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11권 신앙과 사상으로 본 불교 전통의 흐름
  • 제3장 불교 사상과 신앙의 사회적 확대
  • 3. 불교 사상과 신앙의 사회화
  • 불교 신앙의 실제 모습
  • 수륙재
강호선

수륙재는 물과 육지에서 떠도는 외로운 영혼과 아귀를 달래며 위로하기 위하여 불법(佛法)을 강설하고 음식을 베푸는 의식이다.253)안계현, 「불교 행사의 성행」, 『한국사』 6, 국사편찬위원회, 1975. 중국의 경우 양 무제(梁武帝)가 수륙법회를 처음 개최하였다고 하는데, 양 무제의 『자비도량참법(慈悲道場懺法)』과 당대(唐代) 밀교 의식의 하나로 망혼천도(亡魂遷度)를 위한 명도무차대재(冥途無遮大齋)가 결합하여 발전하였다. 송대에 이르러 황실과 민간에서 성행하기 시작하여 원나라 이후 조정에서 수륙법회를 매우 중요시하였으며, 민간에서도 극성하여 송대의 『수륙의문(水陸儀 文)』을 기초로 한층 체계화된 의문이 갖추어졌다고 한다.254)홍기룡, 「중국 원·명대 수륙법회도에 관한 고찰」, 『미술 사학 연구』 218, 한국 미술사 학회, 1998.

보통의 천도재는 망자 개인을 추천하기 위한 의식이지만 수륙재는 망자 한두 명뿐만 아니라 수륙을 떠도는 유정무정(有情無情)의 무주고혼(無主孤魂)을 천도하기 위한 의식으로 민심 수습 차원에서도 국가적으로 설행할 수 있는 불교 의식이었다. 이러한 수륙재의 특징은 조선 건국 후 고려시대에 국가적으로 설행되던 각종 불교 의식이 모두 금지된 속에서도 수륙재만큼은 국가의 후원을 받아 설행될 수 있었던 원인이었다.

수륙재가 우리나라에 이른 시기에 수용되었을 가능성은 매우 높다. 현전하는 가장 빠른 기록은 970년(광종 21) 갈양사(葛陽寺)에서 개최되었던 수륙 도량이다.255)심효섭, 「조선 전기 수륙재의 설행과 의례」, 『동국사학』 40, 동국사학회, 2004, 221쪽. 수륙재와 관련된 좀 더 구체적인 기록은 1090년(선종 7) 1월 보제사(普濟寺)의 수륙당(水陸堂)에 화재가 났다고 하는 『고려사』 기사이다.256)『고려사』 권10, 세가10, 선종 7년 정월 임진. 태사국사(太史局事) 최사겸(崔士謙)이 송나라에서 수륙재의 의식 절차를 정리한 『수륙의문』을 구해 와서 왕에게 수륙당을 세울 것을 청하여 공사를 하던 중 화재가 발생한 것이다. 건물을 세우던 중 화재가 났지만 적어도 이 시기에 수륙재를 올리는 독자적인 건물이 사찰에 있었고, 수륙재 설행과 관련된 의범(儀範)도 성립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 시기에는 송나라와 고려 간의 문물 교류가 확대되었고 불교 서적의 도입도 활발하였다. 당시 중국 사찰에는 이미 수륙당이 있는 경우가 확인되므로 송나라에서 유행하던 수륙재가 이 무렵 고려에 본격적으로 들어왔을 가능성도 있다. 그리고 『수륙의문』이 수입되고 수륙당 건립이 추진되던 선종대 이후 고려에서 수륙재가 본격적으로 설행되었을 가능성은 매우 높다. 특히, 『수륙의문』은 조선 건국 직후인 1394년(태조 3) 수륙재를 설행하면서 37본이나 간행하고 있어 고려시대 이후로 수륙재 설행의 전거가 되는 불교 의례집이었음에 틀림이 없다.

