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11권 신앙과 사상으로 본 불교 전통의 흐름
  • 제4장 유교 사회의 불교 전통 계승
  • 1. 조선시대 불교 정책의 시대적 추이
  • 억불 정책과 폐불
김용태

조선시대는 성리학을 기반으로 한 유교 사회였고 불교는 양반 사대부층의 주류 사회에서 배제되었다. 하지만 불교의 종교적 역할은 사라지지 않았고 왕실이나 민간에서 유지되었다. 윤회나 인과응보 등 불교의 사유 세계는 전통적 심성으로 자리 잡았다. 또한, 내세의 명복을 빌고 극락정토에 왕생하기를 기원하는 관념과 현실의 재액을 피하고 복을 추구하며 후세의 번성을 바라는 신앙 형태가 관습화되었다. 조선 전기에 억불(抑佛) 정책이 시행되어 공식적인 폐불(廢佛)의 단계에 이르렀고 그와 함께 유교적 제의(祭儀)와 사후 관념이 불교를 대체하였지만, 조선 말까지 불교의 종교성과 내세관은 없어지지 않았다. 이는 불교의 생명력이 이어져 고려 이래의 전통을 계승하여 토착화의 길을 밟아 왔음을 의미한다.

조선시대 불교 정책은 억불로 요약된다. 성리학을 기치에 내건 조선 정부와 유학자들은 불교를 이단으로 취급하였고 그 억제만이 정도를 바로 세우는 길이라고 믿었다. 국가 정책상으로도 연산군, 중종에 이르러 공식적 폐불이 단행되었다. 이는 불교의 존재를 부정하고 승려의 자격을 박탈하는 것이었고, 공인되지 못한 불교는 법제의 밖에서 스스로를 보전하여야 했다. 그렇다고 해서 불교가 외부적 강제에 의해 쇠퇴 일로를 치달은 끝에 결국 파국을 맞이한 것은 아니었다. 명종대에 일시적으로 양종(兩宗)과 승과(僧科)가 재개되었고, 이를 계기로 내실을 다진 불교계는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의승군(義僧軍)을 일으켜 국가의 위기 극복에 큰 공적을 쌓았다. 이후 불교는 사회적 효용성을 인정받으면서 사찰을 중건하고 교학과 수행에 힘썼으며 민간 신앙을 포섭하여 폭넓은 종교적 역할을 수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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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승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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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제종(臨濟宗)을 표방한 조선 후기의 불교 사상은 선(禪)과 교(敎)를 겸수(兼修)하고 염불과 같은 신앙을 수행 체계에 포섭하는 방향으로 전개되었다. 사찰은 비록 과중한 노동력 동원과 재정 부담을 감당해야 했지만 유교 사회에서 불교가 존립하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 출혈을 감수할 수밖에 없었다. 불교는 시대의 변화와 현실 상황에 민감하게 적응하였는데 법통(法統) 및 교육 과정의 정립, 교학의 중시, 의례집(儀禮集)의 간행 등에서 시대와 조우한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또한, 시문(詩文)을 매개로 한 유학자와 승려의 교류는 지성사적 측면에서 다양한 사상 조류를 형성하는 데 일조하였다.

원 간섭기 이후 고려는 토지 소유의 양극화, 민의 유랑과 노비의 급증 등 사회 경제적 문제가 심화되고 있었다. 사원도 예외는 아니어서 토지 겸병(土地兼倂)과 상업 등으로 막대한 부를 축적하였고 승려와 소속 노비의 수가 크게 늘었다. 이처럼 세금을 걷을 수 있는 수조지(收租地)가 줄고 역(役)을 담당하는 양인이 대거 승려가 되거나 노비로 전락한 상황은 국가의 재정 기반을 심각하게 위협하였다. 고려 말의 사회 경제적 모순과 정치적 혼란을 타개하기 위해서는 근본적인 개혁이 요구되었으며 그것을 뒷받침하는 새로운 이념적 지향이 필요하였다. 이러한 시대적 과제에 부응한 것이 바로 성리학이었다.

