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13권 20세기 여성, 전통과 근대의 교차로에 서다
  • 제3장 무식하면 짐승과 같습니다
  • 2. 규율과 훈육 그리고 정체성 찾기
  • 책 읽는 여성
김정화

폐쇄적인 구조의 학교는 학생의 다종다양한 욕구를 제약하였다. 폭넓은 독서에도 관심을 가지지 못하게 하였으며 신문을 읽는 것마저 경계하였다. 기숙사 유의 사항 가운데는 “교과서와 참고서 이외의 독서를 금한다.”라는 규정을 두고 있을 만큼 학생의 다양한 지적 욕구를 차단하였다. 순종을 강요하면서 학교에서 요구하는 규율을 벗어나는 학생을 위험시하고 사찰의 눈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그러나 학교생활에서 겪는 다종다양한 경험과 지적 욕구의 확대, 사회주의 사상 같은 새로운 사상의 유입은 여학생이 독서하는 폭을 넓혔으며, 의식을 성장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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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하는 여학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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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성 부립 도서관 출입자를 조사한 내용을 보면 1925년 10월 여성이 16명이었던 데 비해 1929년에는 114명으로 크게 늘어났다. 남성에 비해 100분의 1에 불과한 숫자지만 읽고 싶은 책을 찾아 도서관으로 갔다는 점을 적극적 의미로 해석하였을 때 책 읽는 여성의 수는 상당히 많았을 것이다. 여자가 도서관에 많이 출입하며 공부하는 일이 ‘최근에 기이한 사회적 현상’이라고 표현되듯이 결국 여성의 책 읽기는 사회 변화를 보여 주는 극명한 지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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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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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3년 김동인은 ‘신문 소설은 어떻게 써야 하나?’라는 글에서 신문 소설의 독자가 대부분 ‘가정부인과 학생’이라고 말하고 있다. 여성과 학생은 1920∼1930년대 도시 대중문화의 중핵을 차지하였다. 문학 작품 읽기를 통해 학생과 여성은 삶의 성장과 관련하여 익혀야 할 ‘교양’, 곧 삶과 세계에 대한 전반적이고 포괄적인 이해와 통찰력을 길렀기 때문이다.212)천정환, 『근대의 책 읽기』, 푸른 역사, 2003, 335∼340쪽.

1920년대를 지나면서 독서 인구는 급격하게 증가하였다. 남성과 지식인만의 점유물이었던 책 읽기는 이제 여성이 학교나 서당, 야학 등에서 교육받을 기회를 갖게 되고 글을 읽을 줄 아는 사람들이 증가하면서 일상적 활동으로 등장하였다.

1920년대까지만 해도 여성의 독서열은 미약하고 수학 등 참고서를 가장 많이 읽고 있었지만, 1930년대를 즈음해서 여학생들은 여러 가지 방면의 독서를 통해 자신들의 지적 욕구를 충족시켜 나갔다. “10시 30분 전기불을 끈 뒤 소설책은 읽고 싶고 다른 독서도 하고 싶은데 불이 없어서 이불 속에다 회중전등(懷中電燈)을 켜 놓고 바깥으로 새어 나갈까 염려”213)최덕경, 앞의 글, 211쪽,하면서 책 속에 빠져 들었다. 책 속에서 소녀들은 안식처를 찾았다. 주인공과 자신을 동일시하면서 주인공의 슬픔에 가슴 아파하였다. 그리고 어느 순간 소녀들은 소설 속의 주인공과 자기 자신을 따로 떼어 바라볼 수 있는 단계로까지 나아갔다.

『동아일보』는 1931년 경성 지역 여학생 44명을 대상으로 독서 경향을 살펴보았다.214)「독서 경향─제1차 여학생계─」, 『동아일보』 1931년 1월 26일자 : 천정환, 앞의 책, 350∼351쪽. 이 조사에 따르면 여학생이 읽는 책의 종류는 소설류가 다수(28명)를 차지하였고, 사상 관련 책(10명), 잡지 등 기타 서적(4명)의 차례였다. 소설류로는 춘원 이광수의 『무정』과 콜론타이의 『붉은 사랑』, 입센의 『인형의 집』, 위고의 『레미제라블』 등을 읽고 있었다. 이러한 소설책들은 여학생이 단순히 연애류의 소설을 읽는다는 일반의 불평과는 다르게 사회의 모순을 담아 내고 있는 소설을 많이 읽고 있음을 보여 준다. 또한 사상 관계 책으로는 부하린의 『유물 사관』이나 사회주의 혁명가 로자 룩셈부르크의 전기, 콜론타이의 『부인과 가정 제도』 등을 읽고 있었다.

