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12권 역사 속 외교 선물과 명품의 세계
  • 제3장 우리 옷감과 염료의 멋과 아름다움
  • 5. 화폐와 선물로 쓴 명품 옷감
  • 선물로서의 명품 옷감의 가치
김병인

전통 시대에 명품 옷감의 선물로서의 가치는 매우 컸으며 사례 또한 다양하였다. 첫째, 국왕이 신료와 백성에게 하사한 선물 품목 중 하나였다. 특히 국왕이 관료에 대하여 논공행상을 하거나 백성을 위무할 때에 내린 선물 중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였다.

삼국시대부터 국왕이 논공행상을 할 때나 백성을 위무할 때에 내린 선물 중에 중요한 것이 곡식과 비단이었다. 삼국이 서로 치열한 정복 전쟁을 수행하던 중에는 적의 성을 함락하고 장수를 처형한 대가로 비단을 차등 있게 나누어 주었다.162)『삼국사기』 권42, 열전2, 김유신(金庾信) 중(中). 또한 눌지왕은 남당(南堂)에서 노인들을 접대하였는데, 왕이 몸소 음식을 집어 주고 곡식과 비단을 차등 있게 내려 주었으며,163)『삼국사기』 권3, 신라본기3, 눌지마립간 7년 4월. 문무왕은 안승에게 금은으로 만든 그릇과 여러 가지 채색 비단 100단(段)을 하사하였다.164)『삼국사기』 권7, 신라본기7, 문무왕 20년 3월. 이와 함께 적국을 위무할 때에도 비단을 내려 주어 서로 예의를 갖추기도 하였다. 고려를 건국한 태조 왕건은 귀부를 결정한 신라 경순왕에게 채색 비단과 안장 갖춘 말을 보내 주고 아울러 여러 관료와 장수, 군사들에게 베와 비단을 차등 있게 나누어 준 사실도 주목된다.165)『삼국사기』 권12, 신라본기12, 경순왕 5년 8월.

둘째, 국왕이 외국의 사신에게 내린 주요한 선물 품목이었다. 중국이나 일본 등과 교류할 때에 주고받은 많은 선물 가운데 옷감을 우리 측에서는 중요한 선물 중 하나로 여겼다. 예로부터 비단은 국내에서뿐만 아니라 중국과 상호 교류에 있어서도 주요한 선물로 널리 사용되었다. 신라 진덕왕이 죽자 당 고종이 태상승(太常丞) 장문수(張文收)를 사신으로 보내어 조문하게 하고 개부의동삼사(開府儀同三司)를 추증하면서 비단 300단을 내려 주었다.166)『삼국사기』 권5, 신라본기5, 진덕왕 8년 3월. 그리고 태종무열왕이 죽었을 때에도 사신을 보내어 조문하고 여러 가지 채색 비단 500단을 주었으며,167)『삼국사기』 권6, 신라본기6, 문무왕 원년 10월. 문무왕의 아들 이찬 문왕(文王)이 죽자 당나라 황제가 사신을 파견하여 조문하고 자줏빛 옷 한 벌과 허리띠 하나, 채색 비단 100필을 보내 왔다.168)『삼국사기』 권6, 신라본기6, 문무왕 5년 2월. 또한 성덕왕이 왕자 김수충(金守忠)을 당나라에 보내 숙위(宿衛)하게 하니, 당 현종이 집과 비단을 주고 그를 총애하여 조당(朝堂)에서 잔치를 베풀어 주었다.169)『삼국사기』 권8, 신라본기8, 성덕왕 13년 2월. 원성왕 때에는 당 덕종이 국왕에게는 나금(羅錦)·능채(綾彩) 등 30필과 옷 한 벌, 은대접 한 개, 왕비에게는 금채(錦彩)·능라(綾羅) 등 20필과 금실로 수놓은 비단 치마 한 벌 및 은쟁반 한 개를 내려 주었다.170)『삼국사기』 권10, 신라본기10, 원성왕 2년 4월. 이와 비슷한 사례는 『삼국사기』 권11, 신라본기11, 경문왕 5년 4월에도 기록되어 있다. 아울러 백제의 왕도(王都)에 지진이 일어났을 때 당 태종이 비단 도포와 채색 비단 3,000단을 내려 준 사례도 있다.171)『삼국사기』 권27, 백제본기5, 무왕 38년 12월.