고려시대 수륙재 설행이나 수륙당의 모습을 알 수 있는 자료는 없으나 조선 초의 사례로 대략 유추할 수 있다. 1397년(태조 6) 「진관사수륙사조성기 (津寬寺水陸社造成記)」는 당시 상중하(上中下) 삼단(三壇)을 설치하였음을 보여 준다.257)권근(權近), 『양촌집(陽村集)』 권12, 「진관사수륙사조성기(津寬寺水陸社造成記)」.

한편, 선종대 이후로는 수륙재와 관련된 기록이 거의 나오지 않다가 원 간섭기 이후 자주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 수륙재는 고려 후기에 들어가면서부터 점차 유행하였던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그 이전에도 지속적으로 성행되었던 것만은 분명하며, 꼭 국가적 차원이 아니라 하더라도 개인적으로 또는 사찰에서 자체적으로 설행하였음도 확인된다.

『수륙의문』은 천태 사상에 입각하여 저술된 것이라 하는데, 고려의 경우 천책이 지은 『수륙재소(水陸齋疏)』가 전하는 것은 주목할 만한 일이다. 『수륙재소』에 따르면 처음에는 백련 도량(白蓮道場), 즉 백련사에서 설행하였고, 다음에는 만연정사(萬淵精舍)에서 설행하였으며, 삼(三)이라는 숫자를 맞추기 위해 조계(曹溪), 즉 수선사(修禪社)에서 다시 설행했다고 하였다.258)천책, 「수륙재소(水陸齋疏)」,『호산록(湖山錄)』 권하, 『한국 불교 전서』 6-205. 이를 통해 당시 백련 결사를 중심으로 수륙재가 설행되었다는 점과 수선사에서도 수륙재를 설행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수륙재는 원 간섭기에 들어서면서 더욱 활발하게 설행된다. 국사를 지낸 혼구(混丘)가 『신편수륙의문(新編水陸儀文)』을 지었다거나,259)심효섭, 앞의 글, 221쪽. 1348년(충목왕 4)에는 충목왕이 병이 나자 공주가 전 찬성사(前贊成事) 이군해(李君侅)를 보내어 천마산(天磨山)에서 수륙회를 설(設)하고 기도하였다고 한다. 공민왕대에도 설행된 기록이 전하는데 노국 대장 공주의 상(喪)에는 나옹이 국행수륙재를 행하면서 설법을 하였고,260)「국행수륙재기시육도보설(國行水陸齋起始六道普說)」, 『나옹화상어록(懶翁和尙語錄)』, 『한국 불교 전서』 6-717∼718. 공민왕의 상에서도 나옹의 주관하에 수륙재를 열었다.261)「갑인랍월십육일경효대왕수륙법회대영소참(甲寅臘月十六日敬孝大王水陸法會對靈小參)」, 『나옹화상어록』, 『한국 불교 전서』 6-723. 이것으로 보아 원 간섭기에 수륙재가 국가 의례로 자주 설행되었으며, 늦어도 공민왕대에는 왕실의 천도 의례의 하나로 자리 잡았음을 알 수 있다. 즉, 수륙재는 고혼(孤魂)을 천도하기 위한 불사로 고려 말에는 상기(喪期) 중에 개설하여 육도 중생과 망령(亡靈)을 위한 보설(普說)을 베푸는 형식으로 설행되었다. 이러한 상황은 일반 관료에게서도 확인된다. 이첨(李詹, 1345∼1405)이 다섯 살에 죽은 아들을 위해 아들의 기 일날에 수륙회를 설행하며 쓴 글에 의하면262)이첨, 「동자기일수륙재소(童子忌日水陸齋疏)」, 『동문선』 권111. 이첨은 무차 대회를 열었다고 한다. 그는 무차 대회를 통해 아들뿐만 아니라 다른 여러 영혼을 천도하려 한다고 하면서 호랑이에게 물려 죽거나 구덩이에 빠져 죽거나 길거리에서 죽은 영혼들 그리고 바람과 모레에 뒹구는 백골과 날짐승과 비늘 달린 짐승을 비롯한 모든 유정무정이 온갖 번뇌를 없애고, 원심(寃心)이 평등한 것을 깨달아서 보리(菩提)를 빨리 증득(證得)하기를 바라면서 마지막으로 죽은 어린 아들의 명복을 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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