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11권 신앙과 사상으로 본 불교 전통의 흐름
  • 제1장 불교의 수용과 신앙의 시작
  • 4. 국가적 불사와 법회
  • 사찰 건립
김남윤

삼국에서 불교 신앙의 귀의처인 사찰을 조성한 사실은 불교를 공인한 때부터 찾아볼 수 있다. 고구려와 백제는 외교 관계를 통해 승려가 들어와 불교를 전하였을 때 이들이 가지고 온 불경과 불상을 모시고 승려를 머물게 하기 위한 곳으로 사찰을 건립하였다.

신라는 고구려에서 온 묵호자와 아도가 머물며 교화를 펴던 일선군 모례의 집이 사찰과 같은 기능을 하였을 것이다. 사금갑 설화에서는 내전에 분수승이 있었다고 하여 궁궐 안에 불당이 있었을 가능성을 보여 준다. 그러나 처음으로 건립된 사찰은 법흥왕 때 ‘복을 닦고 죄를 없앨 곳을 마련하고자’ 한 흥륜사(興輪寺)이다.

불교 공인 이후 삼국은 모두 국가적 불사(佛事)를 벌여 대규모의 사찰을 건립하였고, 그 규모는 이후 어느 시대보다도 컸다.

고구려 광개토왕은 평양에 9사를 창건하였는데 그로부터 30년 뒤에는 장수왕이 평양으로 천도하였다. 천도 이전에 9사를 창건하였던 것은 사찰로 둘러싸여 부처의 보호를 받는 새로운 왕도를 건설한다는 계획에서 나왔 을 것이다. 또 이 시기에 고구려왕은 ‘천제지자(天帝之子), 일월지자(日月之子)’인 동명의 후손이라는 것으로 왕권을 신성화하고 독자적인 천하 관념을 표방하였다. 시조 신화를 내세운 전통의 권위와 아울러 불교도 장려하여 확대된 영토와 집단을 지배하고 통합하고자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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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에서는 527년(성왕 5) 양제(梁帝)를 위하여 웅천주(熊川州)에 절을 지었는데 이름을 대통사(大通寺)라고 하였다.68)『삼국유사』 권3, 원종흥법조에는 이 내용이 법흥왕의 업적으로 기록되어 있다. 당시 웅천주는 백제 땅이므로 백제의 사찰 창건 사실을 전하는 것이 되며, 대통사지는 공주 반죽동에 남아 있다. 양나라와 교류하면서 양 무제를 본받아 세운 것으로 생각된다.69)양 무제는 불교에 심취하여 몸소 계율을 지키고 사찰을 창건하고 『법화경』·『열반경』에 대한 저술도 하였다. 양 무제는 연호를 대통(大通)이라고 하였는데 『법화경』에 나오는 대통지승여래(大通智勝如來)의 이름을 따서 연호로 정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법화경』에 나오는 대통지승여래(大通智勝如來)는 국왕이었고 그 아버지는 전륜성왕이었는데 출가하여 깨달음을 얻어 설법하고 있다는 내용에 따라 전륜성왕을 자처한 성왕이 창건한 사찰로 여겨진다.

538년에 부여로 수도를 옮긴 성왕은 541년 양나라에 사신을 보내 『열반경』 등 경전과 함께 공장(工匠)과 화사(畵師) 등도 요청하였다.70)『삼국사기』 권26, 성왕 19년. 사찰을 건립하고 불상을 장엄하기 위한 것으로 이때에 정림사(定林寺)가 건립되었다. 정림사는 부소산을 정점으로 해서 궁남지를 잇는 남북의 중심축에 자리하였다.

법왕이 600년에 창건을 시작한 왕흥사(王興寺)는 수십 년에 걸친 공사 끝에 무왕 때에 낙성하였으며, 경치가 수려하고 아름다워 왕이 자주 배를 타고 절에 갔다고 한다.71)『삼국유사』 권3, 흥법 법왕금살. 또 무왕은 최대 규모의 사찰인 익산의 미륵사를 창건하였다. 왕이 왕비와 함께 행차하는데 용화산(龍華山) 아래 큰 못가에 이르자 미륵 삼존이 나타나므로 왕비가 절을 세울 것을 청하여 창건한 절이다.72)『삼국유사』 권2, 기이 무왕. 기사 중에 미륵사를 왕흥사(王興寺)라고 하였다는 주석이 있다. 미륵사는 불전, 탑, 낭무를 각각 세 곳에 세워서 미래불인 미륵이 세 차례의 설법으로 모든 중생을 제도한다는 용화삼회설(龍華三會說)에 따른 사찰 조영을 보여 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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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륵사지 복원 상상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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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륵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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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에서는 흥륜사가 544년에 낙성되자 진흥왕은 ‘대왕흥륜사(大王興輪寺)’라는 사액을 내리고 ‘대왕’임을 표방하였다. 흥륜의 윤(輪)은 전륜왕의 윤보(輪寶)이자 법왕(부처)의 법륜(法輪)으로, 법흥왕이 주도하여 불교를 공인하고 처음 창건한 흥법의 터전이라는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또 553년(진흥왕 14)에는 월성 동쪽에 새로운 궁궐을 짓는 도중 황룡이 나타나자 사찰로 고쳐 짓고 황룡사(皇龍寺)라고 하였다. 566년 완공된 황룡사에는 인도 아소카왕이 이루지 못하였다고 하는 장륙존상을 주성하여 봉안하였고, 후일 거대한 9층탑을 건립하여 주변 나라들을 제압하기를 기원하였다. 황룡사는 신라 최대의 사찰로 호국을 기원하는 국가적 법회인 백고좌회가 열리는 곳이었다. 또한, 황룡사의 사주(寺主)는 국통으로서 불교계를 영도하는 역할을 하였다.73)이기백, 「황룡사와 그 창건」, 『신라 시대 국가 불교와 유교』, 한국연구원, 1978 : 『신라 사상사 연구』, 일조각, 1986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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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룡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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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룡사지 복원 상상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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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밖에도 진흥왕은 566년 기원사(祇園寺)와 실제사(實際寺)도 창건하였고,74)『삼국사기』 권4, 진흥왕 27년. 진평왕대에는 삼랑사(三郞寺)와 천주사(天柱寺)가 창건되었으며 선덕여왕대에는 분황사와 영묘사의 창건이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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