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12권 역사 속 외교 선물과 명품의 세계
  • 제2장 천 년을 넘기는 한지
  • 2. 한지의 명품과 명산지
  • 한지의 명품들
김덕진

우리나라에 제지술이 전래된 시기는 4세기 무렵이지만, 제지술이 크게 발전한 시기는 600년 정도 지난 고려시대로 이때부터 우리 종이는 명품으로 알려지기 시작하였다. 여러 종류의 우리 종이 가운데 해외에 명품으로 소문난 것은 따로 있었다. 그 중에서 신라의 명품 종이였던 ‘계림지(鷄林紙)’가 가장 먼저 알려진 것으로 보인다.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이나 ‘민정 문서’가 우리나라와 일본에서 1000년 이상 썩지 않고 보존되어 온 것은 그만큼 신라 종이의 품질이 뛰어나다는 것을 증명해 준다. 신라에 솔거·정화·홍계라는 유명한 화가가 있었고, 김생·김인문이라는 뛰어난 서예가가 있었던 것도 우수한 품질의 종이와 관련 있을 것이다.

송나라 때 도곡(陶穀, 903∼970)이 지은 『청이록(淸異錄)』에는 700년(신라 효소왕 2)에 일본 사신이 중국에 가져온 서찰에 부드러운 거울 면에 비교할 수 있다는 계림지가 언급되어 있다. 북송(北宋)의 유명한 서화가(書畵家)인 미불(米芾, 1051∼1107)도 계림지라는 종이에 글씨를 써서 벗에게 보냈다 하니,87)한치윤, 『해동역사』 권27, 물산지, 지. 신라의 명품 계림지가 중국 명사들의 입에 종종 오르내리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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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구정광대다라니경』
『무구정광대다라니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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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의 명품 종이는 신라 때와는 다른 이름으로 불렸다. 한치윤(韓致奫, 1765∼1814)의 『해동역사(海東繹史)』에 따르면, 송나라의 손목이 『계림지(鷄林志)』에서 고려의 닥종이를 빛나고 희고 아름다워 백추지(白硾紙)라고 불렀다 한다. 또 1015년(현종 6)에 송나라에 파견된 고려 사신 곽원은 고려의 특산으로 용수자리, 등자리, 족제비 꼬리, 백추지가 있다고 하였다.88)池田溫, 「신라·고려시대 동아(東亞) 지역 지장(紙張)의 국제 유통에 관하여」, 『대동문화연구』 23, 성균관대학교 대동문화연구원, 1989, 192쪽. 곽원은 1015년 11월에 송나라에 갔다가 다음해 정월에 돌아왔다(『고려사절요』). 『송사(宋史)』에도 고려의 특산으로 백추지가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것이 바로 고려의 명품 종이였던 것이다.

고려의 명품 종이로 중국에까지 명성을 날린 것으로 견지(繭紙)가 있다. 명나라 때의 책인 『고반여사(考槃餘事)』에 “고려 종이는 누에고치로 만들어 비단처럼 희고 질기며, 글을 쓰면 먹을 잘 받아들여 사랑스럽다. 이것은 중국에서 생산되지 않는 진품이다.”89)한치윤, 『해동역사』 권27, 물산지, 지.고 기록되어 있다. 1488년(성종 19)에 명나라 사신으로 우리나라를 다녀간 동월(董越)이 지은 『조선부(朝鮮賦)』에는 “옛날에는 조선에서 나는 종이는 누에고치로 만든 것이라고 전하였지만, 지금 와서 비로소 닥나무로 만드는 줄을 알았다. 다만 그 만든 솜씨가 교묘할 뿐이다. 나는 일찍이 불로 시험해 보고 그런 줄 알고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따라서 닥나무로 만들었지만 누에고치(비단)로 만든 것처럼 희고 부드러워 중국인들이 견지라고 불렀음을 알 수 있다.

견지의 품질에 대해 이규경은 『오주연문장전산고』에서 “오직 닥나무만 사용하는 우리의 옛 견지는 천하제일로 비단처럼 단단하고 두텁고 부드럽고 미끄럽다.”고 하였다. 이러한 고려 견지를 중국인들은 최상품으로 꼽아 귀하게 여겼는데, 한치윤이 인용한 중국의 『객연잡기(客燕雜記)』라는 책에 “지금 (중국의) 대궐 안에서 쓰는 종이를 고려의 견지라 한다.”고 할 정도로, 고려 견지는 중국 상류층에서 널리 사용되고 있었다.

