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10권 자연과 정성의 산물, 우리 음식
  • 제5장 천년을 함께한 차
  • 4. 다산, 초의 그리고 추사
  • 차가 꽃피워 낸 예술, 추사
김지원

‘명선(茗禪)’은 추사체로 잘 알려진 추사 김정희의 글씨이다. 두 글자로 이루어진 간단한 작품이지만 많은 이야기가 담겨 있다. 먼저 글씨와 제발(題跋)의 내용부터 자세히 살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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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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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선의 뜻은 ‘차(茗)를 마시며 선정(禪定)에 들다.’이다. 명과 선 두 글자를 나란히 두었는데 이는 차가 곧 선이라는 의미이다. 김정희는 차를 마시는 일을 선과 같은 경지로 여긴 것이다. 여기에서 김정희의 차에 대한 사랑이 차 마시는 일을 선의 경지까지 끌어올릴 만큼 강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왜 차 마시는 일을 선의 경지까지 끌어올렸는지 의문이 들 수밖에 없다. 단순히 차를 즐기는 수준이 아니었다는 것은 오른쪽에 있는 제발을 보면 잘 드러난다.

제발에는 “초의가 스스로 만든 거친 잎(茗)차를 보내왔는데 중국의 명차인 몽정(蒙頂), 노아(露芽)보다 못하지 않다.”라고 했는데, 여기서 초의의 차와 비교한 몽정차와 노아차는 중국에서 손꼽는 명차이다. 조선 후기에 차나무는 지리산 같은 일부 지역에서만 자랐기 때문에 아무리 양반이라도 차를 구해 마시기가 어려웠다. 하지만 김정희는 조선차뿐 아니라 중국의 이름난 차까지 구해 마셨고 초의의 차를 중국 명차와 비교할 정도로 맛에 예민하였고 차에 대한 지식도 해박하였다. 차를 계속 마셔 왔고 매우 즐겼던 것이 분명하다. 구하기도 힘든 귀한 차를 김정희가 어떻게 처음 접했으며, 어떻게 구했을까? 글을 통해 초의가 직접 만든 차를 김정희에게 보냈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초의를 만나고 차까지 얻게 된 사연도 궁금해진다. 숭유억불(抑佛崇儒)이 국가 정책이던 조선시대에, 그것도 학문과 신분이 너무나 다른 승려와 학자가 차를 보내고 답례로 글씨를 써주는 교우 관계가 어떻게 가능하였을까?

작품을 마저 살펴보면 좌측 하단에 ‘병거사예(病居士隷)’, 곧 병거사가 예서로 쓴다고 하였다. 자신의 이름을 ‘병거사(病居士)’로 쓴 것인데, 병거사는 불교의 유마거사 바로 유마힐이다. 유마힐은 『유마경(維摩經)』에서 출가하지 않고 속세에 있으면서도 깨달음을 얻은 재가 불제자(在家佛弟子)로 나오는데, 해탈의 실상을 보여 주기 위한 방편으로 병에 걸리고 그 병을 치유하는 방도를 제시하여 대중들을 교화하였다. 말년의 김정희는 유마거사의 불이법문(不二法門)을 높이 평가하여 귀의하며 계를 지키고 있었기에 초의에게 글을 보내면서 스스로를 유마거사와 같은 재가 불제자라고 표현한 것이다. 사실 김정희는 당대 최고의 유학자였지만, 불교에 대한 이해가 깊은 불교학자이기도 하였다. 초의를 비롯해 해붕(海鵬), 우담(優曇) 등 당대 고승들과 깊은 교류를 맺었고, 백파 긍선(白坡亘璇 1767∼1852)과는 선 논쟁 을 할 정도였다. 초의 역시 승려였지만 당대 유가 지식인들과 폭넓게 교유하여 유학에 깊은 지식을 갖고 있었다. 김정희와 초의가 서로에게 스승과 제자가 되어 주며 깊은 우정을 나눌 수 있었던 것은 자신의 학문 영역을 초월했기 때문에 가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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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희 초상
김정희 초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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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세를 누리던 경주 김씨 집안에, 영조의 사위였던 김한신의 증손자로 태어난 김정희는 24세 때 청나라에 사신으로 가는 아버지 김노경을 따라 1809년(순조 9) 연경으로 들어간다. 그곳에서 그는 당대 최고의 학자들을 만나고 글로만 접했던 최신 문화를 직접 체험하게 된다. 특히 연경에서 평생의 스승을 만나게 되는데, 담계(覃溪) 옹방강(翁方綱)과 운대(芸臺) 완원(阮元)이다. 이때 완원에게 완당(阮堂)이라는 아호를 받았다. 완원에게 받은 것은 한 가지가 더 있었다. 바로 차였다. 그는 김정희에게 희대의 명차라는 용단승설(龍團勝雪)을 달여 주었다. 용단승설은 찻잎을 시루에 쪄서 절구판에 짓이겨 판형으로 찍어 낸 뒤 그늘에서 말려 차의 표면에 용무늬를 찍고 금박을 새기면 용단으로 왕만이 마시고, 봉황 무늬를 찍으면 봉단으로 신하가 마셨다는 차로 주로 상류층이 마셨다. 김정희는 이때 마신 차 맛을 잊을 수 없어 훗날 승설도인(勝雪道人)이라는 호를 사용하며 차를 계속 즐겼다. 귀국 후에도 연경의 문인들과 계속 학예를 교류하였다. 엄청난 양의 책과 탁본, 서화, 붓, 먹, 종이, 선물이 그들과 김정희 사이를 오갔다. 그 속에는 당연히 김정희를 위한 차 선물이 들어 있었다. 김정희가 받은 차 선물 중에는 황실에서만 먹을 수 있었다는 용정차(龍井茶)도 있었다. 용정차는 청명 전 3일 동안에 딴 것을 최고로 치는데, 그가 받은 차는 용정 진 품(眞品)으로 까다로운 그의 입맛에 맞추어 골라 보낸 듯하다.