이와 같은 관례는 고려시대에도 계속되었는데, 1231년(고종 18)에 몽고 사신들에게 선물용으로 수달피(水獺皮) 의복, 주포(紬布), 저포(紵布) 등을 주전자(金酒器), 크고 작은 잔반(盞盤) 각 한 벌과 은병(銀甁) 등과 함께 선사하였다.172)『고려사』 권23, 세가(世家)23, 고종 18년 12월 을묘. 이후 1253년(고종 40)에도 야굴대왕에게 비단, 저포, 수달피, 관대(冠帶) 등을 하사하였다.173)『고려사』 권24, 세가24, 고종 40년 9월 정축. 그리고 1269년(원종 10)에는 백은(白銀) 아홉 근과 금과 은으로 만든 술잔(鐘) 각 한 개씩, 그리고 모시 18필을 흑적에게 선물하였다.174)『고려사』 권26, 세가26, 원종 10년 병신. 또한 1272년(원종 13)에는 다자대왕의 사절에게 연회를 베풀고 은과 모시를 선물로 주었다.175)『고려사』 권26, 세가26, 원종 13년 11월 을해. 그리고 1328년(충숙왕 15)에는 원나라의 매려와 역특미실불화가 본국으로 돌아갈 때 왕이 최안도를 평양까지 보내어 금은, 비단, 모시 등을 선물로 주었다.176)『고려사』 권35, 세가35, 충숙왕 15년 7월 병자.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도 옷감은 여전히 중요한 하사 품목에 포함되었다. 1406년(태종 6)에 오도리·올량합·천호 등이 새해 선물을 바치니 무명 과 베를 하사하였고,177)『태종실록』 권11, 태종 6년 1월 임자. 1452년(문종 2)에는 도승지(都承旨) 강맹경(姜孟卿)에게 명하여 사신이 돌아갈 때 마포(麻布) 120필을 선물하였다.178)『문종실록』 권13, 문종 2년 4월 정유. 그리고 일본국 사승(使僧) 순혜(順惠) 등이 하직을 고하니, 회답 서계(書契)와 함께 대장경 1부(部)는 함(函)에, 동전 1,500관(貫), 백세면주(白細綿紬) 20필, 백세저포(白細紵布) 20필, 흑세마포(黑細麻布) 20필, 호피(虎皮)로 테를 두른 표피 좌자(豹皮坐子) 1사(事) 등을 선물로 내려 주었다. 그리고 1465년(세조 11)에는 대마도주 종성직(宗成職)과 대관에게 쌀·콩 각각 100석, 면포 50필, 비단 3필을, 대관(代官) 종성직(宗盛直)에게 쌀·콩 각각 50석, 면포 40필을 내려 주었다.179)『세조실록』 권35, 세조 11년 3월 을묘. 그리고 1474년(성종 5)에는 하직하는 일본 국왕의 사자(使者) 정구(正球)에게 정포(正布) 500필, 면포 500필, 백세면주 10필, 백세저포 10필, 흑세마포 10필을 비롯한 다양한 선물을 하사하였다.180)『성종실록』 권50, 성종 5년 12월 병신.