또 다른 고려의 명품 종이로 명표지(名表紙)가 있다. 이 종이는 전주에서 생산되었는데, 지방관들이 명표지를 거두어들여 권세 있고 지위가 높은 자들에게 뇌물로 보내고 있어 전주 주민이 제조하느라 고통을 받고 있다는 기록이 『고려사』 「열전」90)『고려사』 권105, 열전(列傳)18, 정가신(鄭可臣).에 보일 정도로 명표지는 품질이 우수하여 당시에 널리 애용되었다.

한편, 한치윤의 『해동역사』에 따르면, 금나라의 제6대 황제 장종(章宗, 1168∼1208)이 고려의 청자지(靑磁紙)를 애용하여 그림을 그렸다고 한다. 이덕무(李德懋, 1741∼1793)는 『청장관전서(靑莊館全書)』에서 “금나라 장종이 일찍이 고려 청자지에 글씨를 썼고, 1369년에 송렴(宋濂) 등이 『원사(元史)』를 편찬하며 고려 취지(翠紙)를 택하여 책 표지를 하였는데, 이 두 가지는 지금의 아청지(鴉靑紙)이다. 부처의 뱃속에 흔히 금자불경(金字佛經)이 수장되어 있어 김생(金生)이 쓴 것이라고 일컫는데, 모두 이 종이이다.”고 하였다. 이로 보아 청자지·취지·아청지라고 불리는 연한 푸른색 종이도 고려의 명품이었음을 알 수 있다. 청지는 광택이 있고 좀먹지 않아 특별히 귀중한 책을 필사해 둘 때 우리나라와 중국에서 많이 사용되었다. 이상으로 고려시대에 유명해진 명품 종이로는 백추지, 견지, 명표지, 청지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조선의 종이도 명품으로 국내외에서 유명하였다. 박지원(朴趾源, 1737∼1805)이 쓴 『열하일기(熱河日記)』에 따르면, 명나라의 유명한 문인들이 조선의 종이를 높게 평가하였다 한다.91)박지원(朴趾源), 『열하일기(熱河日記)』, 양매시화(楊梅詩話). 특히 백면지는 가장 일반적인 외교 예물로 명나라나 청나라는 물론이고 멀리 일본에까지 대량으로 보내곤 하였다. 흰색 닥종이로 만들어 솜처럼 고왔기 때문에 백면지라는 이름을 붙인 것 같으며, 매우 정교하고 정성 들인 공정을 거쳐 제작된 고급 종이로 보인다.

백면지와 함께 외교 예물로 쓴 종이로는 설화지, 상화지, 경면지가 있다. 경면지는 특수 공정을 거쳐 만든 최상품 종이로 거울처럼 맑고 부드러운 특징을 지니고 있었던 것 같다. 선조 때 성절사(聖節使)의 외교 예물로 명나라에 보낸 여러 가지 종이 중에서 백면지가 400장인 데 반하여 경면지는 40장이었던 것으로 보아 알 수 있다.92)『선조실록』 권39, 선조 26년 6월 을유. 그러므로 제작하는 데 노력과 경비가 많이 드는 경면지를 중국에서 지나치게 많이 요구하면 조선 정부는 백성 부담이 크다거나 나라의 재정 형편이 어렵다는 등의 핑계를 대면서 따르지 않은 경우도 있었다.

또한 죽엽지가 있다. 이수광(李睟光, 1563∼1628)은 『지봉유설(芝峰類說)』에서 “우리나라의 경면지와 죽엽지를 중국인들이 무척 귀하게 여겼다.”93)이수광, 『지봉유설』 권19, 복용부, 기용.고 하였다. 그뿐만 아니라 이수광이 1590년(선조 23)에 명나라 수도에 사신으로 갔을 때 예부 시랑(禮部侍郞) 한세능(韓世能)이 죽엽지 한 장을 보내면서 말하기를, “이것은 내가 사신이 되어 귀국에 갔을 때 얻은 것이오. 만일 이와 같은 종이를 가지고 왔거든 내가 얻기를 원하오.”라고 하였다. 그 종이는 품질이 정결하고 조금 푸른빛이 돌아서 죽정지(竹精紙)와 같으면서도 좀 두꺼운 편이었는데, 이수광 자신도 아직 보지 못한 종이라고 하였다. 이로 미루어 조선시대의 유명한 종이로는 백면지, 설화지, 상화지, 경면지, 죽엽지 외에도 여러 종류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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