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11권 신앙과 사상으로 본 불교 전통의 흐름
  • 제1장 불교의 수용과 신앙의 시작
  • 1. 삼국의 불교 수용과 그 성격
  • 삼국 불교의 국가적 성격
김남윤

불교는 정복 전쟁을 합리화하고 고대 국가 체제를 뒷받침하는 성격을 띠고 있었다. 불교에서는 법의 보편성이 강조되는데 그 법의 이념은 바로 왕의 법, 왕권과 직결된다. 이것은 법의 보편성을 내세운 왕법의 관념으로 정복 전쟁으로 통합한 지역과 집단을 아우르며 왕권을 강화하고 고대 국가 체제를 이루어 갔던 사정을 보여 주는 것이다.

고구려의 고국양왕은 요동 지역을 넘어 북중국에까지 진출을 시도하면서 불교 숭신을 하교하고 아울러 사직단을 세우고 종묘를 수리하게 하였다.20)『삼국사기』 권18, 고국양왕 9년. 이처럼 불교 장려와 함께 전통 신앙을 강조하는 정책은 이후에도 계속되어 고구려는 5세기에 시조 신화를 바탕으로 한 독자적 천하(天下) 관념 을 수립하였다.21)노태돈, 「5세기 금석문(金石文)에 보이는 고구려인의 천하관(天下觀)」, 『한국사론』 19, 서울대학교 국사학과, 1988 참조. 광개토왕도 정복 전쟁으로 영토를 크게 확장하는 한편 평양에 9사(寺)를 창건하여 불교 장려 정책을 실시하였다.22)신동하, 『고구려의 사원 조성과 그 의미』, 『한국사론』 19, 서울대학교 국사학과, 1988 참조. 급속한 대외 팽창으로 새로 확보한 지역과 종족 집단들을 지배하기 위해서는 그들의 문화적·사회적 이질성을 포용하고 왕을 정점으로 한 질서를 유지하는 보편적 관념 체계가 필요하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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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초령순수비 탁본
황초령순수비 탁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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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은 모두 불교에서 이상적 군주로 설한 전륜성왕설을 받아들였다. 광개토왕은 “그 위엄이 사해에 떨쳤다.”고 하며 ‘호태성왕(好太聖王)’이라고 칭하였다.23)한국 고대 사회 연구소, 「모두루묘지(牟頭婁墓誌)」, 『역주(譯註) 한국 고대 금석문(金石文)』 Ⅰ, 가락국사적개발연구원, 1992. 91∼101쪽. 백제 중흥의 군주 성왕(聖王)은 생전에도 성왕으로 불렸는데,24)『삼국사기』 권26 성왕조에 “무령왕이 세상을 떠나자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르니 국인들이 그를 일컬어 성왕이라 하였다.”고 전한다. 이는 성왕 자신이 전륜성왕을 자처한 때문으로 보인다. 특히, 신라의 진흥왕은 황룡사의 장륙존상(丈六尊像)을 주성하면서25)『삼국유사』 권3, 탑상(塔像) 황룡사장륙(皇龍寺丈六). 인도 아육왕(阿育王, 아소카왕)과 같은 전륜성왕임을 자처하였다.

아소카왕(재위 B.C. 268∼B.C. 232)은 마우리아 왕조의 3대왕으로 인도를 최초로 통일하였다. 또 법에 의한 정치를 이상으로 삼고 그것을 실현하기 위하여 진력하였으며 정복한 지역을 순수하며 석주(石柱)를 세워 불교를 널리 전파하였다. 그리하여 아소카왕은 남염부주(南閻浮洲)를 통치한다고 하는 철륜왕(鐵輪王)으로 인식되었다.

