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12권 역사 속 외교 선물과 명품의 세계
  • 제1장 외교 선물 교환과 사회 풍속
  • 2. 외교 선물 교환과 문화 교류
  • 술 문화의 교류
정성일

선물은 입을 것에서 먹을거리, 볼거리 등 종류가 매우 다양하다. 특히 음식과 관련된 것일수록 문화적 특성이 가장 잘 반영되어 있다. 흔히 음식은 우리 인간에게 생명을 지속할 수 있는 매체로서의 중요성을 지니고 있다고 한다. 즉, 현실적으로 인간의 섭취 행동은 사회·경제·종교·관습 등의 영향을 받아들여 형성되고 있다. 그러므로 음식을 섭취하는 행동을 생물적 자극에 대한 반응으로,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문화적 자극에 대한 반응으로 인식하는 것이다. 식사 행위를 생물적 욕구와 사회적·문화적 욕구의 양면을 충족시키는 행위라고 규정을 짓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36)문수재·손경희, 『식생활과 문화』, 신광출판사, 2001, 11쪽.

여기에서는 서로 다른 문화를 가진 두 나라 사람들이 술이라고 하는 음식을 통해서 문화의 이질성을 체험하는 과정을 소개하고자 한다. 시기는 임진왜란 이후 조선과 일본이 국교를 수립하여 평화적인 교류를 재개하였던 17세기 이후이다. 공간은 두 나라 사람들이 접촉하는 왜관이다. 조선은 임진·정유왜란 이후 국교가 회복되고 양국 관계가 안정을 되찾아 가자 일본에 대한 정책의 틀을 조금씩 바꾸기 시작하였다. 그 과정에서 생겨난 것이 이른바 초량 왜관(草梁倭館)이었다. 지금의 부산광역시 용두산 공원 일대에 해당하는 곳에 왜관을 설치하여 대마도에서 건너온 관리와 상인이 거주하도록 하였다. 따라서 일본인들이 거주하는 왜관은 조선과 일본의 문화가 만나는 접점이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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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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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초 일본인들만 거주하도록 만들어진 왜관은 조선 정부의 의도와 달리 많은 조선인이 왜관에 드나들게 되었다. 양국의 외교 현안을 해결하기 위하여 조선의 역관(譯官)들은 왜관을 방문해야만 하였다. 왜관에서 이루어지는 무역에 참가하기 위하여 그곳을 드나들지 않을 수 없었던 조선의 상인들도 있었다. 왜관에 들어가서 일이 금방 끝나는 경우도 있지만, 많은 시간이 소요되는 일도 있었다. 심지어 하루를 넘기는 일도 종종 있었다. 그러다 보면 왜관에 들어간 조선 사람들에게 식사를 대접하는 상황도 벌어진다. 경우에 따라서는 아예 왜관 안에서 잔치를 베푸는 때도 있었다. 예나 지금 이나 사람들이 만나는 자리에는 으레 술이 있기 마련이고 왜관에서도 예외는 아니었다.

