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13권 20세기 여성, 전통과 근대의 교차로에 서다
  • 제4장 반비간에서 주방으로
  • 2. 반비간에서 주방으로
  • 개량 부엌의 시대
김춘수

[개량 부엌의 시대]282)부엌의 변화에 대한 개괄은 김대년 외, 「한국 주택 가사 작업 공간의 관련 용어 변화와 그 의미에 관한 연구─부엌을 중심으로─」, 『한국 가정 관리 학회지』 제17권 3호, 한국 가정 관리 학회, 1999, 120∼121쪽 참고.

산업화 이전까지 취사를 위한 노동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연료와 물이었다. 마을에 있는 샘이나 강물에서 물을 길어다가 절구나 맷돌, 방아를 이용하여 낟알을 찧어 장작에 불을 붙인 후 밥을 지었다.

장작은 6·25 전쟁 이후 무분별한 벌목을 단속하고 연료를 연탄으로 대체할 때까지 사용되었다. 농촌 지역에서는 1985년까지 41.5%가 나무를 사용해 난방과 취사를 하였다. 취사와 난방을 겸한 아궁이는 큰 솥 아궁이와 작은 솥 아궁이로 나누어져 있었으며, 여름철에는 난방과 분리시켜 이용하였던 한뎃부엌이 있었다.

십구공탄이 나온 1957년 이후 1960년대에 들어서면서 연탄이 대중화되었다. 연탄의 상용은 특히 도시에서 쌀값과 함께 연탄 가격이 물가를 결정짓는 기준이 되었다는 점을 통해 잘 드러난다. 연탄의 대중화 이후 열악한 설비 때문에 생기는 연탄가스 사고는 겨울철 신문지상을 가득 채우곤 하였다. 또한 연탄의 사용은 연탄 갈기, 연탄재 버리기 등의 번거롭고 힘든 노동이 뒤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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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탄 부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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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장작에만 의존하던 부엌에 구공탄은 큰 변화를 가져왔다. 온돌을 기본으로 하는 우리나라의 주거 양식 때문에 연탄이 대중화된 이후에도 부엌을 집 안으로 들여오지는 못하였지만 구공탄이 사용되면서 난방과 취사의 분리 가능성이 높아졌다. “장작불을 조리용과 난방용으로 분리한다면 적은 식구에게는 경제적이나, 식구 수가 많은 집에서는 조리용 불이 동시에 온돌을 덥게 하는 난방용이 되므로283)표경조·주월영, 중등 교과서 『이상적인 가정생활』 1, 장왕사, 1957.”부엌 개량에 난점이 되었다. 아궁이 개량을 위한 여러 가지 실험이 이루어졌다. 연탄은 석유와 가스가 보급되는 1985년까지도 중요한 난방과 취사 연료였는데, 이는 연탄 한 장으로 8시간 내지 9시간을 난방할 수 있는 저렴함 때문이었다.

급수 방식의 변화는 공간의 변화와 노동 형태의 변화에 큰 영향을 미쳤다. 전근대 시기에 생활에서 쓰는 물은 우물이나 집 근처 냇물이었다. 우물이나 수도가 가정까지 보급되지 않아 물을 길어 오는 일은 가사 노동 가운데 가장 중요하면서도 힘겨운 것이었다.

일은 죽자 사자 하제. 샘은 동네 저 끝에 있는데 여다 먹었어. 물 한 분 여다 놓으믄 밥 안치고 나믄 세수할 물이 잘 안 남지. 한 때도 대여섯 번씩 여야 밥하고 세수하고 설거지하지. 저녁 때로는 여나믄 번씩 여야 되지. 그래 물 이고 밥해 먹고.284)구술 성춘식·편집 신경란, 『이브자리 피이 놓고 암만 바래도 안와』, 뿌리 깊은 나무, 1992, 78쪽.

인부를 내가 사 가지고 섣달에 이사를 그리 갔어. 가이 방은 커단하고 뜨신데 부엌이 콧구멍만 한데 물을 가질러 가자믄 부엌문을 나가서 뒷담으로 신작로를 지내서 안집에 대문으로 들어가 물을 받아 와. 길갓집이야.285)구술 성춘식·편집 신경란, 앞의 책, 9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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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네 끝에 있는 샘에 나가 하루에 열 번이 넘게 물을 이어 오는 고달픔은 그 시대를 살았던 여성들의 증언에서 빠지지 않는다. 그 당시 우물과 집의 거리는 집을 고를 때 필수적으로 고려되는 사안이었다. 적은 돈으로 집을 얻자면 신작로까지 나가서 주인집의 우물을 받아다 쓰는 것을 감수해야 하기 때문이었다.