셋째, 신료들이 국가의 재정 충당을 위해 바치는 진상품 중 하나였다. 국가 재정이 고갈되거나 궁핍해지면 관료나 백성에게 임시로 그 비용을 거두어 충당하였는데, 이때에 비단을 비롯한 옷감이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1231년(고종 18)에 모든 관리로 하여금 옷을 차등 있게 내게 하여 나라 선물을 돕게 하였는바, 제왕·재추 이상 인원은 권금(卷錦, 비단 필)과 이색 능의(二色綾衣, 두 가지 색깔의 비단옷)를, 3·4품 관리는 이색 능의, 5품 및 권참(權參) 이상 관리는 제주의(두꺼운 명주옷)를 각각 한 벌씩 내게 하였다.181)『고려사』 권79, 지33, 식화(食貨)2, 과검. 그리고 1253년(고종 40)에는 원나라에 선물로 줄 금, 은, 베, 비단(金銀布帛)이 너무 많아 국고가 모두 텅 비게 되었다. 그리하여 문무 4품 이상 관원은 백금(白金, 은과 석의 합금) 한 근씩, 5품 관원은 모시 네 필씩, 권참 이하 관원은 모시·베 세 필씩, 8품 이하 관원은 모시·베 한 필씩을 내게 하여 충당하였다.182)『고려사』 권79, 지33, 식화 2, 과검.

넷째, 비단을 비롯한 옷감은 국왕이 신료에게 하사하거나 중국의 황제나 사신에게 보내는 선물로서만이 아니라 민간인 사이에서도 선물로 종종 유통되었다. 『조선왕조실록』이나 사대부들의 일기를 살펴보면 당대 사람 들은 인정(人情)이라는 이름으로 수많은 선물을 주고받았는데, 명품 옷감이 많이 거론되고 있다. 미암(眉巖) 유희춘(柳希春, 1513∼1577)이 1567년(선조 즉위년) 10월부터 1577년(선조 10) 5월까지 11년간에 걸쳐 쓴 『미암일기(眉巖日記)』에는 옷감을 선물로 주고받은 기록이 많이 보인다. 선물로 사용된 옷감 종류로는 주로 목화, 핫옷, 무명베, 가는 무명베(館細木), 5승목(升木, 400올 무명베), 명주베, 삼베 등이다. 이 밖에도 조선시대 사대부의 일기에 여러 가지 선물 물품이 기록되어 있는데 옷감이 차지하는 비중이 높다. 이는 국가적 차원에서뿐만 아니라 민간에서도 옷감이 명품과 선물로서 크게 기능하였음을 의미한다.

다섯째, 긴한 부탁을 하거나, 좋은 물건을 쌀 때, 길몽을 살 때 등 일상생활의 다양한 방면에서 명품 옷감을 썼다. 우선 비단은 긴한 부탁을 하거나 뇌물을 줄 때에도 자주 활용되었다. 고구려 영류왕의 태자가 당나라에 입조(入朝)하자 당 태종은 진대덕(陳大德)을 보내어 노고에 보답하였는데, 진대덕이 국경으로 들어와서 이르는 성읍마다 관리들에게 비단을 후하게 주면서 경치가 뛰어난 곳을 보고 싶다고 부탁하여 명승지를 두루 살핀 사례가 있다.183)『삼국사기』 권20, 고구려본기8, 영류왕 24년. 또한 비단은 상대편의 좋은 꿈을 사는 데에도 활용되었다. 문무왕의 어머니이자 김유신의 누이인 문명 왕후(文明王后)는 자신의 언니가 꾼 ‘서형산(西兄山) 꼭대기에 올라앉아서 오줌을 누었더니 온 나라 안에 가득 퍼진’ 꿈을 사서 왕비가 된 사실은 널리 알려져 있다.184)『삼국사기』 권6, 신라본기6, 문무왕 상(즉위년). 이 밖에도 비단은 귀중한 물건을 싸거나 중요한 소식을 적을 때 사용되었다. 신라 진덕왕은 백제를 격파하고 이 소식을 알리기 위하여 김춘추의 아들 법민(法敏)을 당나라에 보냈는데, 이때 비단에 오언태평송(五言太平頌)을 지어 당나라 황제에게 보냈다.185)『삼국사기』 권5, 신라본기5, 진덕왕 4년 6월. 이와 같이 우리의 전통적인 명품 옷감이 지닌 선물로서의 가치는 매우 다양하고 풍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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