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11권 신앙과 사상으로 본 불교 전통의 흐름
  • 제3장 불교 사상과 신앙의 사회적 확대
  • 2. 불교 개혁의 시도와 좌절
  • 결사 불교의 퇴조와 배불 사상의 등장
  • 간화선의 수용과 발전
최연식

원 간섭기에는 원나라와 고려 사이에 사람의 이동이 활발하였으므로 불교계에서도 서로 많은 영향을 주고받았다. 원 간섭기 초기에는 원나라 황실에서 신앙하던 티베트 불교가 고려에 유입되었다. 이 시기에 황제의 사신으로 고려에 들어온 인물 중에도 티베트 승려가 있었으므로 고려는 이들을 통하여 티베트 불교를 접하게 되었다. 또한, 원나라의 공주가 고려의 왕비가 된 이후에는 공주의 신앙과 관련하여 티베트 불교가 공주의 수행원과 고려에 거주하는 몽고 관인을 중심으로 신앙되었다. 고려 왕실에서도 충렬왕과 충선왕이 티베트 승려로부터 보살계를 받는 등 일정한 수용의 모습을 보여 주었다. 또한, 고려 출신의 사람들 중에 원나라에 들어가서 티베트 불교의 승려가 되는 사람도 있었다. 이들은 황실의 각별한 존숭을 받았으므로 고려에 있는 가족에게는 특별한 우대 조치가 베풀어졌다. 하지만 고려의 티베트 불교 수용은 황실에 대한 존중과 공주에 대한 배려의 성격이 강하였으며, 전체 불교계나 일반인에게 커다란 영향을 미쳤던 것으로는 보이지 않는다. 다만 원나라 황실을 축원하는 법회 의식 등을 통하여 티베트 불교의 의례, 불상, 불구(佛具) 등이 수용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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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동 대세지보살 좌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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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는 반대로 원나라의 수도 연경(燕京, 지금의 북경)에 고려인이 모여 살게 되면서 고려의 불교가 원나라에 소개되기도 하였다. 원나라에 거주한 고려인들은 티베트 불교보다는 전통적인 중국 불교의 신자가 되었으며 때로는 독자적으로 사찰을 세우고 고국에서의 신앙생활을 계속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신앙 활동은 원나라 고관과 결혼한 고려 여인이 중심이 되었으며 황제의 후궁이나 내시도 참여하였다. 고려인이 세운 사찰은 이후 고려에서 유학 온 승려의 활동 거점이 되기도 하였다. 이와 함께 고려의 왕위에서 물러나 원나라 조정에서 활약한 충선왕의 불교 후원 활동도 중국 불교계의 발전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충선왕은 황실의 대표로서 여러 종파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많은 승려를 후원하였다. 또한, 연경과 강남 지방의 주요 사찰에 대장경을 인출(印出)하여 시납(施納)하고,193)정문해(程文海) 찬, 「대경수사대장경비(大慶壽寺大藏經碑)」. 임제종의 고승 중봉 명본(中峰明本)과도 교유하였다.194)명본(明本) 『천목중봉화상광록(天目中峰和尙廣錄)』에는 충선왕과 관련된 「시중(示衆)」(권1 상), 「시해인거사심왕왕장」(示海印居士瀋王王璋)(권5 상), 「답심왕서(答瀋王書)」(권6), 「진제설(眞際說)」(권25) 등의 글이 수록되어 있다. 강남 지역을 순회할 적에는 의천이 유학하였던 항주의 혜인사(慧因寺)를 방문하고 토지를 기진(寄進)하여 중흥의 기반을 마련해 주기도 하였다.195)이저(李跪), 『옥잠산혜인고려화엄교사지(玉岑山慧因高麗華嚴敎寺志)』 권7, 「대공덕주심왕청소(大功德主瀋王請疏)」.

한편, 고려인을 통하여 고려의 불교 성지가 원나라 지배층에 알려져 특별한 존숭을 받기도 하였다. 특히, 법기보살(法起菩薩, 담무갈보살)의 상주처로 알려진 금강산은 특별한 존숭을 받아 원나라 황실과 고관의 불사가 계속 되었고, 다른 유명 사찰에도 원나라의 고관과 연경 거주 고려인의 후원이 적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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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래전도(蓬萊全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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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교류 과정에서 원나라 불교계의 사상도 수용되었는데 특히 몽산 덕이(蒙山德異, 1231∼1308?)와 지공(指空, 1235?∼1363)의 사상이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몽산 덕이는 중국 장시성(江西省) 출신으로 14세에 출가한 후 여러 선사를 찾아다니다가 32세 되던 해에 촉(蜀) 지방에서 환산 정응(皖山正凝)에게서 무자(無字) 화두를 받아 참구한 끝에 깨달음을 얻었다. 이후 소주(蘇州) 지방에서 교화를 펼쳐 명성을 얻었는데, 남송이 멸망한 후에는 원나라 조정의 출사 권유를 물리치고 소주 근처에 휴휴암(休休庵)을 짓고 은거하였다. 그는 자신이 깨달은 ‘무자 화두’를 위주로 하여 간화선의 교화를 펼치면서 동시에 경전의 강독을 중시하고 유교·도교와의 회통에도 관심을 기울였다. 간화선 수행을 강조하는 법어, 보설(普說) 등과 함께 『육조단경』을 새로 편찬하였으며, 『도덕경』에 주석을 붙이고 유교의 경전인 『주역』, 『서경』, 『중용』 등에 대하여도 독자적인 해석을 하였다.

