를 여는 아침을 시작하고, 원자의 탄생이나 왕태자 책봉과 같은 나라의 경사에도 차를 마셨다는 것은 고려 왕실에서 차가 얼마나 중요하고 큰 의미인지를 알게 해준다. 좋은 일을 맞이할 때면 더욱 마음을 경건하게 해야 한다. 신하는 왕에게 차를 올리고, 왕은 신하에게 차를 내 리고, 차를 나누어 마시면서 서로 마음을 나누고, 또한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힐 수 있었다.

가례 중 많이 알려진 상원 연등회와 팔관회 때의 진다 의식을 자세히 살펴보자.

확대보기
다식과 다식판
다식과 다식판
팝업창 닫기

고려 태조는 훈요십조(訓要十條)를 통해 신라시대의 연등회와 팔관회를 수용하여 봄철 연등회와 겨울철 팔관회를 시행할 것을 당부한다.245)『고려사』 권2, 세가2, 태조 계묘 26년. 왕과 군신 그리고 전 국민이 참여했던 연등회와 팔관회에 차를 올리는 진다 의식이 빠질 수 없다. 연회 중에는 차뿐 만이 아니라 불교 의례에서 일반적으로 올리는 향·등·꽃·과일 등을 받쳤다. 연등회와 팔관회 모두 복잡한 의식으로 구성되었지만 대체로 신하들이 왕에게 차를 올리고, 술을 올리고, 과일을 올리고, 꽃을 올리고, 다시 왕이 신하들에게 차를 내리고, 술을 내리고, 과일을 내리고, 꽃을 내리는 식으로 이루어진다. 즉 부처님께 차와 과일, 꽃 등의 공양물을 올렸던 불교 의례와 같은 구조로 국가 의례가 진행된 것이다. 팔관회같이 고려의 국가 의례 중에서도 비중이 큰 행사에는 14일 소회일(小會日)과 15일 대회일(大會日)에 모두 진다 의식이 있었다. 진다 의식은 다식(茶食)과 차의 순서로 이루어진다. 근시관이 왕에게 다식을 올린 뒤 태자 이하 시신에게 다식을 차린다. 집례관이 “절하시오.” 하면 두 번 절하고 다식을 먹고 읍례를 한다. 다시 근시관이 왕에게 차를 올리고 태자 이하 시신에게 차를 드린다. 집례관이 “절하시오.” 하면 두 번 절한 뒤 차를 마시고 다시 읍례를 한다. “차를 드십시오.” 하면 태자 이하 신하들이 차를 마시고 읍례를 한다.

다식은 쌀·콩 등의 볶은 가루나 밤·검은 깨·송홧가루 등을 꿀이나 조청 등으로 반죽하여 다식판에 박아낸 것으로 차를 마시기 위한 음식이다. 고려시대의 다식이 어떤 형태였는지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이색(李穡, 1328∼1396)의 『목은집(牧隱集)』에 팔관회에서 맛본 다식의 달콤함을 표현한 시가 있어 팔관회 같은 불교 의례나 제사 때 쓰던 제수품으로 조선시대의 다식과 비슷한 형태로 추측된다.

진다 의식이 가례에서 진행된 것은 불교의 차 공양이 미친 영향도 컸지만, 가례 자체가 갖는 왕실과 신하들 사이의 친목 화친의 목적과 차가 가진 친목 기능이 부합되었기 때문이다. 차는 손님을 접대하는 대표적인 의례 음식이다. 의례를 행하며 함께 마시는 차는 참여하는 모든 사람에게 경건함, 친밀감, 일체감을 느끼게 해준다. 예지에 다 기록되지 않았지만 많은 의례에서 진다 의식을 행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빈례(賓禮)는 국가와 국가 사이에 사신을 맞이하는 의례이다. 국가 사이의 친화를 도모하려는 것이기 때문에 예를 다해야 한다. 오늘날에도 중요한 손님 접대에 차가 빠지지 않듯 고려시대 외국 사신 접대에도 차가 빠지지 않았다. 북조(北朝)나 명나라의 사신을 맞이할 때 진다 의식을 행하였다. 왕은 사신에게 황제의 조칙(詔勅)과 예물을 받은 뒤 예를 갖추어 차를 대접하게 한다. 고려의 빈례는 사신을 위한 연회로 이어진다. 사신 영접 연회는 1124년(인종 2)에 송나라 사신으로 고려를 다녀간 서긍(徐兢)이 지은 『선화봉사고려도경(宣和奉使高麗圖經)』을 통해서 짐작할 수 있다.246)40권으로 이루어진 『선화봉사고려도경(宣和奉使高麗圖經)』은 흔히 『고려도경』으로 부른다. 송나라 휘종이 파견한 국신사(國信使) 일행 중에 제할인선예물관(提轄人船禮物官, 사절단의 인원 선박 예물을 관장하는 관리)으로 고려에 온 서긍이 있었다. 그는 1124년(인종 2) 약 한 달 정도 고려에 머물면서 고려의 역사·정치·경제·문화·종교 등을 그림과 글로 기록해 책으로 묶어 냈는데 지금은 그림은 없어지고 글만 전한다.