책을 읽는 녀학생이 점차 증가…… 련애 소설 가튼 것을 녀학생계에서 만히 사보더니 지금에 와서는 그러한 서적은 찾지도 안슴니다. 그 대신으로 문예에 관한 서적과 사상에 관한 서적을 만히 찻슴니다.215)신길구(申佶求), 「서점에서 본 여학생」, 『신여성』 1926년 4월호, 143쪽.

저열한 연애 소설 등 류(類)는 순질한 처녀의 마음을 상할지언정 엇는 바 업슬 것이다.216)박노아(朴露兒), 「여학생의 취미 검토」, 『신여성』 제6월호, 1931, 72∼74쪽.

다양한 종류의 책을 접하면서 여성은 이제 스스로 읽을 책을 선택하게 되었다. 책을 읽게 된 동기로 이야기한 것도 ‘친구의 권유’가 가장 많았는데, 여학생들은 책을 통해 자신의 생각을 친구와 공유하였다. ‘세상을 알기 위해서’라고 답한 경우도 있는데, 이것은 사상 관계 책을 선택한 이유일 것이다. 이런 책을 읽은 뒤 느낌을 보면 다음과 같다.

『인형의 집』 : 이 세상에 노라와 같은 여성이 있다면 참으로 여성 운동 은 성공하리라 밋습니다.

『부활』 : 자기의 지위와 명예와 재산 모두를 버리고 빈천(貧賤)을 구별치 않는 주인공에게 탄복하얏습니다.

『죄와 벌』 : 참으로 말할 수 업시 비참한 그 주위와 환경에 딸하 그와 가티 외엿슴을 불상하게 느낄 따름입니다.

『모(母)』 : 책을 보고 그 어머니의 교육 방침에 탄복하얏다. 그리고 자녀 교육에는 어머니의 책임이 더 중대하다는 것을 일층 깨달앗다.

『사회는 어찌되나』 : 모순된 사회─가득한 늣김을 이 좁은 조희에 어떠케 말슴하오리까.

『삼대련(三代戀)』 : 최근에 와서 도덕적 관념이 얼마나 급격하게 변하는 것을 볼 수 잇는 동시에 조선 여자의 도덕에 대한 표준도 이러하여야 할 것입니다.

“『춘향전』, 『심청전』을 읽든 시대와 읽든 사람과, 『노라』를 읽고 『부활』을 읽든 시대와 사람 사이에서 우리는 엄청나게 다른 빗을 보고 다른 소리를 듯는다.”라고 한 것처럼, 현실은 이제 여학생들로 하여금 연애 소설뿐 아니라 여성 해방적이고 정치적 성격을 띤 책을 읽도록 만들었다. 이러한 책을 혼자서, 또는 친구끼리 돌아가며 읽으면서 소녀들은 자신과 세상을 바로 볼 수 있는 눈을 만들었다.

광주 학생 운동으로 검거된 이순옥은 공판에서 시위운동에서 쓰기 위해 “태극기는 시대에 뒤진 것이라 적기(赤旗)를 만들었다.”217)『중외일보』 1930년 3월 19일자.고 진술하였다. 이것은 식민지 현실의 극복 방안을 사회주의 사상에서 찾고 있는 학생의 또 다른 의식 변화를 보여 준다. 일제 강점기 내내 학생이 중심이 된 ‘독서회 사건’은 계속해서 일어났다. 이러한 독서회 사건에는 남학생뿐 아니라 여학생도 적극적으로 참여해 식민지 조선의 현실을 고민하였다. 1939년 독서회 사건으로 검거된 학생 가운데는 여학생 67명도 포함되어 있었다.218)『동아일보』 1939년 9월 11일자. 학생들은 다양한 독서 경험을 통해 스스로의 의식 세계를 변화 향상시켜 나갔고 적극적으로 현실 문제에 개입하기도 하였다.

책 읽는 여성들의 등장은 남성 중심의 사회에 대한 하나의 균열이었다. 독서는 꿈꾸는 여성을 만들어 냈다. 그리고 여성에게 독서는 단지 즐거움이나 지식을 얻기 위한 수단이나 현실 도피 수단이었지만 차츰 시간이 흐르면서 자기 자신과 타인을 성찰해 볼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 여성의 책 읽기는 단순히 현실을 도피하는 방편에 그치지 않고 일상생활에서, 지리한 규범에서 억압적 현실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욕망과 저항의 표현이었다.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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