성리학은 원대에 과거의 시험 과목으로 채택되고 관학(官學)으로 공인된 직후 고려에서도 과거 시험에 반영되었다. 또 이제현, 이색 등이 원나라에 가서 유학자와 교류하고 성리학을 깊이 있게 접하면서 이들의 가르침을 받아 성리학적 소양을 갖춘 신진 사류(新進士類)가 성장하였다. 불교계 또한 태고 보우(太古普愚, 1301∼1382)나 나옹 혜근(懶翁惠勤, 1320∼1376) 등 선승들이 원나라의 중앙 불교계에서 활동하는 한편 임제종의 법맥을 전수받아 선의 기풍과 사상 면에서 새로운 변화를 추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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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륵사 보제존자 석종
신륵사 보제존자 석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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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정치적·사회적 과제를 불교를 통해 해결할 수 없었고 오히려 불교계는 경제적 비대화와 함께 도덕적 해이가 만연하였다. 이에 자구책을 마련하지 못한 채 현실에 안주하던 불교에 대한 비판과 개혁 요구가 끊임없이 제기되었다. 결국 이성계 일파와 신진 사대부가 힘을 합쳐 새로운 왕조를 개창하자는 혁신의 목소리가 정치 전면에 부각되었고 불교에 대한 억제 정책이 현실화되었다. 조선이 건국할 당시 사원 소유의 토지가 4, 5만 결이고 노비가 10만 명에 이르렀다고 하는데, 신생 왕조의 자립을 위해 사원의 토지 및 노비를 혁파하고 승도(僧徒)의 수를 줄이는 것은 당연한 조치였다.

고려 말 불교에 대한 비판 논의는 두 가지로 요약된다. 첫째, 교리나 불교 자체는 좋은 것이지만 승려의 윤리적 해이와 사찰의 경제적 비대화가 큰 폐해를 일으키므로 이를 바로잡아야 한다는 현실적 시각이다. 둘째, 불교는 정치에도 해악이 될 뿐더러 인륜을 부정하고 허망한 설로 속이는 이단이므 로 뿌리를 완전히 뽑아야 한다는 근본적인 부정이다. 이는 첫 번째와 같은 현실적이고 해결 가능한 문제의 범위를 넘어서는 인식론적 비판으로, 그 밑바탕에는 불교가 ‘오랑캐의 교(夷狄之敎)’라고 하는 전제가 깔려 있다. 주자의 성리학은 화이론(華夷論)으로 대변되는 정통론적(正統論的) 사고에 기반하고 있고 정도와 이단은 타협할 수 없는 것이었다. 불교는 중화가 아닌 오랑캐의 교였고 도를 달리하는 이단이었다. 더욱이 당시는 오랑캐로서 중원을 지배하였던 원나라가 망하고 한족 출신이 세운 명나라가 중화의 정통을 다시 이은 시기였다. 이러한 시대 배경은 주자학의 화이론적 정통 인식에 들어맞는 것이었고 불교에 대한 인식론적 비판의 칼날은 더욱 빛을 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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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학 자초 진영
무학 자초 진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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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조대에는 고려의 불교 정책을 그대로 답습하였다. 고려 태조와 마찬가지로 국가와 왕권의 토대를 확고히 다지기 위해 불교를 통해 민심을 안정시키려 한 것이다. 태조는 즉위 초에 이전 왕조의 전통대로 선승인 무학 자초(無學自超, 1327∼1405)를 왕사로 삼고 천태종 승려인 조구(祖丘)를 국사로 임명하였다. 하지만 이들은 조선시대에 공식적으로 임명된 처음이자 마지막 왕사이며 국사였다. 태조대에도 승려의 자격 요건을 강화하는 도첩제(度牒制)가 개국과 함께 시행되었는데, 승려가 되려면 경제적으로 큰 부담을 져야 했고 이는 승려 수의 증가를 억제하는 방안이었다. 조선 개국 직전에 실시된 전민(田民) 개혁으로 사원전과 사찰 노비가 한 번 축소되었기 때문에 그 이상의 경제적 제재나 억불 정책은 시행되지 않았다.

