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12권 역사 속 외교 선물과 명품의 세계
  • 제1장 외교 선물 교환과 사회 풍속
  • 2. 외교 선물 교환과 문화 교류
  • 육식 문화의 교류
정성일

인류의 오랜 역사를 통해서 볼 때 대부분의 민족이 섭취해 온 육류나 그 밖의 동물성 식품은 소량에 지나지 않았다. 전 세계에서 가장 인구가 많은 중국의 전통 식단에도 고기와 달걀은 소량 들어 있었으며 유제품은 거의 없었다. 고대 중국에서 달걀은 다른 식물성 식품보다 훨씬 비쌌기 때문에 중국 인구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농부들이 스스로 먹으려고 남겨 두는 것은 아주 소량이었다. 이러한 비축물(備蓄物)은 대개 중요한 행사나 특별 접대용으로 쓰였다. 이처럼 중국에서는 명절이나 다른 축제 기간이 아니면 고기 먹을 기회가 매우 드물었다.55)프레데릭 J. 시문스, 김병화 옮김, 『이 고기는 먹지 마라?-육식 터부의 문화사-』, 돌베개, 2004, 15쪽. 우리의 전통 사회에서도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보통 사람들에게 쇠고기는 한 해에 한두 번 먹는 특별 메뉴였다. 그만큼 고기는 귀한 먹을거리였으며, 지금도 명절 때마다 선물 교환의 중요 대상인 것이다.

반대로 육류 섭취를 거부하는 채식주의자도 있었다. 채식주의의 중심지인 인도 사람들은 힌두교와 불교 등 종교적 이유로 육류를 먹지 않았다. 인도 안에서 가장 엄격하게 불살생주의(不殺生主義) 원리와 채식주의를 실천하는 세력은 힌두교나 불교가 아니라 자이나교이다. 자이나교는 부처와 같은 시대 사람인 바르다마나(Vardhamāna, 기원전 549∼479년, 나중에 마하비라Mahāvīra로 개칭)가 창시한 종교로 철저한 고행을 통한 해탈을 추구하며, 살생·도둑질·음행·망언·소유의 거부를 강령으로 삼는다. 자이나교도는 꿀을 불결한 것으로 간주하여 먹지도 않을뿐더러 남에게 주지도 않는다. 그 이유는 야생 꿀을 딸 때 벌을 죽이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그들은 해가 떠 있는 동안에만 식사를 하며 벌레가 들어 있을 가능성이 많은 과일에는 손도 대지 않는다. 힌두교에서 채식을 중요하게 여기는 까닭은 고기와 피는 살생을 해야 얻을 수 있는 것이므로 본질적으로 불결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행동이 비정상적으로 보일지도 모르지만, 이것은 깊은 사색을 거친 종교적 견해에서 도출된 것이다.56)프레데릭 J. 시문스, 김병화 옮김, 앞의 책, 17∼20쪽.

인도에서 채식주의가 강조되는 것은 종교적 이유 외에 자연환경 때문인지도 모른다. 인도는 무더운 기후 특성상 질병의 위험성에 노출되어 있어 위생적이고 깔끔한 생활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래서 그들은 모든 음식을 깨끗한 것과 깨끗하지 않은 것으로 나누는데, 고기나 술은 깨끗하지 않은 것으로 분류하고 있다. 인도인들은 식사 전후에 손을 씻고 양치질을 한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밥을 먹고 나서 숭늉을 마시는데, 그때 물을 한 모금 머금고 입을 헹구다가 꿀꺽 삼키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렇지만 인도 사람들은 입 안을 헹군 물이 우리의 숭늉과 같은 것이라 하더라도 뱉는다. 이처럼 위생과 청결을 매우 중시하지 않으면 안 되는 생활환경이 인도인의 식습관이나 식문화에도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보인다.

현재 우리나라 사람들은 대부분 극단적인 육식주의자도 채식주의자도 아니다. 오히려 잡식주의자라고 해야 옳을지도 모른다. 오늘날의 일본인들도 이 점에서는 우리와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런데 이른바 근대 이전에는 상황이 달랐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고기를 즐겨 먹은 반면에 일본인들은 육식, 특히 네 발 달린 짐승의 고기를 먹지 않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나가사키(長崎)에 와서 무역을 하고 있던 포르투갈과 네덜란드 사람들을 통해서 17세기에 이미 서양의 육식 문화가 일본 사회에 들어왔지만 널리 전파되지는 못하였다. 일본인들이 육식을 하기 시작한 것은 메이지 유신(明治維新) 이 후라고 한다. 그 전에는 일본에서 일반인들이 고기를 먹지 못하도록 법으로 금지되어 있었는데, 서양인들이 일본에 거주하기 시작하면서 이 법이 폐지되었다는 것이다.