30세가 되던 1815년(순조 15) 김정희는 마침내 초의를 만나게 된다. 김정희와 초의의 만남에 대해 여러 설이 있는데, 정약용의 아들인 유산(酉山) 정학연의 소개로 만난 이야기가 가장 많이 알려져 있다. 정학연이 강진에 유배된 아버지를 뵈러 갔다가 초의를 알게 되고, 한양에 한번 다녀갈 것을 청하여 이를 받아들인 초의가 서울에 왔을 때 김정희와 만나게 되었다는 내용이다. 같은 나이였던 김정희와 초의는 학자와 승려로서 학문과 신분이 달랐지만 한눈에 서로 뜻이 통하였다. 당시 청조 경학(淸朝經學)과 고증학, 금석학 등 최신 문화를 섭렵하며 불교에도 남다른 관심을 보였던 김정희와 마찬가지로 초의도 불교에 새로운 활력을 줄 수 있는 새로운 학문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었다. 게다가 김정희가 경험한 중국의 고급 차 문화, 차에 대한 해박한 지식과 초의가 끓여 낸 차와 우리 차의 세계가 만난 셈이니 그들은 차 한 잔을 앞에 두고 밤새도록 끝없는 다담을 나누었을 것이다. 김정희는 말차도 즐겨 마셨던 것으로 짐작된다. 훗날의 이야기지만 김정희가 손수 끓인 뇌협차(雷莢茶)의 설유(雪乳)를 나눠 마셨다고 초의가 이야기하였기 때문이다. 처음 인연을 맺은 뒤로 42년 동안 둘은 시와 글을 주고받았다. 해마다 봄이면 초의가 직접 만든 차를 보냈고, 김정희는 그 맛을 평하고 답례로 글을 선물하였다.

학문과 예술 모두에서 최고의 위치에 올랐던 김정희는 1840년(헌종 6) 55세 때 정쟁에 휘말려 큰 벽에 부딪친다. 시기하던 세력의 모함으로 10년 전의 일이었던 윤상도(尹尙度) 옥사에 연루되어 목숨이 경각에 달렸다가 다행히 우의정 조인영(趙寅永)의 상소로 겨우 목숨만 구해 제주도로 귀양살이를 떠나게 되었다. 지금 제주도는 최고의 관광지이지만, 조선시대 제주도는 육지와 철저히 차단되어 있었기 때문에 중죄인의 유배지였다.