서긍이 경험했던 고려의 진다 의식은 중국의 격식과 달랐다. “무릇 연회 때면 뜰 가운데서 차를 끓여서 은하(銀荷, 은으로 만든 연잎 형상을 한 작은 뚜껑)로 덮어 가지고 천천히 걸어와서 내놓는다. 그런데 찬자(贊者)가 ‘차를 다 돌렸소.’라고 말한 뒤에야 마실 수 있으므로 으레 냉차(冷茶)를 마시게 마련이다.”라고 하였다.247)『고려도경』 제32권, 기혈(器皿) 3, 다조(茶俎). 또 서긍은 머물렀던 관사(館舍)에서 차를 대접받았다. “매일 세 차례씩 내는 차를 맛보게 되는데, 뒤이어 또 탕(湯, 잎차 끓인 물)을 낸다. 고려인들은 탕을 약(藥)이라고 하는데 사신들이 그것을 다 마시는 것을 보면 반드시 기뻐하고, 혹 다 마셔내지 못하면 자기를 깔본다고 생각하면서 불쾌해져서 가버리기 때문에 늘 억지로 그것을 마셨다.”라고 하였다.248)『고려도경』 제32권, 기혈 3, 다조.

서긍의 글에서 고려의 진다 의식 일부와 음다 풍속을 알 수 있다. 즉 차를 다른 곳에서 따로 달여서 뚜껑을 덮어서 들고 들어왔다. 이 점은 다른 의례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또, 왕과 신하, 사신에게 차가 다 돌려진 뒤 함께 차를 마셨다. 모두에게 차를 따라 준 뒤에야 차를 마실 수 있기 때문에 차가 식어서 서긍은 불만을 가졌지만, 중국과 다른 고려의 독특한 진다 의식이었다. 당시 고려와 중국의 빈번한 교류를 볼 때 고려인들이 중국의 차 마시는 격식을 몰랐을 리가 없다. 하지만 중국 사신에게 고려의 차 마시는 격식을 그대로 보여 준 것에서 고려인들이 차를 좋아하였고 이에 따른 자부심도 컸음을 알 수 있다.

흉례(凶禮)에도 차와 관련된 의례가 있었다. 중형주대의(重刑奏對儀)라는 의례이다. 왕이 죄인에게 내릴 무거운 형벌을 결정하기 전에 신하와 함께 차를 마시는 것이다. 중형주대의 의례를 간략히 살펴보겠다. 먼저 왕이 내전 남쪽 행랑에 앉고 여러 신하도 재배한 후 제자리에 앉는다. 다방참상원(茶房參上員)이 곁문에서 차를 들고 들어오고 내시가 그 뚜껑을 열어 집례(執禮)가 왕에게 차를 권한다. 다음에 원방 8품 이하가 차를 내어 오면 집례가 신하에게 차를 청한다. 그다음 신하가 들어와 왕에게 “붉은 붓으로 참형(斬刑)을 결정하시고, 섬으로 귀향 보낼 자를 제외하소서.”라고 아뢴다. 형이 정해지면 왕과 신하에게 약(藥)이 권해지고, 신하들은 왕이 술과 과일을 하사한다는 분부를 받고 나간다.249)『고려사』 권64, 지(志)18, 예(禮)6, 흉례(凶禮), 중형주대의(重刑奏對儀). 차에는 각성 작용이 있다. 차를 마시면 정신이 맑아지고 마음이 편안해져 기억력과 판단력이 증가된다. 참형이나 귀향 같은 중형을 내리기 전에 왕과 신하가 함께 차를 마시는 것은 차를 마시면서 정신을 가다듬어 가장 마음이 평안한 상태에서 치우침 없는 바른 결 정을 내리기 위해서였다.

