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11권 신앙과 사상으로 본 불교 전통의 흐름
  • 제2장 불교 사상의 확립과 일상의 신앙생활
  • 1. 불교 사상의 발달
  • 원효 사상
정병삼

원효는 신라 교학 연구의 기반 위에서 『기신론(起信論)』의 학설을 중심으로 당대의 사상적 과제이던 중관과 유식을 회통할 수 있는 이론 체계를 정립하고, 이를 바탕으로 분파 의식을 극복하는 이론을 전개하였다. 이는 당대의 사상적 과제를 해결하는 방대한 사상 체계를 이루어 낸 것으로써, 통일기의 신라 불교를 근원적인 입장에서 종합 정리하는 불교 이해의 기준을 확립한 것이었다.

원효는 삼국이 한강 유역을 중심으로 한반도의 쟁패권을 다투고 있던 617년(진평왕 39)에 최고 귀족인 진골보다는 낮은 귀족 가문에서 태어났다. 그의 승명이 원효(元曉)이고 출가하고 나서 그의 집을 절로 만들어 초개사(初開寺)라 한 사실은 그가 불교를 처음 열었다는 의미를 담고 있는 것으로서, 원효 불교에 대한 신라인들의 높은 평가를 실감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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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효는 10대 중반에 불문에 출가하였다. 그는 일정한 스승을 정해 배우거나 한곳에 머무름이 없이 여러 스승을 찾아다니며 다양한 교학을 섭렵하였다. 원효는 주로 교단 불교에서 활동하지 않고 마을에서 일반민과 어울리거나 산속에서 은둔 생활을 하던 이들과 교류하였다.

이즈음에 현장이 새로 번역 소개한 신유식은 신라에서도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원효는 후배인 의상과 함께 650년(진덕여왕 4)에 신유식을 배우고자 고구려를 통해 중국 유학을 시도하였으나 당시의 첨예한 삼국 관계 때문에 실패하였다. 대신에 의상과 함께 고구려의 보덕(普德)에게서 『열반경』 강의를 들음으로써 좀 더 진전된 불교 사상 을 수용할 수 있었다. 10년이 지난 661년(문무왕 1)에 원효는 또다시 의상과 함께 중국 유학길에 올랐다. 이번에는 바닷길을 택해 중국으로 건너가려 하였으나 도중에 머무르게 된 고분 속에서 “온 세상은 모두 마음뿐이요, 모든 이치는 모두 인식일 뿐이다(三界唯心 萬法唯識).”는 깨달음을 얻었다는 설화를 남긴 채, 중국에 건너간 의상과 달리 유학을 포기하고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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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효는 왕실의 지원을 받아 『금강삼매경론(金剛三昧經論)』을 저술하였다. 『금강삼매경』은 뇌종양에 걸린 왕비를 구하기 위해서 용궁에서 얻어와 대안(大安)이 경전을 순서대로 맞추었다는 설화가 전한다.

원효는 요석 공주와 결혼하여 교단에서 나왔지만 교화에 진력하였다. 동시에 그에 못지않게 노력한 것은 저술 작업을 통한 사상 체계의 확립이었다. 그가 남긴 많은 저술은 반야·유식과 법화·화엄·열반·계율·정토 등 거의 모든 분야를 망라하고 있다. 이 중에서도 원효가 가장 애써 이룬 저작은 『대승기신론소(大乘起信論疏)』와 『금강삼매경론』이다. 원효는 당시 가장 중요한 과제였던 공유의 집착과 편견의 적극적인 극복을 위해 각각 다른 견해가 존재할 수 있음을 인정하고 이들 견해 사이의 적극적인 회통을 위하여, 『기신론소』의 일심이문(一心二門) 이론과 『금강삼매경론』의 일미관행(一味觀行)의 실천 원리를 정립하였다.118)고익진, 앞의 책, 173∼236쪽.

그리고 671년(문무왕 11)에 저술한 『판비량론』은 논리학의 차원에서 중관과 유식의 논리가 같음을 논증하는 것으로, 공유의 화쟁을 이룰 수 있는 또 다른 준거였다. 이러한 이론 체계를 바탕으로 여러 경론의 차이점을 화회(和會)시키는 『십문화쟁론(十門和諍論)』을 저술하여 구체적인 분파 의식의 극복 이론을 전개하였다.

