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11권 신앙과 사상으로 본 불교 전통의 흐름
  • 제2장 불교 사상의 확립과 일상의 신앙생활
  • 2. 신앙의 실천과 불교 대중화
  • 관음 신앙
정병삼

관음 신앙(觀音信仰)은 미타 신앙과 함께 중대에 가장 보편적으로 나타나는 신앙이다. 미타 신앙이 내세적인 데 비해 관음 신앙은 현세적이다. 『법화경』 보문품에는 중생이 물과 불 또는 악귀나 도적 등의 일곱 가지 어려움에 처하였거나 탐욕·성냄·어리석음의 삼독에 헤맬 때, 그리고 자식을 갖고자 하는 등의 온갖 현실적인 바람을 가졌을 때 일심으로 관세음보살을 부르면 관세음보살이 즉시 그 소리를 관찰하고 바라는 것을 모두 들어준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따라서 사람들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부딪히게 되는 갖가지 어려움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관음을 찾는 신앙은 절실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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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음고난구제도(觀音苦難救濟圖) 부분
관음고난구제도(觀音苦難救濟圖) 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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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신라 사회에 관음 신앙을 정착시키기 위하여 의상은 낙산사(洛山寺)에 관음의 진신이 직접 머무르며 설법을 하고 있다는 진신 상주(眞身常住) 신앙을 전개하였다.138)정병삼, 「통일신라 관음(觀音) 신앙」, 『한국사론』 8, 서울대학교 국사학과, 1982, 32∼53쪽. 남방 해안에 있는 보타락가산에 관음이 상주 설법한다는 『화엄경』의 내용에 따라 신라의 바닷가에 그 실재처를 마련한 것이다. 이는 앞서 자장이 오대산을 문수 도량으로 설정하였던 것과 같은 신라 불국토설의 연장에서 전개한 신앙이었다. 이를 통해 신앙인들은 신라 땅에 항상 머무르고 있다는 관음을 좀 더 현실감 있게 부르고 감응을 기대할 수 있었을 것이다.

경흥은 삼랑사에 있을 때 갑자기 병이 나서 한 달 동안이나 낫지 않았으나 남항사의 십일면관음이 나타나 춤 추는 것을 보고 웃다가 병이 나았다. 국선 부례랑(夫禮郞)은 북쪽 해안에서 납치되어 돌아올 길이 없었다. 양친이 백률사 관음이 영험이 있다는 소 문을 듣고 가서 기도하였더니 잃어버렸던 두 가지 보물과 낭도와 함께 살아서 돌아왔다. 나라에서는 이 소식을 듣고 백률사에 토지를 많이 내려 주고 부례랑을 대각간으로 삼았다. 장춘(長春)은 경덕왕 때 바다에서 장사를 하며 살았는데 어느 날 바다에 나간 지 오랜 시간이 지나도록 소식이 없었다. 그래서 모친인 보개가 민장사 관음에게 빌어서 중국에서 살아 돌아올 수 있었다. 경덕왕 때 눈먼 희명(希明)은 분황사 천수관음에게 눈을 뜨게 해 달라고 기도하여 광명을 얻었다. 낙산사의 장원을 관리하던 조신(調信)은 지방 유력자의 딸과 인연을 맺게 해 달라고 낙산사 관음에게 빌었으나 낭자가 다른 사람과 혼인하여 뜻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조신은 이를 원망하다가 잠이 들었는데 꿈속에서 바라던 바대로 인연을 맺어 살다가 나이 들어 헤어지는 것으로 끝맺었다. 꿈을 깨고 나서 덧없음을 깨닫고 세속의 모든 일을 버리고 집을 털어 정토사를 창건하여 수도하였다. 최은함(崔殷含)은 나이 오래도록 후사가 없어 중생사 관음에게 빈 끝에 아들 최승로를 낳았다. 그런데 아이를 얻던 그때 후백제의 견훤이 서울에 침공하여 갓난아이를 다시 관음상에 맡겨 놓고 피란 갔다 오니 그때까지도 잘 살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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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월관음도(水月觀音圖)
수월관음도(水月觀音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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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 같은 관음의 신앙 사례는 모두 현실 세계에서 겪게 되는 바람에 대한 관음의 대응을 말하고 있다. 이런 현실적인 성격 때문에 신라 사회에서 관음 신앙은 신분에 관계없이 고루 환영받았다.

현실 구제적 관음 신앙에는 변화 관음도 등장한다. 경흥의 병을 고쳐 준 것은 십일면관음이었고, 희명의 눈을 뜨게 해 준 것은 천수관음이었다.

이와는 달리 미타와 연관된 관음 신앙 사례가 있다. 문무왕 때 서방 왕생을 기약하며 수도하던 광덕(廣德)과 엄장(嚴莊)에게 관음이 분황사의 사비였던 광덕의 처의 모습으로 나타나 도를 이루는 것을 도와주었다. 백월산에서 수도하던 노힐부득(努肹夫得)과 달달박박(怛怛朴朴) 두 사람은 곧 아 기를 낳을 듯한 여인의 몸으로 나타난 관음의 시험을 거쳐 그 도움으로 미륵과 미타로 성도할 수 있었다. 이들 신앙 사례는 미타의 협시로서 서방 극락에의 왕생을 보좌하는 관음의 역할을 보여 주고 있다. 『관무량수경』에서 말하는 것처럼 왕생인이 임종할 때 아미타불을 따라 내영하는 관음에의 신앙을 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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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산사 홍련암 전경
낙산사 홍련암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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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인문(金仁問)은 태종무열왕의 둘째 아들로 통일전쟁기에 주로 당나라에 머물며 외교적 역할을 수행하였는데, 그가 귀국하기 어렵게 되자 사람들은 무사히 신라에 돌아오게 해 달라고 인용사에 관음 도량을 만들어 기원하였다. 그러나 돌아오지 못한 채 죽자 죽은 후에는 도량을 미타 도량으로 바꾸어 그의 극락왕생을 빌었다. 현실 구제적인 관음 신앙이 사후에는 극락정토를 기원하는 미타 신앙으로 바뀐 것이다.

현실 구제나 미타 협시와도 다른 것이 진신 상주 신앙이다. 의상이 지었다는 낙산사 관음이 그것이다. 여기에는 불국토 신앙의 정착이 중심이 되어 있지만, 동시에 구도적인 관음 신앙의 모습이 강하게 드러나 있다.

이처럼 신라 관음 신앙은 현실 구제 성격의 신앙이 주된 양상을 이루며 한편으로는 미타정토 왕생과 연결된 내세적 성격도 보인다. 시기적으로는 성덕왕대까지 상층 신분의 신앙 사례가 다수 확인되며, 8세기 이후에는 하층 신분의 신앙 사례가 더 많이 등장한다. 특히, 관음은 여러 형태의 여인으로 나타나 보이는데, 이는 친근성의 표현이자 대지신인 여신과의 연계를 생각하게 한다.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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