고려 불교계가 몽산 덕이와 교류한 것은 1295년(충렬왕 21) 중국 강남 지방에 유학하였던 수선사 출신 원명(元明) 등이 몽산을 찾아가면서 시작되었다.196)덕이(德異), 『몽산화상보설(蒙山和尙普說)』 권3, 「원정이년병신사월단일고려국전라도수선사료암명장로청축찬부마고려국왕병신상갑보설(元貞二年丙申四月旦日高麗國全羅道修禪社了庵明長老請祝贊駙馬高麗國王丙申上甲普說)」. 이들의 소개로 이듬해에는 충렬왕을 수행하여 중국에 갔던 고려의 공주, 승려, 고위 관원이 휴휴암으로 몽산을 찾아가 가르침을 받고 귀국하였고, 이를 계기로 몽산의 사상이 고려 불교계에 널리 소개되었다.

특히, 당시 선종을 대표하던 혼구(混丘, 1251∼1322)와 만항(萬恒, 1259∼1315)이 몽산 덕이의 가르침을 존중하면서 몽산의 간화선 수행법이 고려 불교계에 점차 권위를 갖기 시작하였다. 일연의 제자로 내원당주(內願堂主)이던 혼구는 휴휴암에서 직접 가르침을 받고 귀국한 후 다시 몽산 덕이로부터 ‘무극설(無極說)’을 받고서 자신의 호를 무극으로 정하였다.197)이제현(李齊賢) 찬, 「자씨산영원사보감국사비(慈氏山瑩源寺寶鑑國師碑)」. 수선사 사주이던 만항 역시 몽산 덕이로부터 고담(古潭)이라는 호를 받았고,198)이제현 찬, 「수선사제십세혜감국사비(修禪社第十世慧鑑國師碑)」. 몽산 덕이가 편집한 『육조단경』을 수선사에서 간행하였다. 재가 신자인 이승휴(李承休)도 서신으로 몽산 덕이와 교류하였다.199)이승휴(李承休), 『동안거사집(動安居士集)』, 「상몽산화상사사법어(上蒙山和尙謝賜法語)」.

이후 고려에서는 몽산 덕이의 저술이 널리 읽혔고 특히 그가 법어에서 강조한 무자 화두의 수행법 및 깨달은 이후에 본분종사(本分宗師)를 찾아가 인가를 받는 것은 선 수행의 핵심적인 사항으로 받아들여졌다. 지눌이 처음 소개한 간화선법은 몽산 덕이의 영향하에 고려 불교계의 대표적 수행법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몽산 덕이가 입적한 후 제자인 철산 소경(鐵山紹瓊)이 고려를 방문하였을 때에는 왕실에서 일반인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열렬히 환영하였고, 고위 관원 중에 그를 따라 출가하는 사람도 있었다.200)1304년 수선사 사주 충감(冲鑑)의 초청으로 소경(紹瓊)이 고려에 들어오자 충렬왕은 숙창원비(淑昌院妃)와 함께 그로부터 보살계를 받았고, 최고 귀족 가문 출신인 김변(金賆)의 처 허씨도 그에게서 대승계를 받았다. 나아가 고위 관직을 역임한 권단(權㫜)은 그의 문하로 출가하기도 하였다. 한편, 소경은 이때에 강화도 보문사에 있던 고려판 대장경 한 질을 얻어가 중국의 대앙산사(大仰山寺)에 봉안하였다(민지(閔漬) 찬, 「고려국대장경이안기(高麗國大藏經移安記)」). 한편, 충선왕이 중봉 명본과 교류한 것을 계기로 중봉 명본의 문하에서 간화선을 배워온 사람도 있었지만201)명본 『천목중봉화상광록』 권4 상, 「시고려수추공소총오장로(示高麗收樞空昭聰五長老)」. 당시 고려 불교계에 미친 영향은 그다지 크지 않았다.

지공은 서역 출신으로 티베트를 통해 1324년 연경에 들어왔다. 그는 스스로 인도 출신으로 나란다사와 남인도에서 교학 불교와 선종을 모두 배웠으며 최상의 가르침인 무생(無生)의 법문을 중국에 전하기 위하여 왔다고 이야기하였다.202)이색(李穡) 찬, 「서천제납박타존자비(西天提納薄陀尊者碑)」. 그는 『무생계경(無生戒經)』이라는 새로운 경전과 가섭에서 자신까지의 108대에 이르는 독자적인 선종의 계보를 제시하며 자신의 권위를 주장하였지만 중국 불교계에서 크게 인정받지 못하였다. 하지만 연경의 고려인에게서는 적극적인 후원을 받을 수 있었다. 원나라 승상과 결혼한 고려 여인의 후원으로 법원사(法源寺)를 지어 머물렀으며 다른 고려인의 소개로 황실에 연결되기도 하였다. 이러한 인연으로 그는 1326년(충숙왕 13)부터 3년간 고려를 방문하여 고려 불교계에 큰 영향을 미쳤다. 반야 사상에 기초한 원칙적인 불교 사상과 술과 고기를 끊을 것을 강조한 금욕적인 계율관은 당시 불교계에 신선한 충격을 주었으며 여러 지역에서 설법과 함께 무생계를 주었을 때는 이를 받기 위하여 수많은 사람이 몰려들었다. 그는 중국에 돌아간 이후에도 고려 불교계와 긴밀하게 연결되었으며, 중국에 유학한 승려의 다수는 법원사로 그를 찾아가 가르침을 청하였다. 고려 불교와 맺은 긴밀한 관계로 인하여 그가 입적한 후 유골은 고려로 옮겨져 회암사에 봉안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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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암사지 지공 승탑과 석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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