왕이 신하나 백성에게 내리는 선물로도 차가 많이 이용되었다. 흉례 중에는 신하들의 상(喪)과 관련된 의례가 있다. 왕은 신하가 죽으면 부의(賻儀)를 하였는데 이때 차를 하사하였다.250)『고려사』 권64, 지18 예6, 흉례, 제신상(諸臣喪).

989년(성종 8) 최승로(崔承老)가 세상을 떠나자 왕은 뇌원차(腦原茶) 200각(角:차 상자), 대차(大茶) 10근을 하사한다. 995년(성종 14) 최량(崔亮)이 죽었을 때도 뇌원차 1,000각을 하사하였고, 998년(목종 1) 서희(徐熙)가 사망하자 역시 뇌원차 200각과 대차 10근을 내려 주었다.

1007년(목종 10)과 1010년(현종 1)에도 왕이 남녀 80세 이상 중한 병자 635명에게 술, 음식, 옷감, 차, 약 등을 나누어 주었다.251)『고려사』 권68, 지22, 예10, 가례(嘉禮)4, 노인사설의(老人賜設儀) ; 『고려사』 권4, 세가4, 현종1. 신하들에게 선물로 차를 내리는 것은 쉽게 이해되지만, 일반 백성에게까지 차를 내리는 것은 낯설다. 고려의 백성들이 정말 차를 마셨을까? 이 부분은 뒤에서 자세히 살펴보겠지만, 차는 신라시대부터 이미 알려졌던 만큼 고려시대에는 일부 백성들은 차를 알고 마셨던 것이 분명하다. 차는 선물로 내려 줄 만큼 음식·옷감·약과 마찬가지로 귀하고 중요하였다. 실제 차에는 비타민과 같은 영양소도 들어 있고, 몸속의 노폐물을 배출하고, 신진대사도 원활하게 하며, 해열과 해독 효능도 있다. 당시 사람들은 차의 효능을 경험적으로 알았기 때문에 왕이 차를 내리는 것은 약을 내리는 것과 같은 의미이다.

왕의 행차 때나 국가 의례 때 다구를 들고 가는 군사도 따로 존재하였다. 연등회나 팔관회 때 또는 왕이 문묘(文廟)나 전시(殿試)에 거둥할 때, 왕이 서경(평양)이나 남경(한양)을 순행할 때, 순행하고 돌아올 때 등의 위장(衛仗, 왕이 거둥할 때에 앞장 서는 의장 대열) 중에는 행로(行爐) 군사와 다담(茶擔) 군사가 있었다.252)『고려사』 권72, 지26, 여복(輿服)1, 의위(儀衛). 행로는 휴대용 화로이며, 다담은 차 및 그와 관련된 짐이다. 차와 다구를 맡은 군사가 따로 존재하였고, 왕의 행차 때마다 수행하였다는 것은 대부분의 의식 중에 진다 의식이 이루어져 차와 다구를 중요하게 여겼음을 뜻한다. 아울러 그만큼 왕이 차를 즐겨 마셨고, 왕실 생활 속 에 차가 깊숙이 자리 잡았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대부분의 국가 의례에서 차를 사용하는 만큼 차는 엄청난 규모로 소비되었다. 왕실뿐 아니라 귀족, 승려들까지 차를 즐겼기 때문에 이와 같은 차 수요를 충당하기 위해 차를 전문적으로 생산하는 다소(茶所)라는 행정 구역까지 있을 정도였다.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에 옛 다소(古茶所)라 기록된 고려의 다소가 19개가 넘으며, 차 재배가 가능한 지역에 있는 큰 사찰 부근에도 설치되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차 소비가 높았던 만큼 차의 산지 사람들은 공물에 시달렸다. 이규보(李奎報, 1168∼1241)는 차를 생산하던 화계(花溪·花開)를 이야기하며 관에서 노인과 어린이까지 징발하여 험준한 산중에서 차를 따 모아 서울에 등짐 져 나르게 하므로 차는 이들의 고혈(膏血)이고 피땀이라고 한탄할 정도였다.253)이규보(李奎報), 『동국이상국집(東國李相國全集)』 권13, 고율시(古律詩), 「손한장복화차운기지(孫翰長復和 次韻寄之)」.

개요
팝업창 닫기
책목차 글자확대 글자축소 이전페이지 다음페이지 페이지상단이동 오류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