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13권 20세기 여성, 전통과 근대의 교차로에 서다
  • 제2장 한 달 만의 외출
  • 5. 곗바람과 여성 담론
  • 춤바람, 치맛바람 그리고 곗바람
이임하

부녀계를 바라보는 사회의 시선은 양면성을 갖고 있었다. 부녀계가 경제적으로 저축과 투자의 기능을 맡고 있다고 긍정적으로 설명하면서 동시에 여성의 허영과 사치를 조장한다고 질타하곤 하였다. 계는 “한국 가정부인들이 얼마만한 방종을 자행하고 있는가의 바로미터”로 간주되었고,172)김용호, 앞의 글, 85쪽. 이러한 계 담론은 6·25 전쟁 뒤부터 끊임없이 재생산되었다.

6·25 전까지만 해도…… 여성 세계에서는 빚이라는 것을 모르고 지냈습니다. 6·25를 겪고 나서 경제 상태가 핍박함을 알게 되자 우리 여성들도 아주 경제권의 가치를 알게 되어 시작된 것이 사설 ‘계’들입니다. 남편을 의지하지 않고도 큰돈을 한꺼번에 만져 볼 수 있다는 쾌감, 남편이 아이들이 시부모가 모든 가족들이 갈망하던 물건도 한꺼번에 사 줄 수 있고, 남편의 위급한 사업체의 봉변을 면해 줄 수도 있었던 것이 이 사설 ‘계’의 존재이었습니다. 그래서 여성들은 발언권이 서고 왼통 사치를 할 수 있고 외출을 할 수 있는 한편 외부 이성들과 접촉할 기회를 당당하게 얻을 수 있고…… 이래서 모든 파탄이 일어나게끔 되었습니다.173)전호덕, 「빚과 여성」, 『전망』 1955년 11월호, 17쪽.

확대보기
댄스홀
댄스홀
팝업창 닫기

그보다도 더 주목되는 것은 초기의 그것이 뚜렷한 목적이 있어 시작된 것과는 달리 요즈음의 계는 모이는 자체에 보다 더 큰 의미를 찾으려 한다. …… 계를 하는 여성들의 눈동자에 무엇인가 심각한 표정 같은 것을 볼 수도 있었으나 요즘에는 오히려 유흥 기분을 더 발견한다. 화려한 몸치장, 한가한 수다 등 일종의 유한마담 같은 인상을 풍기고 있다. …… 모여 앉은 이들의 대화 내용이 이미 전과 달라지게 된 것도 결코 우연이 아니다. “살아보자.”, “어떻게 해서든지 사업 자본을 마련하자.”와 같은 절실한 목적이 없기 때문에 이들의 대화 내용은 자기들의 주변 여성들에 관한 화제에서부터 서로의 생활 보고 같은 것이 주 내용이 된다. 누구는 자가용을 샀다더라, 누구는 집을 새로 마련했다더라 따위 큼직한 화제에서부터 누구는 어떻고 누구는 어떻고 하는 식으로 주로 소비 생활에 관한 이야기가 주고받아진다.174)송건호, 앞의 글, 45쪽.

부녀계를 둘러싼 담론은 부녀계를 ‘여성의 허영과 사치’를 양산하는 근원지로 말하면서 항상 “예전에는 그렇지 않았는데 지금은 문제가 된다.”고 설명하였다. 이런 방식의 담론은 계의 역사를 6·25 전쟁 이전 남성 중심의 계와 6·25 전쟁 뒤 부녀계로 나누고, 전자는 생산적이고 상호 인보(隣保) 정신에 바탕을 둔 데 비해 후자는 소비적이고 모리적이며 반사회적이라고(또는 반가족적이라고) 규정지었다.

확대보기
곗바람과 춤바람
곗바람과 춤바람
팝업창 닫기

더 나아가 여성의 ‘곗바람’이 여성의 춤바람과 치맛바람으로 이어졌다고 말해졌다.

사모님들의 사회 진출은 우선 파티라는 광태로부터 시작되었다. …… 파티가 계속되는 한 그들에게는 돈이 필요했다. 여기에서 계를 시작했다. 계의 마력은 사모님들의 신경을 자극시키고 핸드백을 불룩하게 만들기에 충분하였다. …… 파티는 마침내 ‘매음 중개소’로 변하여 계는 파탄을 일으키는 때가 왔다. 폭풍우 하리켄은 마침내 광풍으로 변하여 갔다. …… 그들이 주저앉는 순간 그들은 정신적 육체적으로 썩어 문드러져 있다는 것을 몸에서 뚝뚝 떨어지는 ‘구더기’를 보고 처음으로 알아차렸던 것이다.175)박성환, 「기성 여성 세대를 고발한다」, 『여원』 1960년 7월호, 100∼101쪽.

합부인은 이른 아침부터 어수선했다. 고무신을 닦게 하고, 화장대와 마주 앉은 지 두 시간이 넘는다. 방 안에 온통 어지른 옷가지들…… 남은 일은 패물 착용이다. 손가락마다 금붙이로 호사를 시키는 것이다. 일로 미장원으로. 공작부인의 행차다. …… 방금 무도회가 시작될 모양이다. …… 계장은 바로 사교의 장소이기 때문이다.176)『중앙일보』 1966년 9월 27일자.

계를 ‘사모님’이라 불리는 ‘유한마담’들과 연결하여 계에 대한 부정적인 이미지를 극대화하고 있다. 유한마담은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썩어 문드러진 몸’으로 묘사되듯이 6·25 전쟁 뒤 사회에서 퇴폐와 부패의 온상지(溫床地)로 이미지화되었다. 유한마담과 계를 연상시키려는 시도는 곧 계와 계를 꾸려 가는 여성에게 퇴폐와 부패의 이미지를 덧씌웠다. 그리고 이러한 덧씌우기는 6·25 전쟁의 영향으로 점증한 여성의 경제적·사회적 활동에 대한 두려움의 표시이자 경계였다. 계가 중요하게 거론되는 이유는 “계가 여성들의 손으로 움직여지고 있는 만큼 여성의 사회적 위치가 달라졌으며”, 또한 “계를 통하여 부인들이 경제권을 쥐게 된다면 앞으로 단위 가정 내에서 남성과 여성의 지위는 많이 달라질 것이라는” 점 때문이었다.177)박운대, 「계의 비극과 여성의 위치」, 『여성계』 1955년 9월호, 90쪽. 곧 계의 활성화는 경제적 무능력자였던 여성에게 경제 활동을 확대하고 가정 경제의 중심이 남성에서 여성에게로 전환하는 계기로 작용하였다. 따라서 계의 부정적 이미지를 유포하고 공격하는 행위는 곧바로 6·25 전쟁으로 점차 확대되었던 여성의 경제 활동을 규제하여 위축시키면서 여성의 활동 영역을 가정으로 한정시키려는 시도였다.

곧 여성의 경제적·사회적 활동을 통제할 능력을 상실한 사회는 계를 공격하는 행위를 통해 여성의 활동이 전통적인 가족 구조와 부도(婦道)를 파괴할 것이라고 강조하였다. 또한 교육 현장에서 치맛바람의 온상지로 간주된 사친회(師親會)나 자모회(姉母會) 활동도 계로 인해 사치와 향락으로 치닫고 있다고 지적하였다.178)합동 통신사, 『합동연감, 1959』, 1958, 57쪽.

개요
팝업창 닫기
책목차 글자확대 글자축소 이전페이지 다음페이지 페이지상단이동 오류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