하지만 고려 말 성리학을 배워 과거에 합격한 경험이 있는 태종은 왕위 에 오르자 대대적인 불교 개혁을 단행하였다. 그 첫 단계로 1405년(태종 5) 국가가 지정한 사원을 제외하고 나머지 사찰에 속해 있는 전답과 노비를 환수하여 국가에 귀속시켰다. 『태종실록』 기사에는 당시 사원전 3, 4만 결과 노비 8만 명이 몰수되고 11종, 242사의 사찰만 공인된 것으로 나온다.279) 『태종실록』 권11, 태종 6년 3월 정사, 6년 4월 신유. 사원전 혁파와 사원 경제에 대해서는 김갑주, 「조선시대 사원 경제의 추이」, 『한국 불교사의 재조명』, 불교시대사, 1994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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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불당도(內佛堂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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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불당도(內佛堂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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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년 후에는 조계종(曹溪宗), 천태종(天台宗), 화엄종(華嚴宗), 자은종(慈恩宗), 중신종(中神宗), 총남종(摠南宗), 시흥종(始興宗)의 일곱 종으로 종단 수가 줄었다. 태종은 또 왕릉 옆에 사찰을 두는 능사(陵寺) 제도를 혁파한다고 하였지만 부왕 태조를 위해서 재궁(齋宮)으로 개경사(開慶寺)를 세웠다. 이후 세종과 세조대에 능침사(陵寢寺)가 몇 차례 창건되기는 하였지만, 이는 매우 이례적인 일이었다. 이러한 불교 억제책에 대해 조계종 승려 성민(省敏)은 신문고(申聞鼓)를 쳐서 부당함을 호소하였고, 또 명나라에 건너가 조선의 배불 정책을 고발하고 황제의 선처를 요구하는 승려들도 있었다. 세종 즉위 초에 명나라 황제가 권해 준 불교 가곡을 장려하고 사신을 영접할 때 승려에게 외도록 한 것은280)『태종실록』 권11, 태종 6년 2월 정해 ; 『세종실록』 권2, 세종 즉위년 12월 신축 ; 권6, 세종 1년 12월 경진. 명나라를 의식한 조치였다.

