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12권 역사 속 외교 선물과 명품의 세계
  • 제2장 천 년을 넘기는 한지
  • 1. 닥나무로 만든 한지
  • 제지 기술의 전래
김덕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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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호리 1호분의 껴묻거리 바구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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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언제부터 종이를 사용하였을까? 결정적인 증거는 없지만, 문자·붓·먹과의 관계 속에서 기원을 찾아야 할 것이다. 단군 때부터 신지, 신지에서 발전한 가림토라는 우리 문자가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문자의 본격적인 사용은 한자의 전래와 함께 시작하였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한자는 중국에서 기원전 4세기경에 고조선에 들어왔고, 백제의 경우 2세기 말이면 한자 사용이 보편화되었을 것이라고 추측한다. 또한 기원전 1세기 무렵에 만든 가야 고분(창원 다호리)에서 붓이 발견된 점으로 보아 적어도 2세기 무렵이면 종이를 사용할 수 있는 준비는 갖추어져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실제 저(楮)라는 한자의 어원이나 낙랑의 고분 유적을 통해 2∼3세기에 종이가 사용되었을 것이라고 주장하는 학자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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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악 3호분의 종이 든 신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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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악 3호분의 종이 든 신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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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고구려에서는 국초에 『유기(留記)』라는 역사책을 편찬하였고, 372년(소수림왕 2)에 수도에 태학(太學)이라는 국립대학을 설립하였을 뿐만 아니라, 사학 기관인 경당(扃堂)도 있어 유교 경전이나 중국 문학서를 교육시켰다. 특히 고구려인은 『구당서(舊唐書)』에 “풍속이 서적을 사랑하여 미천한 신분의 사람까지도 각각 거리에 큰 집을 짓고 경당이라 하여 자제들이 결혼 전에 밤낮으로 여기서 글을 읽고 활쏘기를 익힌다.”72)과학 백과사전 종합 출판사, 『조선 기술 발전사』 2, 백산자료원, 1994, 182쪽 재인용.고 기록될 정도로 서적을 매우 좋아하였다.

이로 보아 고구려에서는 적어도 4세기 무렵에 종이를 본격적으로 사용하였을 것으로 여겨진다. 4세기경에 축조된 황해도 안악 3호분 벽화에 왕에게 보고하는 신하가 글이 새겨진 종이 뭉치를 들고 있는 그림이 있다. 실제 이 무렵의 것으로 추정되는, 평양의 대동강변과 대성산 국사봉 유적에서 출토된 삼으로 만든 종이가 오늘날까지 전하고 있는데, 섬유질의 상태나 지면의 색깔을 보면 제조 기술이 상당한 수준에 이르렀음을 알 수 있다.

백제에서는 375년(근구수왕 1)에 고흥(高興)이 역사책 『서기(書記)』를 발간하고, 4세기 중엽에 왕인(王仁)이 『논어(論語)』 10권과 『천자문(千字文)』 1권을 일본에 가지고 갔다. 따라서 학교에서 교육을 시키려면 책이 필요했을 것이고, 책을 발간하려면 종이가 필요했을 것은 추측하기 어렵지 않 다. 따라서 적어도 4세기에는 종이가 우리나라에 전래되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때에 중국에서 불교가 들어왔기 때문에 그와 관련하여 종이 수요가 증가하였을 가능성이 크다. 372년(소수림왕 2)에 고구려는 전진(前秦)의 순도(順道)를 통해 불교를 받아들였고, 384년(침류왕 1)에 동진(東晋)의 마라난타(摩羅難陀)가 백제에 불교를 전하였는데, 불교를 수용하게 되자 불경(佛經)을 발간하는 데 필요한 종이의 수요가 증가할 수밖에 없었다. 중동이나 유럽에서도 확인되듯이 신흥 종교의 유입이나 포교(布敎)의 필요에 따라 인쇄술이 크게 발달하였다. 중동에 전파된 종이는 코란을 적는 데 이용되었고, 유럽에 전래된 양피지는 성경(聖經)을 적는 데 이용되었다. 독일의 구텐베르크(Johannes Gutenberg)가 금속 활자를 발명하여 제일 먼저 찍어 낸 것도 성경이었다. 이러한 종교와 인쇄술의 관계는 우리의 경우에도 예외일 수 없다.

6∼7세기에 이르러 삼국의 제지술이 크게 발전한 듯하다. 많은 백제인이 일본에 유학 서적과 불교 서적 및 각종 기술을 전한 것으로 보아 짐작할 수 있다. 『일본서기(日本書紀)』에 의하면, 고구려의 승려 담징(曇徵)은 호류사(法隆寺)의 금당 벽화를 그린 것 외에도 601년에 오경(五經)과 종이·먹·맷돌 제조 기술까지 일본에 전해 주었다.73)『일본서기(日本書紀)』 권22, 추고(推古) 18년 3월. 고구려의 선진 제지 기술이 일본에 전해져 일본 문화의 발달에 크게 기여하였던 것이다. 경주 불국사 석가탑에서 나온 『무구정광대다라니경(無垢淨光大陀羅尼經)』, 일본 나라(奈良) 시 쇼소인(正倉院)에서 발견된 신라 민정 문서(民政文書)가 1000년 이상 보존되고 있는 것은 종이의 품질이 우수하다는 사실을 증명한다.

12세기에 이르러서야 종이를 쓰기 시작한 유럽은 우리보다 800년 정도 늦은 편이다. 양피지를 쓰고 있던 유럽은 종이라는 새로운 기록 매체를 접하기까지 상당히 오랜 시간을 기다려야 하였다. 751년 탈라스 전투에서 패하여 포로가 된 당나라 기술자의 제지술이 사마르칸트에 전래되었고, 이어 서 중동 이슬람 지역으로 퍼져 나갔다. 제지술은 중동에서 북아프리카로 전파되었고, 북아프리카에서 다시 유럽으로 전파되었는데, 이슬람권의 영향을 받아 유럽에서 가장 먼저 제지 공장을 설립한 나라는 스페인(1151년)이다. 이어 십자군 원정(1189년) 때 포로가 된 프랑스인이 터키에서 제지술을 배워 옴으로써 유럽이 비로소 근대 사회로 발전하는 전환점을 마련하게 하였다.

상권이 가장 활발히 발전하던 이탈리아(1276년)와 독일(1312년)을 거쳐 네덜란드(1428년), 영국(1492년)에 차례로 제지 공장이 설립되었다. 14∼15세기에 종이를 만드는 기술이 유럽 전역에 퍼진 것이다. 미국에는 1690년에 최초의 종이 공장이 설립되었고, 러시아를 비롯한 스칸디나비아 국가에는 비교적 늦은 16∼17세기 말에야 종이가 전래되었다. 그러고 보면 종이가 보급된 순서는 중세 이후 경제가 이동하는 흐름과 일맥상통한다. 종이의 기나긴 여행이 1500년이나 지속되었던 것이다.

당시 유럽에서는 수력을 이용한 제지 공장을 강가나 하천 등지에 건설하였다. 넝마가 주된 원료였던 만큼 공장은 하천을 오염시키는 원인으로 시비가 끊이지 않았지만, 증가하는 수요를 감당하기 위하여 가동을 중단할 수는 없었다. 독일은 종이의 생산과 함께 목판 인쇄(14세기), 금속 인쇄(15세기)를 발전시켰고, 이탈리아는 15세기에 르네상스를 일으켰다. 인쇄술의 발명을 가능하게 했던 것은 종이의 전래였고, 인쇄술의 발전은 학문 연구를 촉진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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