나라마다 주법(酒法)이 다른 오늘날이나 당시에도 큰 차이는 없었을 것이다. 예를 들면, 중국이나 일본 사람들은 술잔을 돌려 마시지 않으며 상대방 술잔에 술이 남아 있어도 계속 따라 주는 것이 예의이다. 이에 반해 우리나라 사람들은 술잔을 돌려 마시는 습관이 있으며 잔에 술이 남아 있으면 그것을 완전히 비우기 전까지는 첨잔(添盞)을 하지 않는 것이 예의이다.37)김숙희 외, 『식생활의 문화적 이해』, 신광출판사, 1998, 309쪽. 조선시대에 일본에 갔던 통신사들이 남긴 기행문을 보면 당시 일본의 다른 주도 문화를 엿볼 수 있다. 1636년(인조 14) 통신사행에 부사로 다녀온 김세렴(金世濂)은 『해사록』에서 “(일본인들은) 손님과 술을 마실 때는 그 첩을 불러내어 권하게 하는데, 함께 같은 잔으로 마시기까지 한다.”고 적고 있다.38)『국역 해행총재』 4, 민족문화추진회, 1975, 168쪽. 그러한 일본인의 모습이 그의 눈에는 매우 생소하게 비쳤던 모양이다. 아마 당시에도 이러한 주법의 차이는 존재하였을 것이며, 서로 다른 문화가 접촉하는 왜관과 같은 곳에서는 문화의 차이 때문에 크고 작은 마찰도 있었을 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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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메노모리 호슈 초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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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신사행렬도 중의 아메노모리 호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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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술을 권하고 마시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상대방에게 술을 선물하 는 것도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이다. 아메노모리 호슈(雨森芳洲, 1688∼1755)도 조선의 황주(黃酒)·소주(燒酒)·청주(淸酒) 등 여러 종류의 술을 선물로 받았다고 하였다.39)다시로 가즈이, 정성일 옮김, 『왜관』, 논형, 2005, 211쪽. 이 가운데 황주는 ‘황금주(黃金酒)’를 말하는데 술 색깔이 금색을 띠고 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흰 쌀가루로 죽을 만든 다음, 그것을 누룩과 함께 넣어 둔다. 여름철에는 3일 동안, 겨울철에는 7일 정도 지나면 만들 수 있다고 한다. 조선의 술은 기본적으로 소주·탁주·청주 등 세 가지로 되어 있다. 거기에 여러 가지 과일이나 꽃, 약재 등을 첨가하여 독특한 술을 제조하기도 한다. 어느 것이든 속성주가 많아서 그다지 오랜 기간 동안 재워 두지는 않는다. 이러한 조선의 술이 초량 왜관에서 생활하고 있던 일본의 대마도 사람들에게도 선물로 제공되고 있었던 것이다.40)다시로 가즈이, 정성일 옮김, 앞의 책, 211∼212쪽.

일본에 간 조선의 통신사들에게도 술이 제공되었다. 김세렴의 『해사록』을 보면 일본의 술 문화에 대한 흥미로운 기록이 남아 있다. 일본에서는 술을 집집마다 빚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술집에서 산다고 적고 있다. 조선에서는 가양주(家釀酒)라 하여 집에서도 술을 빚었는데, 같은 시기 일본에서는 집에서 술을 빚지 않고 술집에서 사다 먹었던 것이다. 이것이 통신사들의 눈에는 매우 신기하였던 모양이다.41)김세렴(金世濂), 『해사록(海槎錄)』, 『국역 해행총재』 4, 민족문화추진회, 1975, 166쪽 ; 남용익(南龍翼), 『문견별록(聞見別錄)』, 『국역 해행총재』 6, 민족문화추진회, 1975, 92쪽. 또 일본에서는 제백(諸白)을 가장 명주(名酒)로 꼽고 있다고 소개하고 있다. 흰쌀로 만든 누룩을 흰 쌀밥에 섞어 만든 술인데, ‘모두 백미를 사용하여 만들었다’는 의미로 제백(모로하쿠)이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다는 설명을 덧붙이고 있다.42)김세렴, 『해사록』, 『국역 해행총재』 4, 민족문화추진회, 1975, 166쪽.

일본에서도 중세까지는 우리나라의 막걸리에 해당하는 도부로쿠(濁酒)라는 탁주가 중심을 이루고 있었다. 그러던 것이 이른바 근세 초기에 들어오면서 술의 대혁명이 일어났다. 오늘날 니혼슈(日本酒)라고 불리는 일본의 청주(淸酒)가 그때 탄생한 것이다. 일본 청주(니혼슈)의 술맛 비결은 흰쌀을 충분히 사용하는 데 있었다. 먼저 흰쌀을 발효시켜 만든 누룩(白麴, 바라코지)을 흰 쌀밥과 함께 섞는다. 김세렴이 기록하고 있듯이 모두 백미를 사용 하여 만든 술을 가리켜 일본에서는 제백이라고 부르는데, 품질이 우수한 술이라는 뜻도 가지고 있다고 한다.43)다시로 가즈이, 정성일 옮김, 앞의 책, 214쪽.

