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13권 20세기 여성, 전통과 근대의 교차로에 서다
  • 제1장 여자여 외출하라
  • 4. 소비가 아니라 저축
  • 기아선상의 소비 생활
허영란

광복 후에도 여성의 일차적 목표는 일제 강점기와 마찬가지로 살림을 잘 꾸리고 자녀 교육에 헌신하는 훌륭한 어머니가 되는 것이었다. 여성을 잘 계몽·지도하여 훌륭한 어머니가 되도록 해야 “가정생활을 합리적으로 영위하고 자녀들의 가정교육을 잘 시켜 어린이들을 올바른 정신, 바른 생활 습관으로 교육”할 것이고 그런 “가정환경과 어머니의 영향” 아래에서 훌륭한 인물이 탄생할 수 있기 때문이다.65)미군정청 보건 후생부 부녀국, 『새살림』, 1948년 1월, 4쪽 : 이 자료는 한국 여성 정책 연구원 한국 여성사 지식 정보 시스템에서 참조하였음. 당시에도 생계를 위해 직업 전선에서 분투하는 여성이 있었고,66)1949년 현재 남한의 취업 여성은 약 19만 명으로 추산되었다(『동아일보』 1949년 9월 12일자). 전쟁 통에 급증한 전쟁미망인 등으로 인해 가정 밖에서 일하는 여성의 수가 지속적으로 늘었지만, 여성의 일차적 임무는 역시 주부로서 가정을 잘 보살피는 일이었다.

가정을 잘 보살피는 일에는 가장의 수입을 바탕으로 가정의 소비 생활을 책임지는 것도 포함되었다. 무엇보다 주부는 근검절약으로 수입액의 범위 안에서 지출을 억제해야 하며, 유사한 상품 가운데서 경제적인 물건을 골라 구매할 수 있는 지식을 갖출 필요가 있었다.67)이은복, 앞의 글. 그러나 경제가 취약한 상황에서 여성은 “얼굴의 화장보다 마음의 무장”68)보건 사회부 부녀국, 『새살림』 5, 1957, 119쪽.을 단단히 해서, 가계 운 영을 “소비를 억제하는 것”69)이열모, 「주부와 소비 생활」, 『여성』 4, 1964.에 집중시켜야 했다. 1970년대까지도 여성의 ‘합리적인 소비 생활’은 곧 ‘소비 억제’를 의미하였으며 “소비가 미덕이 아니라 저축이 미덕”70)조덕구, 「합리적인 소비 생활」, 『여성』 117, 1975.이었다. 주부는 “몸단장은 필요하되 화장광이 되어서는 안 되었다.”71)조덕구, 앞의 글. 국민 소득이 100불 안팎에 불과한 가정 경제에서 이루어지는 “기아선상의 소비 생활”72)여성 문제 연구회, 『소비자와 가정 경제』, 1965(이 자료는 한국 여성 정책 연구원 한국 여성사 지식 정보 시스템에서 참조하였음).에서는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적자를 피할 수 없는 경제 사정 아래에서 가정의 소비 행위는 식비나 광열비 등 ‘긴급도가 높은 소비’73)여성 문제 연구회, 앞의 책.를 지탱하는 데 급급하였다. 광복 전에 비해 달라진 것이라면 가계를 대표하는 것이 가장이 아닌 주부였고, 소비자의 대표자 또한 주부라는 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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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대의 소비 절약 운동
1970년대의 소비 절약 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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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사정은 농촌에서도 비슷하였다. 1950년대까지도 우리나라의 중심 산업은 농업으로, 대다수의 국민이 농촌에 거주하면서 농업에 종사하였다. 1960년대 말까지 여성은 대부분 농촌에 거주하였으며, 그들은 강도 높은 노동을 감당하면서 가부장적 문화 아래에서 생활하였다. 이 시기에 농촌 여성의 소비 생활은 자가 생산품을 이고 지고 오일장을 드나들면서 팔아 얻은 소득으로 필요한 소액의 공산품을 간혹 구입하는 데 불과하였다.

1960년대부터 경제 개발이 급속히 추진되었고 그에 따라 전국적으로 도시화가 진전되었다. 산업화·근대화의 급속한 진전에 따라 도시 인구는 1960년에 28.0%에서 1980년에 57.3%, 1985년에 65.4%로 늘어나 농촌 인구의 도시 유입 현상이 가속화되었다.74)보건 사회부, 『부녀 행정 40년사』, 1987, 보건 사회부, 제1편 제2절. 그와 더불어 농촌에서도 남성은 가정 밖에서 생산 활동을 책임지고 여성은 가사와 자녀 양육을 담당하는 핵가족이 확산되었다. 1960년대 말에는 사회 전반적인 변화가 가시화되었다. 이농이 급증하고 여성 노동자가 증가하면서 사회는 격변에 휩싸였다. 농촌의 절대 인구수가 감소하기 시작했기 때문에 경제 활동에 대한 여성의 부담이 가중되었다. 노동청이 간행한 『노동 통계연감』에 따르면 1970년에 48.2%이던 농가 여성의 경제 활동 참가율이 1975년에는 51.8%, 1979년에는 54.2%로 커졌다. 비농가 여성의 경제 활동 참가율도 증가 추세였지만 농가 여성에 미치지는 못하였다.75)노동청, 『노동 통계 연감』, 1980, 5∼6쪽 : 김주숙, 앞의 책, 93쪽 재인용. 1970년대에 정부 주도로 실시된 새마을 운동 역시 농촌 여성의 노동 부담을 증가시켰다. 여성 노동력의 적극적 활용이 이전보다 중시되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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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로 보수 공사 중인 여성
도로 보수 공사 중인 여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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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득이 낮고 빈곤한 농촌에서는 여성이 강도 높은 노동을 통해 가정 경제의 유지에 기여하였다. 반면 도시에서는 중산층을 중심으로 부부의 역할이 가정(소비)과 직장(생산)으로 비교적 뚜렷하게 분화하였다. 농촌 여성은 집안 농사를 뒷바라지하거나 직접 농사를 짓는 등 경제적 생산자로 활동하였지만, 도시의 주부는 농촌보다는 높은 소득 수준을 유지하는 가정 안에서 살림과 자녀 교육 등을 책임지면서 소비 행위를 전담하였다.76)이효재, 「여성은 지역 사회의 주인이다」, 『여성』 92, 1974.

이러한 조건 때문에 도시의 주부가 자본주의적 상품 소비의 일차적인 공략 대상으로 설정되었다. 비록 소비 절약이 지상 과제였지만 가정 안팎의 노동이 좀 더 중요한 임무였던 농촌 여성에 비해 도시의 주부는 일단 소비 행위 자체를 주요 임무로 삼고 있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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