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12권 역사 속 외교 선물과 명품의 세계
  • 제6장 동아시아의 명품, 우리 모피와 말
  • 3. 우리 문화 속의 모피
  • 나선 정벌과 모피
윤재운

1960년대에는 중국과 소련 사이에 국경 충돌이 우수리강에서 빈번히 발생하였다. 우수리강 동쪽 땅인 연해주(沿海州)는 1858년 아이훈(璦琿) 조약으로 청나라와 러시아의 공동 관리 지역이 되었다가 2년 뒤에 베이징 조약이 체결되어 완전한 러시아 영토가 되었다. 이때부터 연해주의 영주권을 둘러싸고 양국은 분쟁의 불씨를 안고 있었고, 제2차 세계 대전 이후에 스탈린이 만주를 중국에서 분리하여 차지하려고 획책함으로써 충돌이 벌어지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중국과 러시아 사이의 영토 분쟁은 이미 17세기 중반부터 있어 왔다. 러시아가 그들의 주된 수입원인 모피를 찾아서 16세기에 우랄 산맥을 넘어 시베리아로 동진하였고, 1644년에 마침내 포야르코프(Poiarkov V.)가 이끄는 코사크(Cossack) 부대가 아무르강에 첫 발을 내딛게 되었다. 1649년부터는 하바로프(Khabarov E. P.)가 정부의 지원 아래 아무르강을 탐험하면서 현지 원주민을 잔인하게 학살하고 가혹한 수탈을 자행함으로써 청나라와의 전투가 최초로 벌어지게 되었다. 현재 하바로프스크는 바로 이 사람의 이름을 따서 붙인 지명이다.

이러한 두 나라 사이의 분쟁에 우리 조상들이 개입한 적이 있었다. 바로 우리 역사에서 ‘나선 정벌(羅禪征伐)’이라고도 부르는 헤이룽강(黑龍江) 출병이다. 1654년(효종 5)과 1658년(효종 9) 두 차례에 걸쳐 출병하였다. 이때에 청나라는 명나라 잔존 세력을 물리치기 위해 주력군이 남쪽으로 내려가 있었으므로 만주는 그들의 발상지임에도 불구하고 군사적 취약 지대였다. 이러한 사정으로 청나라는 남하하는 러시아를 막기 위해 조선군의 출병을 요청하였다. 이 무렵 조선은 두 차례에 걸친 호란(胡亂)을 겪은 뒤 마침 볼모로 잡혀갔던 효종이 즉위하여 북벌(北伐)을 준비하고 있었으나 청나라의 이러한 요구로 결국 좌절하고 오히려 청나라에 군대를 파견하지 않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나선은 러시아(Russia)를 한자로 표기한 말로, 1654년 2월에 청나라 사신이 와서 나선 정벌을 위한 조총수(鳥銃手) 징발을 요구하였을 때도 조선 정부에서는 나선의 정체조차 알지 못하였다. 150명의 조총수를 거느리고 84일간의 1차 출병에서 돌아온 변급(邊岌)의 보고로 어렴풋하게나마 서양인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2차 출병에 나섰던 신류(申瀏)도 이들의 정체를 알지 못하였다. 그는 이들이 헤이룽강 상류에서 내려왔다고 하는데 상류에는 몽고가 있으니 그런 것 같지 않다고 하였다. 또한 그들의 모습이 흡사 남쪽 오랑캐를 닮았지만 그보다 더 영악하게 생겼으니 필시 남만의 이웃 오랑캐일 것이라고도 하였다.

정체조차 알 수 없었던 상대와의 싸움에 어쩔 수 없이 말려들어 간 조선 군인들의 피나는 고통은 신류 장군이 쓴 『북정일기(北征日記)』에 생생하게 묘사되어 있다.

이 책에 따르면, 1658년 3월에 청나라 사신이 와서 조선군의 출병을 요구함에 따라 함경도 병마우후(兵馬虞侯)였던 신류 장군이 265명의 조선군을 이끌고, 5월 2일에 두만강을 건너 두 번째 원정길에 나섰다. 병사들은 우수한 화력을 지닌 함경도 포수들로 구성되었다. 7일 뒤인 5월 9일에 청나라의 전진 기지인 지금의 헤이룽장성(黑龍江省) 영고탑(寧古塔)에 도착하였고, 15일에는 무단강(牧丹江)과 쑹화강(松花江)이 합류하는 의란(依蘭)까지 전진하였다. 그리고 6월 5일에 이곳을 출발하여 10일에 헤이룽강에 들어서자마자 마침내 러시아인들과 조우하였다.

이때 러시아 측 대장은 1653년 하바로프의 후임으로 부임한 코사크인 스테파노프(Stepanov O.)였다. 11척의 배로 구성된 이들 일행은 모두 50여 척으로 구성된 청·조 연합군을 당해낼 수 없었다. 이 전투에서 러시아 배 10척이 불에 타고 스테파노프 대장을 비롯한 270명이 전사하였다. 이 전투에 대한 신류 장군의 기록이 러시아 측 생존자들이 본국에 올린 보고서와 완전히 일치하여 그의 기록이 얼마나 신빙성이 높은가를 보여 주고 있다.

러시아인들은 이 전투에서 황제에게 바칠 담비가죽 3,080장을 잃었다고 하였는데, 그들이 탐냈던 것은 바로 이러한 모피였다. 담비가죽은 북방의 특산물로 발해 당시에도 중국이나 일본과 교역하던 중요 물품이었고, 지금도 만주에서는 담비의 일종인 웅초(熊貂)·자초(紫貂)가 국가 보호 동물로 지정되어 있다. 특히 자초는 인삼, 녹용과 함께 ‘동북 삼보(東北三寶)’, 즉 세 가지 만주 명산품 가운데 하나이다.

이 전투에서 청나라 대장 사이호달(沙爾虎達)의 욕심으로 조선 병사 일곱 명이 아깝게 전사하였다. 신류 장군은 그가 전리품에 욕심을 내서 적선을 불태우지 못하게 하고 나포 작전을 펴게 함으로써 사상자가 많이 났다고 일기에 적고 있다. 그는 만주족 법식대로 화장하라는 청나라 대장의 명령을 따르지 않고, 멀리 이국에서 객사한 이들의 시신을 거두어 헤이룽강가의 높은 언덕 위에 자리를 잡아 동향(同鄕)끼리 구분해서 묻어 주었다. 원정길에 오른 지 115일 만인 1658년 8월 27일 마침내 고국으로 개선한 이들은 헤이룽강, 쑹화강 유역에서 횡행하던 러시아 세력을 몰아내는 큰 업적을 남겼다.

청나라와 러시아가 국경 분쟁을 벌인 원인은 러시아 측의 좋은 모피 획득에 있었고, 이 와중에 조선이 본의 아니게 나선 정벌을 한 경위를 살펴보았다. 다시 한 번 모피의 가치나 중요성을 보여 주는 좋은 사례이다.

개요
팝업창 닫기
책목차 글자확대 글자축소 이전페이지 다음페이지 페이지상단이동 오류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