물장수가 있어 몇 푼씩 주고 물을 사먹는 집도 있었으나, 몇 푼을 아끼기 위해서는 어린 소녀와 여성이 물을 길어 오는 일을 하였다. 이러한 광경은 외국인의 눈에 다음과 같이 이국적으로 보였다.

어린 동생을 포대기로 등에 업고 무거운 빨랫감을 머리에 인 여자 아이들을 강가에서 만나기란 쉬운 일이었다. 동네 골목길에서도 물동이를 머리에 얹고 지나가는 어린 소녀들을 흔히 마주친다.286)박성현·이한우, 『파란 눈에 비친 하얀 조선』, 새날, 1999, 214쪽.

상수도 시설이 갖춰진 곳은 1945년까지 79개 도시뿐이었고, 1960년대에는 시 단위의 공동 수도 보급률이 28.6%에 지나지 않았다. 1970년대까지 도 수도가 보급된 가정은 드물어서 공동 수도에서 물지게를 지고 나르는 모습은 일상적인 풍경이었다. 하수도는 서울의 경우 청계천과 욱천이었는데, 일제 강점기에 이곳을 중심으로 하수도 정비가 이루어졌다. 특히 1917년부터 시행된 1차 하수 공사와 1924년부터 시행된 2차 하수 공사가 있었으나, 6·25 전쟁으로 파괴되어 1960년대까지 오수는 냇가, 강 혹은 집 주변에 버렸을 뿐 별다른 처리 시설이 없었다.

부엌 설비에 대한 사회적 논의는 상류층을 중심으로 위생 문제와 봉건적 유습 타파 문제와 연결되어 시작되었다. 1920년대 한국 사회를 휩쓸었던 생활 개선 운동에서 재래식 부엌의 개량은 주요 과제였다. 『조선일보』가 1927년 신년호에서 소개한 당시 여류 명사들의 가정생활에 대한 좌담회에서도 부엌 문제가 구체적으로 지적되었다.

조선 부엌은 서양이나 일본의 부엌과 비교하면 활용하기가 삼 배 이상 힘들겁니다. 부엌하고 잇대어서 바로 식당을 만들고 부엌과 식당 사이로 통하는 작은 문이 있어 그리로 음식을 가지고 드나들게 하면 시간 경제가 될 겁니다.

이와 같은 지적이 나오면서 취사용과 난방용 연료를 따로 쓰는 서구식 입식 부엌의 도입이 제기되기도 하였다. 그리고 부엌 개량의 주장은 주로 주부의 역할과 관련되어 논의되기 시작하였다.

여름엔 더구나 우리네 부엌이 불결합니다. 그것도 시골로 가면서는 주부들이 손수 부엌일을 하기 때문에 여간 깨끗지 않습니다. 그러나 서울 부엌은 우선 쓸데업는 세간은 만흔 데다가 주인아씨는 부엌에 들지 안코 웬만해서는 행낭이나 식모에게 맛기니 남의 일을 기계처럼 하는 그들이 알뜰이 거두기는 어려운 노릇입니다.287)『조선일보』 1939년 8월 3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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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길용 부엌
박길용 부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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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엌 개량이 더딘 이유를 ‘부엌에 들지 않는 주인아씨’의 문제로 이야기하였다. 시골 부엌과 서울 부엌을 대비시키는 것도 그렇거니와 부엌일을 하지 않는 봉건적 유습의 담지자(擔持者)로서 전통적인 여성인 ‘아씨’를 개량된 부엌에서 부엌일을 하고 있는 근대적인 여성인 ‘신여성’과 대비하였다. 이렇듯 개량된 부엌은 근대 문화의 상징으로 재구성되었으며, 개량 부엌을 소유하고자 하는 욕망이 넘쳐 났다.