근대 이전 일본에서 육식이 법으로 금지되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일시적으로 허용된 때가 있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조선의 통신사가 일본을 방문할 때였다. 일본은 조선에서 건너온 사신들을 극진하게 접대하였다. 통신사 빙례(聘禮)는 쇼군의 권력 기반을 강화하기 위하여 고안된 바쿠후의 고도의 정치 행사이기도 하였다. 그래서 바쿠후는 각지의 영주에게 통신사에 대한 접대를 성대하게 하도록 지시를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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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신사 향응 식단표(饗應食單表)
통신사 향응 식단표(饗應食單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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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신사 접대 찬상도(接待饌床圖)
통신사 접대 찬상도(接待饌床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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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에서 통신사를 접대할 때 가장 신경을 썼던 것 중의 하나가 맛있는 음식을 제공하는 일이었다. 조선에 대한 정보가 매우 부족하였던 에도 시대에 통신사에게 맛있는 음식을 대접하기란 쉽지 않았다. 당시에는 일반인들이 해외에 도항할 수도 없었고 외국인을 보거나 만나기도 무척 어려웠기 때문에, 우선 조선인들이 무엇을 가장 좋아하는지 일본인들은 알 수 없었다. 이때 가장 돋보이는 활약을 한 것이 바로 대마도였다. 대마도는 지리적으로 조선과 가까울 뿐만 아니라, 역사적으로도 일본의 다른 지역에 비하여 가장 교류가 많은 곳이었다. 교통의 요충지이자 정보·지식의 집적지 역할을 한 곳이기도 하였다. 통신사 접대 임무를 부여받은 일본의 각 영주들은 대마도에 특별히 부탁하여 조선과 조선인에 관한 정보의 제공을 요청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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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류를 요리하는 주방
육류를 요리하는 주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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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를 들면, 히로시마(廣島) 지역에서는 대마도의 도움을 받아 조선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것을 적은 목록을 입수하였다. 그것을 토대로 히로시마에서는 나가사키를 통하여 돼지를 조달받았다. 1711년에 작성된 한 자료에는 통신사 일행이 가장 좋아한다고 알려진 쇠고기와 소 내장으로 음식을 만드는 조리법이 상세하게 소개되어 있을 정도이다. 또한 김치 만드는 방법에 대해서도 정성스럽게 기록을 남기고 있다. 오늘날 한일 문화 교류의 상징처럼 부각되고 있는 육식 문화와 김치의 교류가 일본 열도의 서쪽 끝에서 동쪽으로 통신사가 왕복하였던 길을 따라서 전파되고 있었던 것이다.57)辛基秀, 앞의 책, 76∼78쪽.

또한 대마도에 의뢰하여 작성되었을 것으로 짐작되는 『조선인호물지각(朝鮮人好物之覺)』에는 조선인들이 좋아하는 것을 소, 멧돼지, 사슴, 돼지, 닭, 꿩, 오리, 달걀, 도미, 전복, 대구 ……의 차례로 나열하고 있다.58)辛基秀, 앞의 책, 82∼83쪽.

이것을 보면 당시 조선인들은 쇠고기를 비롯한 육류를 가장 좋아하고 생선은 상대적으로 덜 즐겼던 것을 추측할 수 있다. 1764년(영조 40) 에도까지 간 마지막 통신사행의 정사로 다녀온 조엄의 『해사일기』에서도 이를 확인할 수 있다.59)『국역 해행총재』 7, 민족문화추진회, 1975, 152∼153쪽. 정월 23일 통신사 일행이 오사카 성에 머무르고 있을 때, 통신사 앞으로 고기가 전달된다. “기이주(紀伊州) 태수 원종장(源宗將)이 소금에 절인 고래고기 30포와 소금에 절인 사슴고기 20포를 통신사 앞으로 보내왔다. 1포는 10조(條)이고 1조는 한 근이 넘는 고기이다.”라고 되어 있는 것을 보면, 이날 고래고기와 사슴고기가 통신사에게 선물로 전달된 모양이다.

당시 대부분의 사람들이 육식을 하지 않고 있던 일본에서 수백 명의 통신사 일행이 먹을 고기를 어떻게 한꺼번에 조달할 수 있었을까? 필요한 고기의 수량이 만만치 않았을 터인데 당시로서는 이것을 제때에 공급하는 일이 결코 쉽지 않았을 것이 분명하다. 그래서인지 시모가마가리(下蒲刈)라는 곳에서는 통신사의 방문 일정이 결정되면 반년 전부터 미리 경작용 소를 육식용으로 길러서 제공하였으며, 돼지우리와 개집을 만들어서 돼지와 개를 길렀다고 한다. 조선에서는 옛날부터 개고기를 중요하게 다루어 왔다는 것을 알고 특별히 식용으로 내놓기 위해서였다고 한다.60)辛基秀, 앞의 책, 82∼83쪽.

그렇다면 당시 일본인들은 육식을 하지 않았을까? 일본에서는 메이지 유신 이후 육식 금지법이 폐지되기 전까지 원칙적으로는 육식을 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에도 시대 초기 사슴이나 멧돼지의 육식이 약(藥)으로 유행하였다. 이것은 통신사에게 접대할 음식을 장만하기 위해서 따라다녔던 일본의 고기 요리 담당자들로부터 크게 자극을 받은 것이 틀림없다. 예를 들어, 히코네(彦根) 지역에서는 그곳 특산인 오미(近江) 쇠고기를 된장에 넣어 두거나 말려서 만든 육포를 쇼군이나 바쿠후의 고관, 그리고 다이묘(大名)들에게 선물하는 전통이 이어져 오고 있다.61)辛基秀, 앞의 책, 83∼84쪽. 이것을 보면 근대 이전 일본에서 육식이 전혀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다만, 일반인들에게는 여전히 육식 금지법이 유효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렇듯 사신의 왕래와 외교 선물의 교환을 통하여 서로 다른 음식 문화의 교류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다른 나라에 가서 색다른 술맛을 보고 그것을 자기 나라 술과 비교하는 일은 애주가에게는 더없이 좋은 기회였다. 조선에서 온 통신사들에게 접대할 요리를 준비하면서 지글지글 익으며 코를 찌르는 쇠고기의 냄새와 달콤한 맛을 기억하고 있던 일본인들이 각지에 한두 명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들은 통신사가 돌아간 뒤에도 계속해서 그 요리를 즐겼을 터이다. 이러한 개인의 경험이 오랫동안 축적되어 그 지역의 풍습을 만들고, 그것이 국가적으로 결집되어 하나의 문화를 만들어 가는 과정을 우리는 근대 이전 한국과 일본의 외교 관계를 통하여 확인하였다. 통신사의 길이, 곧 술 문화와 육식 문화 교류의 길이기도 하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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