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11권 신앙과 사상으로 본 불교 전통의 흐름
  • 제3장 불교 사상과 신앙의 사회적 확대
  • 2. 불교 개혁의 시도와 좌절
  • 결사 불교의 퇴조와 배불 사상의 등장
  • 원나라의 간섭과 불교계의 친원화
최연식

무신 정권이 몽고와의 결사 항전을 주장하고 부처의 가호를 빌기 위하여 대장경 제작에 열의를 기울였지만 고려는 끝내 몽고에 굴복하지 않을 수 없었다. 고려가 항복한 직후 몽고는 국호를 원(元)으로 바꾸고 새로운 복속국이 된 고려를 자신들의 뜻대로 통치하기 시작하였다. 몽고와의 항전을 주도한 무신 정권은 원나라의 압력으로 붕괴되고 국왕 중심의 통치가 복구되었다. 하지만 실제로는 원나라에서 파견한 관료 및 원나라 지배층과 결탁한 세력이 정치를 주도하였고, 왕실도 스스로의 영향력을 유지하기 위하여 원나라 권력자의 의사를 따르지 않을 수 없었다. 고려의 국왕은 원나라에 의하여 언제든지 교체될 수 있었고 고려 왕실 내부에서는 왕위를 지키기 위하여 아버지와 아들이 서로 경쟁하면서 원나라 지배층의 후원을 얻기 위하여 노력하였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고려의 불교계도 원나라의 통치에 순응하는 형태로 변화되어 갔다.

고려 정부가 독자적인 정치 운영을 하지 못하고 부용국(附庸國) 체제에 맞춰 운영되었던 것처럼 불교계도 원나라에 복속된 모습을 보였다. 모든 법회 의식에서는 국왕과 왕실의 안녕을 축원하기에 앞서 원나라 황제와 황실의 안녕을 축원하였고, 주요 사찰은 기존 세력을 유지하기 위하여 원나라 황실과 귀족의 원찰이 되기를 자청하였다. 불교를 존숭하던 원나라에서 황실이나 귀족의 원찰로 지정되면 정치적 보호와 함께 경제적 후원을 얻을 수 있었다.

고려 불교의 오랜 전통인 담선 법회(談禪法會)도 원나라의 압력에 의하여 중단되었다. 태조 때에 시작된 담선 법회는 선 사상의 홍포와 함께 외침을 당하였을 때 이를 극복하는 의미를 띠고 국가적 규모로 행해져 왔는데, 충렬왕대 초기에 일부 친원파가 원나라 조정에 담선 법회를 원나라를 저주 하기 위한 행사라고 거짓으로 이야기하여 중지시켰던 것이다.191)『고려사』 권28, 충렬왕 4년 3월. 한편, 고려 불교의 최고 명예직인 국사라는 호칭도 원나라 국사 칭호와 중복을 피하기 위하여 국존(國尊) 혹은 국통(國統)으로 바뀌었다.

