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13권 20세기 여성, 전통과 근대의 교차로에 서다
  • 제2장 한 달 만의 외출
  • 5. 곗바람과 여성 담론
  • 끼니마다 도레미파탕의 진원지
이임하

가부장제 이데올로기에 기초한 여성 담론은 여성은 정조 관념이 희박하기 때문에 집 밖에서 활동하면 결국 부도를 버리고 탈선으로 귀결될 것이라고 말하였다. 부녀계에 대한 담론 또한 이러한 방향으로 치닫곤 하였다. “가정주부가 계를 한다고 화려한 옷을 입고 아이들을 버려두고 나돌아 다니면 가정은 파괴”되고179)박운대, 앞의 글, 90쪽. 비극을 초래하기 때문에 여성은 계를 쫓아다닐 것이 아니라 가정으로 복귀하라고 강조하였다. 가정으로의 복귀라는 슬로건은 ‘계와 가정의 불화’라는 새로운 허상을 만들어 냈다.

여기에 있어 계가 가정에 반영된 실례를 들어 보자. 인순 엄마는 착실한 은행가의 아내로서 고등학교, 중학교, 소학교에 다니는 여러 아이들을 데리고 봉급생활을 해 오던 평화스러운 가정이었다. 친구들의 권유에 따라 몇 개의 계에 가입했었다. 그러나 월급쟁이가 곗돈을 제때에 장만하기란 힘이 드는 것이었다. …… 인순네는 계에 밀리게 되면 인순 아버지만 조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날이 그 턱이요 생활은 쪼들리는데 곗돈마저 마련하자니 턱도 없는 노릇이었다. 인순 아버지는 은행에서도 간부급 인사로서 마련 못하는 곗돈에 이 사회의 무상을 느꼈음인지 은행에서 자기 자신의 취급하든 서류를 깨끗이 정돈하고 책상까지 정리한 후 집으로 돌아와 아이들 없는 틈을 타서 목을 매어 자살을 하고 말았다.180)권혁정, 앞의 글, 80∼82쪽.

예를 들면 내 친구 한 사람이 처음 계를 시작할 때에는 아이들의 옷도 곧잘 사 입히고 자기는 물론 남편에게까지도 무척 호사를 잘 했답니다. 그러는 동안에 그 집에서의 부인의 위치는 하늘을 찌를 듯 안하무인격으로 되자 그 부인은 그 생활에 실증이 나서 새로운 분위기를 동경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가족들의 만류도 듣지 않고 그대로 뻐쳐 나아가다가 철들은 큰아이는 거의 어머니의 소생할 길이 없음을 깨닫자 그대로 자살을 해 버 리고 가산은 패가하고 그 남편은 아편 중독자가 됐으니 이젠 도저히 일어날 길이 없게 됐지요. 지금 그 여자는 어디 가서 찬밥 한 술 얻어먹지 못할 지경의 신세가 되었습니다.181)전호덕, 「빚과 여성」, 『전망』 1955년 11월호, 18쪽.

너무나 흔해 보이는, 그러나 사실 확인조차 되지 않은 앞의 두 사례는 계가 어떻게 가정의 평화를 파괴하는지 형상화하고 있다. 가정의 평화는 곗돈을 장만하지 못한 가장이 자살하는 것으로, 남편은 아편 중독자가 되고 아들은 자살하고 가산을 모두 잃어 버리는 것으로 깨어졌다. 두 사례의 공통적인 내용은 너무나 평화스럽던 가정이 계를 통해 ‘돈 맛을 안’ 어머니 또는 아내로 인해 파국을 맞는다는 이야기이다. 그리고 허상은 궁극적으로 가정에서 여성이 하는 역할은 어진 어머니이자 착한 아내, 곧 ‘가부장적’ 질서에 순종하는 여성이어야 한다고 결론지었다. 광복으로, 6·25 전쟁으로 흐트러진 가부장적 질서가 재정립되는 공간으로서의 가정을 다시 복구하기 위해서는 남성의 ‘항의’와 여성의 ‘반성’이 필요하였고, 계 또한 그 대상의 하나였다. 다음의 인용문이 이러한 예에 해당한다.

나는 월수 7,000원의 샐러리맨이다. 결혼한 지 2년 7개월. …… 한 1년 전부터의 일인데 아내는 난데없이 하루는 직장에서 돌아오자 나를 붙잡고 하는 말이 “여보 우리 그 쥐꼬리만 한 월급으로 항상 허덕이느니 계나 하나 듭시다.”, “계?”, “예 오늘 여학교 때 동무가 일부러 찾아와서 나보고 가까운 동무끼리 계를 하나 시작하는데 꼭 들라는 거예요.” 하고 신바람이 나서 야단법석이었다. …… 못이기는 척하고 즉석에서 응락을 하였다. 몇 달 지난 후부터 나는 의외의 수난을 당하기 시작했다. 매달 곗돈 1,000원씩을 순전히 내 잡비에서 돌려주어야 될 형편이었고 그나마 곗날엔 볼 수 없었던 몸치장을 하고 모임에 참석하는 것이다. 물론 그날만큼은 나는 더 일찍 들어와 애기를 업고 집을 지켜야 하는 따분한 처지에 놓이게 된다. 그뿐만 아니라 혼자서 식은 밥을 먹어야 하고 저녁까지 약간 궁금한 심경으로 아내가 돌아오길 기다린다. 그러다가 보니 한 달에 한 번씩 있는 곗날은 나의 가장 따분한 날이 되고 말았다. …… 이 세상의 아내들이란 빠져 나갈 구멍만 생긴다면 어디론가 꼬리를 흔들며 나다니고 싶은 지극히 가교한 동물인 모양이다.182)현용현, 「샐러리맨의 아내와 계 소동」, 『여상』 1964년 11월호, 209쪽.

한 동네 영이 엄마가 찾아와 안댁끼리 주인어른들 모르게 5,000원짜리 계를 하나 하자는 유혹이다. …… 그이의 손을 잡았다. 몹시 거칠어 있기에 펴 보니 마디마디마다 부르터 있지 않은가. 난 시큰해지는 콧물과 함께 흐르는 눈물을 닦으며 “내 당신 몰래 아무것도 하지 않으리라.” 하고 3년 전 결혼할 때의 마음을 거듭 다짐해 본다.183)「여자의 창─계와 주부의 양심─」, 『경향신문』 1966년 12월 3일자.

계와 관련된 담론은 여성의 사치와 허영을 양산하는 공간, 춤바람이나 치맛바람과 함께 사회 문제를 일으키며 결국 여성 자신과 가족을 파괴하는 고리로 끊임없이 재현되어 왔다. 그리고 이러한 담론은 계에 빠져 들면서 ‘착한’ 아내 또는 ‘착한’ 어머니가 ‘나쁜’ 아내 또는 ‘나쁜’ 어머니로 변해 간다는 허상을 만들어 냈다. ‘나쁜’ 아내와 ‘나쁜’ 어머니가 이전의 모습으로 돌아가기 위해 남성들은 더 이상 집 밖으로 돌아다니지 않고 매사에 순종적인 아내의 모습을 견지할 것을 경고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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