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13권 20세기 여성, 전통과 근대의 교차로에 서다
  • 제3장 무식하면 짐승과 같습니다
  • 3. 수학여행 전성시대
  • 민족을 발견하라
김정화

[민족을 발견하라]233)이승원, 앞의 책, 289쪽(제목 차용).

광복 뒤에도 학생의 견문을 넓히고 교외에서의 단체 생활을 통한 자율 협동 의식을 증대시키기 위한 방안으로서 수학여행은 계속되었다. 경주와 설악산은 물론 강릉 오죽헌(烏竹軒)과 아산 현충사(顯忠祠), 부산·포항 지역이 새롭게 수학여행지로 각광받았다. 이들 지역이 수학여행지로 인기를 끌었던 것은 국가의 정책적 의도와 맞물려 있었다.

1970년대 들어 호국 선현과 국방과 관련된 유적이 집중적으로 정화되었다. 단순히 이전의 유적을 보수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새로이 건물을 짓고 기념비를 세우고 주변 환경을 정화하는 등 새로운 유적지를 만드는 것이었다. 박정희 정권 시기 조성된 유적들은 이순신 장군과 관련된 유적을 비롯하여 금산의 칠백의총, 임진왜란 관련 유적, 유관순·윤봉길 등 항일 독립 운동과 관련된 의사의 사당 건립 등 전국의 주요한 호국 국방 유적이 거의 모두 보수되고 복원·정화되었다. 또한 이 밖에도 영릉(英陵, 세종대왕과 그 비 소헌 왕후의 능), 오죽헌 등 전통 문화 유적이 복원되었다.

왜 호국 선현과 국방 유적의 정화가 중점적으로 추진되었는가? 민족 자립을 위한 조국의 근대화 작업을 수행함에 있어 민족 주체 의식을 확립하는 일이 가장 중요한 과제가 되면서 민족주의적 분위기는 한층 고양되었다. 또한 호국 선현과 국방 유적의 정화 정책은 체제 스스로가 밝히듯이 조상의 국가 수호 의지를 국민이 배워 자주 국방의 정신을 고취하도록 하려는 목적을 갖고 있었다.234)전재호, 「동원된 민족주의와 전통문화 정책」, 『박정희를 넘어서』, 푸른 숲, 244∼246쪽.

수학여행은 견문을 넓히거나 휴식을 위한 것이라는 단조로운 의미를 넘어서 고적 답사, 국토 답사를 통한 역사의 재인식에 목적을 두었다. 우리나라의 국토와 자연과 역사를 보고 느끼게 해 줄 필요가 있었다. 그저 놀거나 구경하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유물과 유적이 우리의 역사에서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기록하고, 그것을 자양분으로 민족의식을 함양하기를 바 랐다.235)이승원, 앞의 책, 29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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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죽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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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대 문화재 정책은 민족의 문화적 전통을 되살리고 국민정신을 함양하며 국난 극복의 슬기를 배우는 교육 도장으로 조성하는 데 중점을 두고 이루어졌으며, 여기에 맞추어 수학여행 코스도 만들어졌다. 수학여행 코스를 선택할 때도 교육의 목적에 맞추어 짰다.

1975년에는 오죽헌을 새롭게 단장하였다. 오죽헌은 신사임당(申師任堂, 1504∼1551)이 태어나고 자란 집이며 위대한 정치가요 철학자인 율곡(栗谷) 이이(李珥, 1536∼1584)를 키워 낸 공간이다. 신사임당이 우리나라 어머니의 사표(師表)가 되는 것은 그녀가 글과 그림에 능한 여성이었기 때문만이 아니라 율곡 이이라는 위대한 아들을 기른 어머니였기 때문이다.

우리들의 수학여행은 오죽헌에서 강릉 경포대, 낙산사, 설악산, 38선에 이르기까지 설레임의 시간이었지만 끊임없는 비와 교련복의 행진도 잊을 수 없는 풍경화 속의 한 장면…… 지금 생각하면 우습지만 당시에는 교련복을 교복 다음으로 착용하고 다녔지요. …… 우리는 소풍, 산업 시찰, 수학여행을 모두 교련복을 입고 다녔으니…….

오죽헌에서 38선으로 이어지는 수학여행 일정은 여성 교육의 목표를 잘 보여 준다. 오죽헌에서 훌륭한 어머니이자 인내하는 내조자라는 여성으 로서의 역할을 다시 한 번 되새겨야 하였다. 더불어 38선을 둘러보면서 신사임당의 부덕(婦德)과 함께 ‘북괴’와 대치하고 있는 국가 안보에 앞장서는 ‘충성하는’ 신사임당이 되어야 하였다. 교련복을 입고 강릉 오죽헌으로 가는 수학여행은 남성과 같이 국가에 대한 충성을 다하면서도 여성으로서의 역할을 그대로 수용할 줄 아는 현모양처들의 행진이었다. 현모양처의 표본으로 재현된 신사임당의 이미지는 박정희 정권의 교육 목적과 일치하였다. 박정희 정권은 민족주의적 정서로 국민을 통합시키기 위해 ‘국적 있는 교육’을 강조하였으며, 신사임당과 이순신 장군 등은 계승해야 할 모델이었다.236)이임하, 앞의 책, 3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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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수학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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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포항 제철이 인기 있는 수학여행 코스로 등장하였다. 경주 불국사로 이어지는 수학여행 코스는 경제 발전의 상징인 포항 제철을 만났다. 신 라의 고도(古都) 경주에서 유적을 답사한 뒤 소위 남동 임해 공업 단지를 견학하였다. 포항 제철과 울산 공업 단지를 둘러보면서 학생들은 “막대한 내부 시설엔 경이로움에 벌린 입이 닫히지 않았다.”237)최금숙, 『영등』 9호, 1972년 : 『영등포 50년사』, 영등포 여자 고등학교, 2003, 126쪽 재인용.고 할 정도로 놀라운 경제 발전의 속도를 몸으로 느껴야 했다.

3박 4일의 일정으로 2학년만, 해군 사관학교에 1일 입교하여 1박한 후 부산 산업 시설을 견학하고 해운대에서 1박, 3일째는 울산 공단 견학하고 이어 경주 고도로 가서 1박하며 신라의 유물 유적을 답사하고 귀경. …… 그 후로도 포항 제철, 울산 공단 견학……238)경기 90년사 편찬 위원회, 『경기 90년사』, 경기 고등학교, 1990, 332쪽.

경주에서 학생들은 최초로 한반도를 통일한 신라의 문화와 화랑의 기상을 느끼면서 한민족의 유구한 전통과 문화를 눈으로 보고 가슴에 되새겨야 했다. 경제 성장의 그늘에 가려진 채 죽어간 전태일이 아닌, 놀라운 속도로 성장한 산업화의 현장을 만나야 했다.

그러나 여전히 꽉 짜인 일정의 수학여행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밤새도록 잠을 자지 않고 곤하게 자는 친구 얼굴에 그림을 그리며 돌아다니던 일, 유행하던 트위스트 춤을 추며 쿵작거리다가 들켜서 혼이 난 일 들이었다.239)김영주(36회), 『경북 여고 70년사』, 경북 여자 고등학교, 1999, 423쪽.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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