제주도로 유배 가는 길에 김정희는 잠시 해남 일지암을 들려 초의를 만난다. 초의는 일찍이 일지암에 자리를 잡아 구도를 하면서 뒷산 자락에 차 밭을 일구며 다도를 즐기고 있었다. 귀양살이를 떠나는 그에게 초의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직접 차를 끓여 주며 억울한 사연을 들어 주는 것밖에 없었겠지만 초의의 위로는 김정희에게 큰 힘이 되었을 것이다. 초의의 차 한 잔이 어쩌면 김정희에게는 큰 깨달음을 주었을 지도 모른다. 같은 초의의 차이지만, 최고의 위치에서 부귀영화를 누릴 때 마시던 어제의 차 맛과 하루아침에 나락으로 떨어져 귀양살이 떠나는 길에 마시는 오늘의 차 맛은 확연히 다름을 느꼈을 수도 있다. 반대로 자신의 처지는 하룻밤 사이에 달라졌지만 초의의 차 맛은 변함없음을 느꼈을 수도 있다. 김정희가 차 맛을 가장 깊이 깨달았을 때가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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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사 적거지
추사 적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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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희는 제주 대정현(지금의 남제주군 대정읍)에서 유배 생활을 시작하였다. 9년 동안 제주도의 낯선 풍토, 입에 맞지 않는 음식, 설사·기침·종기·눈병 따위의 잦은 질병으로 고생을 많이 하였다. 그의 괴로움은 편지에 절절이 묻어난다. 친구와 가족들에게 보내는 편지에는 그들의 편지를 기다리며 외로움을 호소하고 음식과 책을 보내달라는 부탁이 많았다.

9년여의 유배 기간 동안 쓸쓸함과 괴로움을 달래 주었던 것은 초의가 직접 만들어 보낸 차였다. 초의의 차는 그의 병든 몸을 추스르는 데 도움을 주었던 것으로 보인다. 김정희가 초의에게 보낸 편지 중에는 스님이 보내 준 차를 마시고 위(胃)가 편해졌으니 감사하다는 글이 있다. 허준(許浚)의 『동의보감(東醫寶鑑)』에는 “차는 기를 내리고 음식의 소화를 돕고, 머리를 밝게 하고, 소변을 잘 통하게 하며 갈증을 멈추게 하고 잠을 적게 하고 독을 푼다.”라고 하였다. 실제로 차의 떫은 맛을 내는 탄닌 성분은 해열, 해독의 효능이 있고, 설사를 멈추게 하는 효능도 있다. 약과 의원을 구하기 힘든 유배지에서 차는 좋은 약이 된다.

차가 얼마 남지 않았거나 떨어지게 되면 초의에게 차를 보낼 것을 다그치는 편지가 빗발쳤다. 나중에 초의는 1840년부터 1848년 제주도 유배에서 풀려날 때까지 김정희가 보내온 편지를 모아 『영해타운(瀛海朶雲)』이라는 책으로 묶어 낸다. 김정희가 초의에게 보낸 편지를 보면 차가 얼마 남지 않았으니 어떤 차를 보내라, 몇 근을 보내라는 등의 주문이 많았다. 어쩌다 깜박 잊고 차를 늦게 보내면 초의가 소개하여 김정희의 제자가 된 소치(小癡) 허련(許鍊, 1809∼1892)에게 일지암으로 가서 직접 차를 얻어오게도 하였다. 자신이 제일 좋아하던 차를 잊지 않고 챙겨 주는 초의가 너무나 고마웠기 때문에 어린아이마냥 차를 빨리 보내달라고 더 보채었던 것일 수도 있다. 김정희는 이에 대한 고마움에 스님이 머무는 일지암을 위해 ‘일로향실(一爐香室)’이란 편액을 써서 허련을 통해 보낸다. ‘차 끓이는 화로 하나 있는 다실’이라는 뜻이다. 이 현판은 지금도 해남 대둔사 일지암에 보관되어 있다.

1843년(헌종 9) 봄에는 초의가 직접 차를 들고 제주도로 와서 잠시 머물기도 하였다. 이때는 초의가 이미 『동다송』과 『다신전』을 지은 이후였기에 김정희는 더욱 깊어진 다선(茶禪)을 배울 수 있었다. 김정희 역시 유배지에서도 끊임없이 책을 읽고 글씨를 쓰며 학예에 열중했기에 반년이라는 짧은 기간이었지만 학문적으로 서로에게 큰 도움이 되었다.