진흥왕은 불교를 공인하고 만년에는 출가하여 승려가 되었던 법흥왕을 계승하였는데, 그도 불교를 장려하고 만년에 출가하여 법명을 법운(法雲)이라고 하였다. 진흥왕의 이름은 사미(沙彌) 또는 승가(僧伽)를 뜻하는 삼맥(彡麥)이라 하였는데, 두 아들의 이름은 동륜(銅輪)과 금륜(金輪 또는 舍輪, 진지왕)이라 하여 전륜성왕설에 따르고 있다. 영토를 크게 확장한 다음 그 지역을 직접 순수하여 다섯 곳에 순수비(巡狩碑)를 세웠으며 황룡사를 창건하고 아소카왕이 이루지 못한 장륙존상의 주성을 이루었다. 또 화랑 제도 를 정비하였는데 신라에서는 화랑을 미륵불의 화신으로 내세웠다.26)실제로 화랑의 무리에는 승려 낭도(僧侶郎徒)가 있어 화랑을 보좌하며 낭도를 선도하는 교육을 담당하고 있었던 것으로 밝혀졌다(김영태, 「승려 낭도고」 참조). 이러한 일들은 전륜성왕을 자처하며 신라에 정법 왕국의 실현을 꿈꾸었던 정책의 산물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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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평왕릉
진평왕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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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뒤 신라에서는 왕을 흥법의 전륜성왕으로 보는 것에서 나아가 부처와 동일시하는 진종설(眞種說)을 성립시켰다. 23대 법흥왕부터 28대 진덕여왕까지는 왕명을 모두 불교에서 따온 시대이므로 불교 왕명 시대라고도 한다. 진흥왕의 손자인 진평왕은 왕즉불(王卽佛) 사상을 확립하였다.

진평왕은 자신의 이름을 석가모니 아버지의 이름을 따서 백정(白淨, 淨飯王)이라 하고 왕비의 이름도 석가모니 어머니의 이름을 따서 마야 부인(摩耶夫人)이라고 하였다. 진평왕의 아우들도 백반(伯飯)·국반(國飯)이라고 이름 지었는데, 이는 정반왕의 아우들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 진평왕의 딸인 선덕여왕의 이름 덕만(德曼) 역시 불경에 나오는 이름이며, 진덕여왕의 이름인 승만(勝曼)은 『승만경』이라는 불경의 주인공이다.

진평왕대의 신라 왕실은 인도 카필라국의 석가족 왕실을 그대로 옮겨온 셈이었다. 진평왕을 중심으로 한 왕의 직계 가족은 불경에 나타나는 찰제리종(刹帝利種, 크샤트리아)의 진종설을 그대로 가져다 왕실을 불교적으로 신성화하였다. 곧, 왕즉불 사상으로 불교 설화를 끌어다 권위를 더욱 강화한 것이다.

국왕을 부처와 동일시하는 왕즉불 사상은 중국 북조의 북위(北魏)에서 특히 성행하였다. 북위 불교를 받아들인 고구려는 고대 국가로의 성장을 일찍이 이루었고, 백제는 남조 불교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에 불교의 국가적 성격이 두드러지게 나타나지 않았다. 고구려를 통하여 왕즉불 사상을 받아들였을 신라 불교에서는 국가적 성격이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났다.27)최병헌, 「불교 사상과 신앙」, 『한국사 특강』, 서울대학교 출판부, 1990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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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룡사 9층 목탑 찰주 본기
황룡사 9층 목탑 찰주 본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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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흥왕 때의 거칠부(居柒夫)는 장군이 되기 이전에 승려였다고 하며, 그가 고구려에 갔을 때 승려 혜량(惠亮)이 그를 알아보고 장차 장수가 되어 군병을 이끌고 왔을 때는 자신을 해치지 말아달라고 부탁한 사실이 전한다.28)『삼국사기』 권44, 열전 거칠부(居柒夫). 이러한 일은 불교가 정복 국가의 이념과 상치되지 않았기 때문에 가능하였을 것이다.

혜량은 551년(진흥왕 12) 신라로 와서 승통(僧統)이 되어 백고좌법회(百高座法會)와 팔관회(八關會)를 처음으로 개최하였다. 황룡사 9층탑 건립이나 장륙존상 조성과 같은 대규모 불사(佛事)도 주변 나라를 진압하기 위한 국가적 목적 때문이었다. 원광(圓光)이 수나라에 보내는 걸사표(乞師表)를 짓고, 자장(慈藏)이 황룡사 9층탑의 건립을 건의한 사실도 국가 관념에서 나온 것이었다. 이들은 승려로서 국정을 자문하는 역할을 하면서 백고좌회나 팔관회 같은 법회를 주관하고 불교를 이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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