사회 기층에까지 불교를 전파한 원효의 정토 신앙은 치밀한 교리적 바탕 위에서 전개되었다. 원효는 미타 경전에 대한 여러 주석을 통해서 모든 중생이 불성을 가지고 있으므로 모두 성불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확인하였다. 그러나 중생은 자기 마음의 본질적인 평등성을 믿지 못하기 때문에 그 의심과 집착을 아미타불의 본원력에 의지해서 제거해야 함을 강조하였다. 정토에 왕생하겠다는 마음을 내는 발심(發心)과 아미타불의 이름을 부르는 칭명염불(稱名念佛)을 강조한 원효의 정토관은 일심에 의거한 것이었으며, 근기(根機)가 낮은 중생을 위해 서방 극락에 왕생하여 성불할 것을 강조한 대중 지향의 것이었다.

원효는 소승계를 범망계에 포섭 융회한 『범망경보살계본사기(梵網經菩薩戒本私記)』와 범망계와 유가계를 종합 융화시킨 『보살계본지범요기(菩薩戒本持犯要記)』를 지어 형식주의적인 소승 계율을 지양하고 정신주의적인 보살계를 강조하였다. 원효가 제시한 대승보살계 사상은 출가와 재가를 조화하는 범망계였다. 원효는 계의 판단 기준을 결과가 아닌 동기에 둠으로써 명리와 탐욕과 교만에 빠진 신라 불교계를 비판하고, 중생 구제를 위해서라면 계를 범해도 죄가 아니라 복이 된다는 적극적인 해석을 시도하여 수행자 개개인의 내면적 각성을 촉구하였다.

새로운 사상 정립과 교화에 큰 의의를 남긴 원효는 70세인 686년(신문왕 6)에 입적하였다. 의천의 『신편제종교장총록(新編諸宗敎藏總錄)』 등에 의하면 원효의 저술은 모두 90종에 가까운 200여 권의 방대한 분량이었음을 알 수 있으나, 현재는 23종만이 전해진다.

원효의 많은 저술에 인용된 전거를 살펴보면 유식 계통의 경론이 중요한 기반을 이루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것은 다른 경론과 대조하며 나타나는 차이점을 조화시키는 데 주력하였기 때문에 생긴 현상이었다. 그리고 당대 불교계의 지대한 과제였던 공과 유의 대립을 극복하기 위한 원효의 중심 사상 체계는 『대승기신론소』와 『금강삼매경론』을 통해 잘 드러난다.

원효는 여러 저술에서 중관과 유식의 편견에 빠진 교리를 비판하였다. 『기신론별기(起信論別記)』에서 원효는 “중관은 모든 집착을 깨뜨리고 깨뜨린 것 또한 깨뜨려서, 깨뜨리는 것과 깨뜨려지는 것을 다시 인정하지 않으므로 이는 보내기만 하고 두루 하지 못하는 논”이고, 이에 비해 “유식은 깊고 얕은 것을 두루 세워 법문을 판별하여, 스스로 세운 법을 모두 버리지 않으므로 이는 주기만 하고 빼앗지 못하는 논”이라고 비판하였다. 다른 저술에서도 이와 같은 비판은 자주 나타난다. 학도들은 이런 편견에 집착하지 말고 마음을 닦고 행동을 깨끗이 하며 바른 지혜를 체득해야 하므로 유와 무를 다 버리고 어디에도 의거함이 없는 실천이 이루어져야 하는 것임을 강조하였다.

이렇게 한쪽으로 치우친 중관과 유식과는 달리 『기신론』의 의미는 높이 평가하였다. 이는 “지혜롭고도 어질며 깊고도 넓어, 세우지 않음이 없으면서 스스로 버리고, 깨뜨리지 않음이 없으면서 다시 인정한다. 다시 인정한다는 것은 저 가는 것이 다하여 두루 세움을 나타내며, 스스로 버린다는 것은 이 주는 것이 다하여 빼앗음을 밝힌 것이다. 이것을 일러 모든 논의 근본이요 뭇 쟁론을 평정하는 주인이라고 해야 한다.”119)원효(元曉), 『대승기신론별기(大乘起信論別記)』 본(本),『한국 불교 전서(韓國佛敎全書)』 1─678상.는 것이다.