초의가 다녀간 이후 김정희는 마음에 많은 위안을 얻었던 것 같다. 비록 제주도 작은 집에 갇혀 지내지만 차 한 잔을 앞에 놓고 그 향을 맡으며 깊은 사색을 통해 무한한 자신만의 세계를 가질 수 있었다. 평소 부귀 속에서 생활하던 그가 유배지에서 곤궁함을 경험하면서 억울함과 분노를 마음에 담아 두었지만 자신이 만들어 낸 세계에서는 더 이상의 고통은 없었다. 김정희는 차에서 육체적·약리적 효과만 얻은 것이 아니라 가장 깊고 오묘 한 해탈의 진리를 얻었다. 마음을 돌리면 고통도 즐거움이 될 수 있다. 마음의 평안을 얻으면 그동안 잃어버렸던 자신의 모습을 찾게 된다. 힘든 유배 생활이 김정희에게 더욱 내면세계로 침잠하여 자신만의 새롭고도 독창적인 학예를 성숙시키게 한 것이다. 추사체를 이때 완성하였고, 그의 최고의 작품이라 일컫는 세한도(歲寒圖)도 이때 그렸다. 세한도는 제자였던 역관 우선(藕船) 이상적(李尙迪, 1804∼1865)이 유배지에 있던 김정희를 위해 중국에서 구한 책을 위험을 무릅쓰고 꾸준히 보내 주어 이에 대한 고마움으로 그려준 것이다. 세한도의 맨 오른쪽 노송은 거대하지만 가지도 얼마 안 되고 잎도 거의 없어 곧 시들어 말라죽을 것 같은 형상이다. 자신의 처연한 모습을 상징적으로 형상화한 것이다. 나무들 사이에 있는 허름한 초가집 역시 간략하여 김정희의 유배지를 상징적으로 투영한 것임을 짐작하게 한다. 전체적인 붓질 역시 거의 물기 없이 거칠하여 김정희의 마음을 상징적으로 담았다. 그러나 그 옆 기울어진 노송을 받쳐 주는 듯 서 있는 작은 소나무와 초가집 옆의 두 잣나무는 잎이 무성하고 싱싱하다. 이 소나무는 늘 김정희를 도와주는 이상적을 상징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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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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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48년 마침내 김정희는 제주 유배에서 풀려나게 되었다. 그러나 3년 후 함경도 북청으로 유배를 간다. 환갑이 훨씬 넘은 나이에 남쪽 끝에서 북쪽에 걸친 유배 생활이었지만 그에게는 오히려 학문과 예술이 완성되던 시 기였다. 그의 곁에는 언제나 초의가 있었다. 북청으로 가기 전에는 강상, 지금의 서울 용산 지역에 머물렀는데 이때에도 초의가 찾아왔다. 이때 김정희가 차를 보내 주지 않고 찾아오지 않는다고 초의에게 응석을 부리듯 써놓은 편지가 있다.

나는 스님을 보고 싶지도 않고 또한 스님의 편지도 보고 싶지 않으나 다만 차의 인연만은 차마 끊어버리지도 못하고 쉽사리 부수어 버리지도 못하여 또 차를 재촉하니, 편지도 보낼 필요 없고, 다만 두 해의 쌓인 빚을 한꺼번에 챙겨 보내되 다시 지체하거나 빗나감이 없도록 하는 게 좋을 거요. …… 새 차는 어찌하여 돌샘·솔바람 사이에서 혼자만 마시며 도무지 먼 사람 생각은 아니하는 건가. 몽둥이 서른 대를 아프게 맞아야 하겠구려.279)김정희(金正喜), 『완당선생전집(阮堂先生全集)』 권5, 서독(書牘), 여초의(輿草衣) 제34신.

김정희의 장난스런 협박 때문이었는지 초의는 결국 강상으로 와서 무려 2년 동안이나 곁에 머물다 간다. 김정희는 1년 후 북청 유배에서 풀려나 과천 과지초당(瓜地草堂)에서 머물게 되었다. 몸은 힘들지만 그의 마음은 모든 것을 초월한 상태였다. 과천 시절에 남겼던 것으로 짐작되는 작품이 앞에서 살펴본 명선(茗禪)과 불이선란(不二禪蘭)이다. 불이선란 역시 『유마경』 「불이법문품(不二法門品)」과 관련이 있다. 김정희는 화제에 다음과 같이 썼다.

난초 그림 안 그린 지 20년, 우연히 본성의 참 모습을 쳐냈네

문 닫고 찾으며 또 찾은 곳, 이것이 바로 유마의 불이선이네

평소 난을 잘 그려야지 하는 생각으로 그렸을 때는 좋은 난이 나오지 않다가 잘 그리겠다는 집착, 번뇌, 망상을 다 버리고 무심히 그렸을 때 좋은 난이 나왔다는 뜻이다. 누구나 청정무구한 본성이 있다. 이 본성은 번뇌와 망념에 가려 있기 때문에 이것을 걷어 내면 누구나 무념무심의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 그는 평범한 일상 속 무심의 경지에서 자신이 하는 일을 통해서 도를 깨달았다. 유마거사의 불이법문은 일체의 상대적인 분별과 차별을 초월한 근원적인 본래심의 경지를 말한다. 자신이 하던 그림을 그리는 일, 글씨를 쓰는 일 모두 선과 다르지 않다. 명선도 그의 깨달음이 그대로 표현된 작품이다. 김정희의 글씨 중 최고의 작품으로 명선과 불이선란을 꼽는데, 모두 무념무심의 깨달음에서 나온 것이다. 그 깨달음에 이르는 방법 중 하나가 바로 차를 마시는 일이다. 김정희는 수십 년 동안 차를 마시면서 이것이 곧 수행하는 것이며, 도의 본체를 체득하는 길임을 깨달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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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이선란
불이선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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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를 통해 깨달음을 얻었기 때문인지, 김정희는 과천에 머물 때에도 초의에게 차를 보내달라는 차 타령을 계속하였다.