조선의 통신사들이 그 다음으로 꼽은 일본의 명주는 인동주(忍冬酒)·복분주(覆盆酒)·연주(練酒)·소주(燒酒)·남만주(南蠻酒)·유구주(琉球酒) 등이다. 일본인들이 조선의 사신에게 대접하는 술 중에 인동주가 많이 등장한다. 예를 들면, 1711년(숙종 37) 통신사행에 참가한 일행은 8월 23일에 축전수(筑前守)로부터, 9월 1일에 장문수(長門守)로부터 각각 인동주 한 병씩을 선물 받았다. 그것을 일행의 모든 사람이 두어 잔씩 나누어 마셨는데 술맛이 매우 좋아 천하의 좋은 술이라면서 칭찬하고 감탄하지 않은 자가 없었다고 한다.44)임수간(任守幹), 『동사일기(東槎日記)』, 『국역 해행총재』 9, 민족문화추진회, 1977, 182∼183쪽, 185쪽. 추운 겨울을 이겨 낸다는 인동초의 이미지가 이 술과 직접 관련이 있는지는 확인되지 않지만, 소주를 기본으로 인동초와 인삼을 함께 섞어 만든 술로 맛이 달고 좋으면서도 독하다는 것이 당시 통신사들의 평가였다.45)저자 미상, 『계미동사일기(癸未東槎日記)』, 『국역 해행총재』 5, 민족문화추진회, 1975, 247쪽 ; 남용익, 『부상록(扶桑錄)』, 『국역 해행총재』 5, 민족문화추진회, 1975, 416쪽. 가마가리(蒲刈)에서 통신사에게 대접한 삼원(三原)의 명주와 인동주에 대해서도 평판이 좋았다.46)辛基秀, 『朝鮮通信使の旅日記 ソウルから江戶 「誠信の道」 を訪ねて』, PHP新書, 2002, 84쪽.

1643년(인조 21) 통신사행에 부사로 참가하였던 조경(趙絅)은 일행이 에도에서 머물고 있던 어느 날 인동주를 마시고 취기가 오르자 다음과 같은 아름다운 시를 읊었다.47)조경(趙絅), 『동사록(東槎錄)』, 『국역 해행총재』 5, 민족문화추진회, 1975, 72∼73쪽.

한 잔 인동술에

이제 나는 곧 얼큰하였소

늙은 눈에 불꽃이 어지러워

평상에서 잠시 잠이 들었네

바다가 넓다고 뉘 말하는가

한양 하늘을 꿈에 갔었네

깨어나 허전히 웃음 웃노니

만하에 아직 배를 매었네.

인동주 한 잔을 마시고 잠시 잠을 청하여 꿈속에서나마 한양으로 달려가고 싶어하는 통신사의 절절한 마음이 와 닿는 시이다.

또한 복분주는 복분자, 즉 산딸기 열매로 담근 술로 여겨진다. 최근 우리나라에서 전통주로 인기를 모으고 있는 술이 에도 시대 일본에서도 명주로 꼽히고 있었다는 사실이 매우 흥미롭다. 이 밖에 소주가 있었으나 남만(南蠻)에서 나는 수입산을 좋은 것으로 쳤다. 그러나 술을 담아 둔 나무통에서 나는 냄새가 통신사들에게는 꽤 언짢았던 모양이다.48)남용익, 『문견별록』, 『국역 해행총재』 6, 민족문화추진회, 1975, 92쪽 ; 임수간, 『동사일기』, 『국역 해행총재』 9, 민족문화추진회, 1977, 275쪽. 그러한 이유로 1711년(숙종 37) 통신사행에 부사로 다녀온 임수간(任守幹)은 일본 술이 우리나라 술보다 못하다는 평가를 내리기도 하였다.49)임수간, 『동사일기』, 『국역 해행총재』 9, 민족문화추진회, 1977, 275쪽.