부정과 긍정을 각각 특징으로 하는 중관과 유식이 서로 대립 관계에 있다 해도, 중생의 마음을 대상으로 삼아 괴로움으로부터 벗어나게 한다는 데 목적을 두고 있는 점에서는 일치한다. 원효는 『기신론』이 이와 같은 중생의 마음이라는 공통점에서 출발하여 일심(一心) 이문(二門) 삼대(三大)의 사상으로 역동적으로 전개된다고 보았다.

원효 사상의 핵심은 일심이다. 모든 것은 사람의 마음에 기초하고 있고, 마음이 모든 존재의 근거라고 파악한다. 모든 현상 세계는 일심을 떠나서 생각할 수 없고 일심의 견지에서 포괄되고 설명될 수 있다. 그리고 일심은 본성이 있다거나 없다거나, 형상이 있다거나 없다는 모든 상대적인 차별을 떠나서 존재한다. 따라서 일심에서 보면 모든 것은 근원적인 점에서 평 등하고 차별이 없다.120)허남진 외, 『삼국과 통일신라의 불교 사상』, 서울대학교 출판부, 2005, 76∼77쪽. 『기신론』에서는 인간의 마음을 두 가지 측면에서 파악하여 하나는 마음의 있는 그대로의 본래적인 모습(心眞如)이고, 다른 하나는 마음의 움직이고 변화하는 측면(心生滅)이라고 한다. 두 문은 서로 떨어져 분리된 마음의 한 부분이 아니라 서로 융통하는 관계에 있는 완전한 전체이기 때문에 진여문은 진여문대로, 생멸문은 생멸문대로 일체법을 포섭하는 전체이다. 진여문은 변하지 않고(不變), 참되고 가치 있는(眞) 등의 특징을 지니고, 생멸문은 연에 따라 달라지고(隨緣), 거짓되고 가치 없는(俗) 등의 특징을 지닌다. 이렇게 다른 특징을 지니기 때문에 하나가 아니지만, 각각 모든 것을 포섭하는 한마음을 이루기 때문에 또한 둘이 아니다. 두 문은 일심의 경지에서 화합하고 통한다. 진여와 생멸의 근저에 일심이 있기 때문에 일심에서 보면 진여가 생멸이고 생멸이 진여이다.

원효 사상의 또 다른 특징은 화쟁이다. 화쟁은 다양한 불교 이론 사이의 다툼을 화해시키는 것이다. 원효는 각각의 견해가 갖는 의미에 대해 인정한다. 그러나 어떤 측면에서는 인정될 수 있지만 그것은 제한적이다. 그보다는 전체적인 관점에서 그 견해가 갖고 있는 의미와 한계를 올바르게 인식시켜 줌으로써 더 이상 자신의 견해에 집착하지 않도록 한다. 원효의 화쟁은 각각의 견해에 대한 올바른 평가를 설득력 있게 내려 주고, 자신의 견해가 지닌 한계와 의미를 명확하게 깨닫게 함으로써 그릇된 견해를 버리고 올바른 견해를 갖도록 하는 것이다.

『기신론』의 해석에서 조직된 원효의 여래장 사상은 『금강삼매경론』에서 그 실천 이론을 전개한다. 원효는 『금강삼매경』의 주제를 일미관행으로 보았다. 그리고 그 실천적인 관행이 의거하는 이론적인 원리를 일심 이문 삼대설과 일치시킨 것이 『금강삼매경론』이다. 일체의 법은 오로지 일심이며 일체의 중생은 하나의 본각이다. 원효는 한마음을 중심으로 융통무애한 화합을 이룰 수 있다는 『기신론소』에서 일심 이문 삼대설을 중관과 유식을 회통할 수 있는 이론 체계로 정립하고, 『금강삼매경론』에서 일미관행의 실 천 원리로써 사상 체계를 종합해 나간 것이다.121)남동신, 『원효(元曉)의 대중 교화(大衆敎化)와 사상 체계』, 서울대학교 박사학위논문, 1995, 128∼131쪽과 147∼152쪽.