행다(行茶) 때가 되면 어김없이 과천정(果川亭)과 열수장(烈水庄)으로 새 차를 보내더니 금년에는 곡우가 지나고 단오가 가까워졌는데도 두륜산 납자는 소식조차 없으니 어찌된 일인가, 신병이라도 난 것인가, 아니면 유마송에 열중해 계절 분간도 못하게 되었는가. 만약 더 지체하면 마조의 할(馬祖喝, 중국 마조 선사가 가르칠 때 지른 고함)이나 덕산의 방(德山榜, 중국 덕산 스님이 가르침에 사용한 몽둥이)으로 몹쓸 게으름을 징계하고 원인을 다스릴 터이니 그대 깊이깊이 깨닫게나.280)이기윤, 『다도』, 대원사, 2003, 101쪽 재인용.

이렇게 떼를 부리다가도 초의가 차를 보내오면 차 맛을 극찬하며, 차를 함께 나눌 초의를 더욱 그리워하는 편지를 띄우기도 하였다.

근일에는 일로향실(一爐香室)에 죽 머물러 있다니 무슨 좋은 인연이 있는 거요. 왜 갈등을 부숴버리고 한 막대를 멀리 날려 나와 이 차의 인연을 같이 아니하는 거요. 또한 근자에 자못 선열(禪悅)에 대하여 자경(蔗境)의 묘가 있는데 더불어 이 묘체(妙諦)를 함께 할 사람이 없으니 몹시도 사와 한 번 눈썹을 펴고 토론하고 싶은데 이 소원을 이룰 수 있을지 모르겠소.281)김정희, 『완당선생전집』 권5, 서독, 여초의 제36신.

김정희가 초의와 그의 차를 얼마나 좋아했는지 잘 드러나는 편지이다.

1855년(철종 6) 70세 되던 해에 김정희는 봉은사(奉恩寺) 판전(板殿)의 현판 글씨를 부탁받게 된다. 대작불사(大作佛事)가 마무리된 것은 1856년 9월 정도였다. 김정희는 병든 몸으로 ‘판전’이라는 글씨를 쓰고 그 옆에 낙관으로 ‘칠십일과 병중작(七十一果病中作)’을 썼다. 71세 때 과천 사람이 병중에 썼다는 의미이다. 김정희는 이 현판을 쓴 후 사흘 만에 임종을 맞이했다고 전한다. 그의 절필(絶筆)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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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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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의와의 인연은 이 판전에도 얽혀 있다. 판전 내부에 걸린 신중탱화(神衆幀畵)의 화 기(畵記)에 ‘증명비구 의순(證明比丘意恂)’이라고 나온다. 증명비구란 사찰의 고승으로 불사 전반을 관장하는 막중한 소임이다. 김정희가 마지막으로 혼신의 힘을 다했던 판전 불사에 평생 금란지교(金蘭之交)를 맺어 왔던 초의가 참여했던 것은 어찌 보면 너무나 당연한 일이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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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은사 판전 신중탱화 화기
봉은사 판전 신중탱화 화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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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의도 김정희를 오랫동안 잊지 못한 듯, 「완당김공제문(阮堂金公祭文)」에서도 차로 맺은 그들의 인연을 이야기하고 있다.

슬프다! 선생이시여, 깊은 우정을 잊지 말고 저 세상에서 오랫동안 인연을 맺읍시다. …… 손수 뇌협차와 설유를 달여 마시곤 했는데 그러다 슬픈 소식을 들으면 눈물을 흘려 옷을 적시곤 했지요. …… 선생의 빠른 별세를 원망하니, 땅에 떨어진 꽃은 바람에 날리고 나무는 달그림자 끝에 외롭습니다.282)초의, 임동욱 역주, 『초의선집(草衣選集)』, 동문선, 1993.

차는 김정희와 초의를 맺어 주고 더욱 돈독한 우정을 쌓게 하였다. 차는 김정희의 삶 속에서 고통을 잊게 하였고, 깨달음을 주었고, 고매한 정신이 담긴 글씨와 그림으로 승화되었다.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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