무신 집권기에 불교계의 개혁을 주도하였던 결사 불교도 성격이 변질되어 갔다. 최씨 정권하에서 불교계를 주도하였던 수선사는 원 간섭기에 들어서면서 원나라 황실의 비호를 받는 사찰로 성격이 변하였다. 원나라는 고려의 항복을 받은 직후 일본 정벌을 위한 군량미 축적을 명분으로 남해안 지역의 토지를 징발하였는데, 이로 인해 이 지역에 많은 토지를 가지고 있던 수선사는 어려운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당시 수선사 사주이던 충지(冲止, 1226∼1293)는 이러한 상황을 타개하기 위하여 수차례에 걸쳐 원나라 황제에게 탄원하였고, 토지를 되돌려 받은 후에는 감사의 편지를 올리고 수선사를 원나라 황실의 원찰로 지정해 달라고 부탁하였다.192)충지(冲止), 『해동조계제육세원감국사어록(海東曹溪第六世圓鑑國師語錄)』, 「상대원황제표─조계산수선사복전표(上大元皇帝表─曹溪山修禪社復田表)」, 「상대원황제사사복토전표(上大元皇帝謝賜復土田表)」. 강화도에 있던 수선사 계열의 선원사도 원나라 황실의 지원을 받아 세력을 유지하면서 황실의 안녕을 기원하는 사찰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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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각사 보각 국사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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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태종의 백련사는 원 간섭기에 들어와 연이어 국통을 배출하는 등 영향력이 확대되었지만 사상적 경향은 변질되었다. 충렬왕과 왕비인 제국 대장 공주(齊國大長公主)는 자신들의 원찰로 개경에 묘련사(妙蓮寺)를 창건하고 백련사 출신의 경의(景宜), 정오(丁午) 등을 초청하여 주석하게 하였다. 이후 묘련사는 원나라와 고려 지배층의 후원을 받으며 대표적인 사찰로 성장하였고, 경의와 정오에 이어서 친원 세력인 조인규(趙仁規) 집안 출신이 연이어 주지를 맡았다. 이들은 계보적으로는 백련사에 연결되었지만 백련 사에서 중요시한 법화참법이나 정토 신앙 등의 실천적 신앙의 전통은 단절되고 지배층을 위한 공덕 신앙과 왕실 및 원나라 황실의 안녕을 기원하는 법회가 주로 거행되었다. 백련사 출신으로서 이러한 경향에 비판적이었던 무기(無寄)는 지방에 머무르면서 당시 불교계의 경향에 대한 반성을 촉구하는 『석가여래행적송(釋迦如來行蹟頌)』을 지었지만 교단의 중심인물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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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각사 보각 국사 탑비의 비문 탁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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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사 불교가 변질되는 가운데 이 시기에 두드러진 활약을 보인 승려는 일연(一然, 1206∼1289)이다. 일연은 장산군(경산 지역) 출신으로 가지산문에서 출가한 후 22세에 승과에 합격하고 고향 근처의 비슬산(혹은 포산)에 있는 사찰의 주지를 역임하였다. 재조대장경 제작 사업이 한창일 때 정안의 초청을 받아 남해에 들어가 정림사에 주석하였는데, 이때 최우와 정안의 존숭을 받던 혜심 및 그 문도와도 교유하였다. 최씨 정권이 무너진 이후 왕실의 초청을 받아 강화도 선월사(禪月寺)에 주석하다가 김준(金俊)이 집권한 후 다시 비슬산 지역으로 돌아가 인홍사(仁弘社, 후의 인흥사(仁興社))를 개창하고 후학들을 교육하며 문헌 편찬에 몰두하였다. 노년에 국존으로 책봉되었고 구산(九山) 문도회를 개최하여 선종 승려들을 통합하려는 노력을 하였다. 스스로 지눌의 사상적 경향을 잇는다고 강조하였으며, 선종과 교종을 포괄하는 다양한 사상 내용을 정리하는데 주력하여 『중편조동오위(重編曹洞五位)』, 『조정사원(祖庭事苑)』, 『선문염송사원(禪門拈頌事苑)』, 『대장수지록(大藏須知錄)』, 『제승법수(諸乘法數)』, 『조파도(祖派圖)』 등을 편찬하였다. 또한, 불교를 중심으로 삼국시대의 역사적 일화들을 모은 『삼국유사(三國遺事)』를 저술하였다. 원 간섭기에 불교계가 정체성을 찾지 못할 때 사상적 기반을 확인하기 위하여 노력한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

한편, 무신 집권기에 위축되어 있던 법상종은 속리산사에 거주하던 혜영(惠永, 1228∼1294)이 원나라 황실이 주재하는 사경(寫經)에 참여하여 포상을 받고 돌아온 것을 계기로 다시 세력이 확대되었다. 고려의 사경 기술을 높게 평가한 원나라 황실에서 고려에 사경승을 요청하였을 때 혜영은 100여 명의 승려를 이끌고 가 금자대장경(金字大藏經)을 완성해 주고 돌아왔는데, 그 공로로 오교도승통에 임명되고 국존으로 봉해졌다. 이후 미수(彌授, 1238∼1327)는 충선왕에게 불교 교리를 강의하여 능력을 인정받은 것을 계기로 불교계를 주도하는 위치를 차지하였다. 오교도승통 및 양가도승통에 임명되어 교종과 선종을 통괄하는 최고 지위에 올랐으며 참회부(懺悔府)를 설치하여 승정에도 관여하였다. 한편, 해원(海圓, 1262∼1340)은 원나라 황실의 초청을 받고 중국으로 들어가 그곳에서 활약하였다. 화엄종에서는 고려 후기의 대표적인 성리학자 이제현(李齊賢)의 친형인 체원(體元)의 활동이 두드러진다. 그는 의상의 『백화도량발원문(百花道場發願文)』에 대한 해석서를 짓고, 『화엄경』에 기초한 관음 신앙을 실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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