당시 새롭게 대두하던 화엄 사상에 대해서도 원효는 저술을 남겼다. 내용이 전해지지 않는 『화엄경소』의 서문에서 밝힌 원효의 화엄관은 보법(普法) 사상이다. “걸림이 없는 법계법문(法界法門)이란 크지도 않고 작지도 않으며, 매우 급하지도 않고 유장하지도 않다. 움직이는 것도 아니고 움직이지 않는 것도 아니며, 하나도 아니며 전체도 아니다. 크지 않으므로 아주 조그만 극미가 되어도 남음이 없고, 작지 않으므로 무한히 큰 대허가 되어도 남음이 있다. 매우 급하지 않으므로 능히 삼세겁(三世劫)을 머금고, 유장하지 않으므로 몸을 들어 일찰나(一刹那)에 들어간다. 움직이지도 않고 정지해 있지도 않으므로 하나의 법이 일체의 법이요 일체의 법이 하나의 법이다. 이러한 걸림 없는 법이 법계법문의 묘술이니, 모든 보살이 들어갈 바요 삼세제불(三世諸佛)이 나올 바이다.”122)원효, 「진역화엄경소서(晋譯華嚴經疏序)」,『한국 불교 전서』 1─495상.

보법이란 일체법이 아무런 장애 없이 서로 드나들 수 있음을 말한다. 일체법이 하나의 티끌과 일체 세계의 대소(大小) 관계, 한없이 긴 시간인 삼세겁과 순간인 일찰나의 촉사(促奢) 관계, 그리고 움직임과 정지함, 하나와 많음의 관계의 모든 범주에서 아무런 걸림이 없는 『화엄경』의 세계를 말하는 것이다. 원효는 하나와 일체가 서로 걸림 없이 통하는 것을 보법이라 하고 이를 바탕으로 일심에 근거하여 일체행을 성립시켰다.

원효가 보법의 원리를 자세히 밝힌 『화엄경소』의 비유는 『기신론소』의 종체문(宗體文)과 같은 의의를 갖는다. 원효의 일심 사상은 『기신론소』에 의해 철학적 토대가 구축되어 『금강삼매경론』에 의해 실천성을 부여받았으며, 최종적으로 『화엄경소』에 의해 완성되었다. 이는 원효가 『기신론』 철학을 『화엄경』의 보법과 동일한 경지의 것으로 파악하였음을 말해 준다.

원효의 사교판(四敎判) 역시 그의 사상 체계를 잘 드러내 준다. 불교의 가르침을 일정한 기준에 따라 체계적으로 배열하여 가르침의 바른 의도를 밝히려는 것이 교판이다. 원효는 사교(四敎)를 먼저 삼승(三乘)과 일승(一乘) 으로 나누고, 삼승은 다시 법공의 유무를 기준으로 별교(別敎)와 통교(通敎)로 나누며, 일승은 보법을 기준으로 분교(分敎)와 만교(滿敎)로 나누었다. 삼승 별교에는 소승, 삼승 통교에는 『반야경』과 『해심밀경(解心密經)』을 배당하여 대승 교학의 양대 조류인 중관과 유식이 나란히 위치하도록 하였다. 일승 분교에는 대승보살계를 설하는 『범망경』과 『영락경(瓔珞經)』을 배당하고, 정점인 일승 만교에는 『화엄경』을 배당하였다. 중관과 유식의 병렬 배당은 공유의 화쟁을 위한 원효의 의도를 구현하는 것이며, 그 위에 대승 계율을 배치한 것은 실천적인 특성을 분명히 하고자 함이었다.123)남동신, 「원효의 교판론(敎判論)과 그 불교사적 위치」, 『한국사론』 20, 서울대학교 국사학과, 1988, 26∼28쪽. 사교판은 공유를 화쟁하는 교리와 실천적인 계율을 거쳐 원융무애한 화엄 사상을 증득하는 데로 나아가는 원효 교학의 체계를 잘 보여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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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엄경소』의 서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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