세종대는 집현전을 세워 학자를 양성하고 문물을 정비하여 왕조 국가의 문화적 토대를 닦은 시기였다. 1421년(세종 3)에는 훗날의 문종이 왕세자 로 책봉되었고 성균관에 입학하여 공자의 위패에 절하였다.281)『세종실록』 권14, 세종 3년 12월 갑인. 고려시대에 왕이 왕사나 국사에게 친히 절한 것과 비교하면, 조선의 왕세자가 공자에게 절하고 의례적인 사제 관계를 맺은 일은 불교에서 유교로 국교가 바뀌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 준다. 세종 또한 전왕대의 정책 기조를 그대로 이어 1424년(세종 6)에 일곱 개 종단 중 조계·천태·총남종을 선종으로 합치고 화엄·자은·중신·시흥종을 교종으로 묶었다. 즉, 선과 교의 양종으로 종단을 통합하였는데 각 18사씩 모두 36사의 사찰만을 공식적으로 인정하였다. 고려시대부터 불교를 관리하고 종단 업무를 총괄하던 국가 기관 승록사(僧錄司)는 이때 폐지되었고 대신 선종 도회소(都會所)로 흥천사(興天寺), 교종 도회소로 흥덕사(興德寺)가 지정되었다. 공식 사원전도 태종대에 1만 1,000여 결이었던 것이 선종 4,200여 결, 교종 3,700결로 줄어들었고 승려 수도 선종 1,950명, 교종 1,800명으로 한정되었다.282)高橋亨, 『李朝佛敎』, 寶文館, 1929, 115∼163쪽. 양종으로의 통합은 승과 정원을 감소시켰고 또 시험 과목도 선과 교로 압축되었다. 또한, 양종 사찰을 제외한 도성 내의 절이 철폐되었고 승도의 도성 출입을 제한하였다. 그러나 세종도 집권 후반에는 ‘조종(祖宗)이 남기신 뜻’을 내세워 적극적으로 불사를 벌였고 불교 행사를 후원하였다. 대표적으로 흥천사의 사리탑각을 재건하였고 즉위 초에 혁파한 궁궐 안의 내불당(內佛堂)을 다시 세우는 등 숭불적(崇佛的) 성향이 표면화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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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조 어진
세조 어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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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종 이후 불교 정책의 기조는 바뀌지 않았지만, 세조가 즉위하면서 한때 숭불의 시대가 일시 도래하였다. 세조는 즉위 이전부터 불교를 믿었지만 즉위 후 더욱 불교 신앙에 경도되어 친불 시책을 펼쳤다. 여기에는 불교 후원을 통해 지지 기반을 확보하고 왕권을 강화하려는 의도도 개재되었을 것이다. 그리하여 도성 안의 원각사(圓覺寺)를 비롯하여 전국의 많은 사찰이 중창, 보수되었고 일부 사찰에는 대규모 토지 기부와 잡역 감면의 혜택을 내리기도 하였다. 또한, 관속(官屬)과 유생이 사찰에 무단으로 침입하는 것을 금지하였고 죄지은 승려를 신문할 때도 먼저 국왕의 허가를 받아야 했다. 한편, 이미 승려가 된 자에 대해서는 도첩의 유무를 따지지 않아서 무자격 승려가 급증하였다. 세조대에 간경도감(刊經都監)을 설치하여 불전을 언해하고 간행한 것은 문화사적으로 큰 의미가 있다. 그러나 이때의 친불 시책과 불교 옹호는 유학자의 반감을 사기에 충분하였고 세조 사후에 억불 정책이 더욱 강화되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예종은 전대에 문란해진 도승법(度僧法)을 엄격히 시행하게 하였지만 재위 기간이 짧았다. 성종대부터 본격적인 억불 정책이 시행되었는데, 이는 사림이 중앙 정계로 진출하기 시작한 것과 때를 같이한다. 1471년(성종 2)에는 간경도감을 폐지하였고 이듬해에는 도첩의 발급을 중단하고 도첩이 없는 승려를 환속시켜 군역(軍役)에 충당하였다. 당시 국가의 공역(公役)과 조세를 피해 승려가 된 이들이 매우 많아서 사회 문제가 되었는데, 일각에서는 사찰 수 1만, 승려 수 10만이라는 과장된 수치를 내세워 사찰을 모두 없애고 승려를 전부 환속시켜야 한다는 주장까지 제기하였다. 성종은 “이단은 치지도외(置之度外)하고 믿지 않으면 된다. 승려 또한 백성이므로 모두 없앨 수는 없고 선왕이 창건한 절도 일시에 철거할 수 없다.”고 하여283)『성종실록』 권114, 성종 11년 2월 신유. 완전 혁파는 유보하였다. 성종대에 도첩 발급이 일시 중단되었지만 양종과 승과가 유지되었다는 점에서 정책상의 폐불 단계는 아직 아니었다.

또 성종 초에 반포된 『경국대전(經國大典)』에는 정포 30필을 내고 승려가 되는 도승법, 양종 및 승과 시험 규정, 사찰의 신규 창건 금지 등 불교 정책이 법제화되었다.284)『경국대전(經國大典)』, 예전(禮典), 도승(度僧). 이는 세조대에 입안된 내용을 기초로 수정을 약간한 것인데 승려 자격과 공인 사찰을 법적으로 보장받았다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다. 그렇지만 제한적 수준에 그쳤고 더구나 이후 법적 효력을 상실하거 나 조항이 아예 폐기되어 법제상으로나 실제 정책에서 불교의 존립 기반은 점차 약화되었다.

