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13권 20세기 여성, 전통과 근대의 교차로에 서다
  • 제2장 한 달 만의 외출
  • 2. 전근대 시기와 일제 강점기의 계
  • 식민 통치의 하부 기구, 식산계
이임하

일제가 1910년대에 실시한 토지 조사 사업과 보통 학교 제도를 비롯한 식민 정책은 촌락과 씨족 공동체를 바탕으로 성장한 계에 타격을 주었다.

토지 조사 사업은 계의 재산이었던 토지나 삼림의 상당 부분을 몇몇 개인이나 총독부의 재산으로 둔갑시켜 버렸다. 그 결과 종중계 등 오랜 기간 축적된 기금을 바탕으로 운영되던 계가 쇠퇴하였다. 그리고 보통 학교 제도의 도입은 서당을 몰락시켰고 자연스럽게 서당 운영을 위하여 만든 서당계, 학계 등을 쓸데없는 존재로 만들었다. 또한 조상 숭배나 상호 부조, 친목을 목적으로 하던 문계, 종계 등도 이주민의 증가로 조금씩 붕괴되었다. 특히 농촌에서는 식민지 수탈을 목적으로 하는 농회, 수리 조합, 삼림 조합 등 각종 단체가 조직됨에 따라 공동 생산을 목적으로 하던 농계, 농상계(農桑契), 화금계(火禁契) 등이 해산되었다.

일제의 여러 식민화 정책은 많은 계를 붕괴시키거나 강제로 해산시켰다. 그러면서도 일제는 식민 지배에 유리하다고 판단한 특정한 형태의 계를 적극적으로 보호하고 장려하였다. 대표적인 예가 동리계인데, 동리계를 이용하면 세금을 거두기 편했기 때문이었다. 식민지 권력은 동리계를 임의 조직이 아닌 강제 조직으로 변질시켜 해당 동리로 이주해 온 사람은 반드시 가입하게 하였다.111)홍관식, 「한국 사회에서의 계의 생성 과정 소고」, 『금융』 32, 1956, 132쪽. 식민지 정책의 강압에도 불구하고 대동계나 상포계 등이 여전히 해체되지 않았고 일부 지역에서는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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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방 금융 조합 총회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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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의 여러 정책 가운데 계의 붕괴와 변화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것은 은행이나 금융 조합 같은 금융 기관의 발달이었다. 1907년 지방 금융 조합 규칙(地方金融組合規則)의 공포에 따라 하층민의 금융 활동을 개선한다는 명목 아래 전국적으로 금융 조합이 조직되었다. 그러나 금융 조합의 본모습은 농민을 통제하고 수탈하는 기구였다. 금융 조합은 생산과 구매의 편의를 위해 조직된 계의 자치적 성격을 제거하고 하부 조직으로 흡수하였다.

이렇게 금융 조합에 흡수된 계는 식산계(殖産契)로 재편되었다. 조선 총독부는 1935년 8월 식산계령(殖産契令)을 공포하고 1936년부터 금융 조합의 하부 조직으로 마을 단위로 각 농가 대표가 참여하는 식산계를 조직하기 시작하였다. 1936년 143개에 지나지 않았던 식산계의 수는 곧 비약적으로 늘어 1938년 3,981개, 1941년 2만 5557개로 증가하였으며, 1943년에는 전국적으로 4만 7083개에 계원의 수도 250만 명에 이르렀다. 그 결과 광복 직후인 1945년 12월말에 이르면 남한에만 3만 4945개의 식산계가 220만 2000명의 계원을 거느리고 있었으며 식산계가 없는 마을은 2,600여 곳 정도였다.112)대한 금융 조합 연합회 조사부, 『한국 농업 연감』, 1955, 57쪽.

설립 초기 식산계는 주로 공동 출하, 곧 농산물을 좀 더 효율적으로 집 하하는 기능을 수행하였다. 그러나 전시 체제로 들어서면서 식산계는 집하 기능뿐만 아니라 농림국의 주도 아래 마을 단위로 농업 생산력을 높이기 위한 활동을 벌였다. 곧 전시 체제 아래서 식산계는 식민지 수탈의 첨병 역할을 하였다.113)박승구, 「식산계의 부침」, 『협동』 28, 1950, 51쪽. 이렇게 식민 통치의 하부 조직으로 조직된 식산계는 농가 경제를 한순간에 장악하고 강력한 통제력을 발휘하였다. 식산계는 1950년대까지 유지되었으며 1960년대 농업 협동조합으로 흡수되었다.

또한 금융 조합이나 은행의 출현으로 지금까지와는 다른 형태의 계, 곧 재산 증식이나 이자 수입을 목적으로 하는 식리계가 확산되었다. 식리계가 널리 퍼진 근본 원인은 상품 경제의 확산과 영세층의 증가에 있었다. 상품 경제가 발달하면서 화폐의 수요가 많아졌으나 이를 확보할 수 없었던 가난한 농민이나 노동자, 도시 서민은 높은 이자를 감수하면서까지 사채를 이용할 수밖에 없었고, 이에 따라 이자 놀이를 목적으로 하는 식리계가 확산되었다. 또한 이 시기에 식리계와 비슷한 형태인 무진(無盡)이 일본에서 도입되었다.

조선 후기에 조직된 여러 목적의 계는 혈연이나 마을 같은 공동체를 기반으로 하여 자치적 성격을 갖고 있었다. 반면 일제 강점기에 식민지 권력이 금융 조합의 하부 단위로 만들었던 식산계는 농민의 생산과 소비 생활을 통제하였고 중앙 정부의 통제 아래 있었다. 이러한 차이에도 불구하고 조선 후기에 조직된 것이든 일제 강점기에 조직된 것이든 이때까지의 계는 남성이 주요한 구성원이자 주체였다. 여성의 사회 활동이 제한되어 있었고, 돈의 관리를 비롯한 가정 안에서의 경제권 또한 남성 손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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