소주는 원래 원나라 때 처음 만들어졌다고 알려져 있다. 영국의 니덤(Joseph Needham) 박사는 중국에서 증류주가 보이기 시작하는 것은 5세기 무렵 남북조 시대로 거슬러 올라가는데 중앙아시아의 진상품에서 비롯되었다고 보고 있다. 그러나 남북조나 당송시대의 각종 기록에는 이에 관한 언급이 전혀 없다. 중국 내에서의 소주 제조는 송나라 이후로 추정할 뿐이다. 소주는 불과 같은 성질을 가지고 있으며 불을 붙이면 타오른다 하여 화주(火酒)라고도 불렀으며, 증류한 액체가 마치 땀방울 같다 하여 한주(汗酒)라고도 하였다. 원나라에 이르러 서역과 중앙아시아에서 대량으로 중원에 반입되면서 비로소 이러한 제조법이 보편화되었을 것이다. 그 기술이 우리나라와 일본에 전해진 것은 그 뒤의 일로 여겨진다.50)허만즈, 김하림·한종완 옮김, 『중국의 술 문화』, 에디터, 2004, 62∼67쪽.

1719년(숙종 45)에 제술관으로 다녀온 신유한(申維翰)의 『해유록(海遊錄)』은 통신사 일행이 남긴 일본 기행문 가운데 가장 객관적인 저술의 하나로 평가받고 있다. 그 글에 술에 관한 설명이 남아 있다.

일본의 술집에서 가장 유명한 술은 상매(桑梅)·인동(忍冬)·복분(覆盆)·제백(諸白) 등인데 색깔이 붉고 푸른빛을 띠었다. 그 밖에 영주(霙酒)는 눈과 같고 연주(練酒)는 비단 빛깔 같으며 마양(麻釀)은 옥 빛깔 같은데 모두 특수한 품질이었다.51)『국역 해행총재』 1, 민족문화추진회, 1974, 480쪽.

일본 사람들은 밥 먹은 다음에 청주를 마시고, 그런 다음 과일을 먹으며, 과일을 먹은 뒤에 차를 마시고 자리를 끝낸다. 술은 제백주를 상품으로 삼는다고 한다. 매주(梅酒)·상주(桑酒)·인동주·복분주는 맛이 아름답고 향기가 강렬하며, 연주는 조선의 이화주(梨花酒) 같다.52)『국역 해행총재』 2, 민족문화추진회, 1974, 39∼40쪽.

일본의 연주와 비슷하다고 하는 조선의 이화주는 왜관의 일본인들에게도 명주로 알려진 술이었다. 대마도의 조선어 통역이었던 오다 이쿠고로(小田幾五郞)는 『상서기문(象胥紀聞)』에서 “조선의 최고급 술은 일년주(一年酒)인데, 그 밖에 이화주·방문주(方文酒)와 같은 술도 있다.”고 소개한 바 있다.53)다시로 가즈이, 정성일 옮김, 앞의 책, 2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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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관도 중의 동관 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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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당시 왜관의 일본인들은 자극적으로 느껴지는 조선의 술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던 듯하다. 지금도 한국인과 일본인이 함께 술을 마시면 문화 차이를 느낄 때가 많다. 사람마다 차이는 있겠지만 대체로 우리나라 사람들이 독한 술을 좋아하는 데 반하여 일본 사람들은 술을 물이나 과일 주스에 희석하여 마신다. 요즘도 일본인들은 소주나 위스키 등 독한 술을 마실 때에는 찬물이나 더운물을 섞어서 마신다. 찬물을 섞어 마시는 것을 일본어로 ‘미즈와리’라 하고, 더운물로 섞어 마시는 것을 ‘오유와리’라고 부른다. 그런데 소주에 찬물이나 더운물을 타서 마시는 우리나라 사람은 거의 없지 않을까? 이렇듯 과거에도 한국인은 독한 술을, 일본인은 순한 술을 더 좋아하였던 것이다.

그래서인지 조선시대 사람들도 일본 술을 최고로 치지는 않았던 것 같다. 일본 술은 ‘꿀물과 같은 맛’이라고 표현한 것을 보면, 아마도 술을 마시고 난 뒤의 느낌이 달콤하게 느껴졌던 듯싶다. ‘독한 것을 제일’로 치는 조선의 기호를 생각하면, 일본 술은 뭔가 조금 부족한 느낌이 들었을지도 모른다.54)다시로 가즈이, 정성일 옮김, 앞의 책, 215쪽.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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