성종의 뒤를 이은 연산군은 반정(反正)에 의해 폐위되었을 정도로 왕도 정치와는 거리가 먼 군주였다. 불교도 이 시기에 폐불의 위기를 맞이하게 된다. 연산군은 “불교가 흥하면 공도(孔道)가 쇠하고 국가가 망한다.”고 하는 숭유억불의 인식을 드러내었다.285)『연산군일기』 권14, 연산군 2년 4월 무자. 하지만 인수 대비가 독실한 불교 신자였던 관계로 연산군 초기에는 본격적인 척불이 단행되지 않았다. 오히려 즉위 초에 성종을 위한 수륙재(水陸齋)를 진관사(津寬寺) 등에서 열었고 성종의 선릉(宣陵) 근처에 새로 봉은사(奉恩寺)를 창건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인수 대비가 성종대의 억불 정책을 버리고 세조대의 불교 정책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유훈을 남긴 채 세상을 떠난 후 연산군은 그와 반대의 길을 걸었다. 1504년(연산군 10)에는 성균관을 훼철하여 유흥 공간으로 만들면서 공자상(孔子像)을 원각사, 장악원(掌樂院)으로 이전하였고 흥천사와 흥덕사에 있던 선종과 교종 도회소를 철폐하였다. 또 원각사를 비우고 그곳에 기생들을 거주하게 하였다. 이때 도성 내의 사찰은 큰 피해를 입었고 선·교종 도회소가 과천의 청계사(淸溪寺)로 옮겨간 후 승과 또한 더 이상 실시되지 않았다.286)高橋亨, 앞의 책, 244∼256쪽. 양종 및 승과의 혁파는 연산군이 즉위한 이래 줄곧 제기된 문제였는데, 같은 해에 갑자사화(甲子士禍)가 일어나는 과정에서 성균관과 함께 갑자기 철폐된 것이다. 또 승도를 환속시켜 천역에 종사하게 하고 사원전을 혁파하라는 조치도 내렸지만 반정에 의해 연산군이 폐위되면서 지속적으로 시행되지 못하였다.

연산군대의 폐불은 원칙에 따라 준비된 시책이 아니었고 폭정이 야기한 즉흥적이고 우발적인 결과로 이해된다. 하지만 이 시기는 조선시대 불교사의 전개에서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다. 태종과 성종대의 억불 정책에도 불구하고 존립 기반을 완전히 상실하지 않았던 불교계는 이때 결정적인 타격을 입었고 공식적 폐불의 단계로 접어들었다.

반정으로 즉위한 중종은 실추된 왕권을 바로 세우고 민심을 다잡을 필요가 있었다. 즉위 초 ‘조종(祖宗)의 유교(遺敎)’를 내세워 왕실과 관련된 수륙사와 능침사의 몰수 전답 반액을 돌려주었고 연산군 때 폐사가 된 서울의 비구니 절 정업원(淨業院)을 다시 세우게 하였다. 비록 무산되었지만 정현 왕후는 양종 재흥의 전지를 내리기도 하였다. 그러나 연산군대에 이미 폐불 단계로 접어든 상황이 쉽게 호전되지는 않았다. 1507년(중종 2)에는 법제에 있는 식년(式年) 승과를 실시해야 했음에도 시행하지 않았고, 1512년(중종 7)에는 혁파된 사찰의 전답을 향교(鄕校)에 소속하게 하였다. 또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에 기재된 사찰 외에 절의 창건을 금하게 하였고 1516년(중종 11)에는 왕실의 기신재(忌晨齋)가 폐지되었다.287)高橋亨, 앞의 책, 270∼299쪽. 무엇보다도 같은 해에 『경국대전』의 도승조(度僧條)가 삭제된 것은 승려의 자격을 법적으로 인정하지 않는 것으로 마침내 폐불의 종지부를 찍는 일이었다. 이때는 조광조(趙光祖, 1482∼1519)로 대표되는 기묘 사림이 급진적인 개혁 방안을 내세워 공론을 주도한 시기로 이단인 불교는 이제 존폐의 위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사찰 및 승려 수의 제한과 억제, 토지와 노비의 축소는 불교의 세력 및 경제 기반을 약화시키는 억불 정책이지만, 양종과 승과의 폐기, 도승제의 법적 불인정은 불교와 승려 신분을 제도적으로 인정하지 않는 공식적 폐불이었다. 당시 승려들이 머리를 기르고 환속하여 절에 승려가 없게 되었다는 후대의 기록, 조선 전기 선종의 사법(嗣法) 계보가 이 시기에 사실상 단절된 것 등은 폐불의 실상을 보여 주는 사례이다. 하지만 이렇게 막대한 피해를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실제로 사찰이나 승려가 모두 없어진 것은 아니었다. 중종대 후반에는 법적으로 인정받지 못하는 승도의 증가가 다시 문제가 되었는데, 이에 대규모 역사에 승려를 동원하고 그 대가로 호패(號牌)를 지급하였다. 이미 도승조가 철폐된 상태였기 때문에 도첩 대신 호패를 지급한 것으로 피역(避役) 노동력을 적극 활용하려는 공리적(功利的) 시책의 전형이다.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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