그러나 부엌의 개량이나 변화를 더디게 하는 가장 큰 이유는 부엌을 여자와 하인이 드나드는 ‘여성만의 공간’으로 보는 전통적인 시각이었다. 1930년대 들어 박길용 등의 건축가가 주택 개량 관계 논문을 발표하면서 부엌 개선을 강력히 주장하였지만 일부 계층의 부분적인 관심만 끌었을 뿐 수백 년 전통의 재래식 부엌살림은 옛 모습 그대로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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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주택
문화 주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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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0년대부터 짓기 시작한 개량 한옥의 모습을 잠시 살펴보면, 장작 대신 연탄을 사용하였으며 난방용 아궁이와 취사용 화덕이 분리되고 부엌이 입식화하였다는 특징이 있었다. 부뚜막과 바닥이 시멘트 또는 타일로 바뀌어 위생적이었다. 그러나 수도는 부엌으로 들어오지 않아 마당의 우물이나 펌프 수도에서 길어다 사용하였다. 부엌이 마루에서 내려가 있었으며, 부엌의 뒷문으로 장독대와 연결되어 있었다.

부엌 개량의 필요성이 남존여비(男尊女卑)와 계급의식이라는 봉건제의 타파로 연결되면서 부엌을 중심으로 서구적인 생활 방식으로 개량할 것을 주장하였지만, 개량을 위한 사회적 기반은 거의 전무하였다.

1930년에 『조선일보』는 문화 주택에 대한 열망을 다음과 같이 꼬집기도 하였다.

문화 주택은 1930년에 와서 심하였는데, 호랑이 담배 먹을 시절에 어찌하여 재산푼이나 뭉뚱그린 채 제 부모 덕에 구미의 대학 방청석 한 귀퉁이에 앉아서 졸다가 온 친구와 일본 긴자통에 갔다온 친구들, 혹은 A, B, C나 겨우 알아볼 만한 아가씨가 결혼만 하면 문화 주택, 문화 주택하고 떠든다. 문화 주택은 돈만 많이 처들여서 서양 외양간 같이 지어도 이층집이면 좋아하는 축이 있다. 높은 집만 문화 주택으로 안다면 높다란 나무 위에 원시 주택을 지어 놓은 후에 ‘스윗트홈’을 베푸시고, 새똥을 곱다랗게 쌀런지도 모른지.288)『조선일보』 1930년 11월 28일자.

부엌살림에 새바람이 일기 시작한 것은 6·25 전쟁 뒤였다. 전쟁으로 옛집들이 온통 파괴된 데다가 사람들이 도시로 몰리면서 도시 곳곳에 새집이 들어섰고 주택 정책에 일대 변화가 일어났다. 대표적으로 주택난 해결을 위해 재건 주택이 지어졌는데, 대한 주택 영단은 1954년 정릉에 253개의 흙벽돌집을 지었다. 당시에 한옥과 양옥을 절충한 가옥이 대중화되고, 타일을 덮은 부뚜막과 개수대가 등장하였으며, 극소수지만 입식 부엌이 선보이기 시작하였다. 흙·돌·풀·나무 등 전통적인 건축 자재 외에 시멘트·유리·타일 등이 보급되고 부엌 연료로 연탄 사용이 늘어났다.289)『조선일보』 1956년 5월 30일자.

그러나 여전히 전통적인 부엌이 일반적이었고, 개량된 부엌은 일부분이었다. 1956년 모윤숙(毛允淑)과 박순천(朴順天)의 부엌 개량에 관한 대담에서 신여성을 대표하는 모윤숙의 발언에는 당시 현실이 잘 나타나 있다.

오늘날 경제적으로 평등한 사회를 만들어 가지고 이상적이고 민주적인 가정생활을 하자면 주부 자체가 노동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나라의 부엌 구조가 아직도 그대로입니다. 요새 가사과 나온 여자가 시집을 가본 즉 그 부엌이라 말이예요. 머릿속에 있는 부엌과 실제 부엌과 다르니까 그것은 욕할 수도 없습니다. …… 그래도 연기를 먹으면서 아궁지에 불을 집혀야지 그것을 내가 참아야지. 그렇게 생각하는 여자도 있지만 대게 여자가 학교에서 배운 것이라고는 부엌에 가서 기름으로 불을 때고 모든 것을 이상적으로 한다는 것이기 때문에 시집에 가서 부엌을 보면 이것이 기가 막혀요.290)『동아일보』 1956년 1월 17일자,

이상적인 부엌과 현실 사이의 괴리가 잘 드러나는 대목이다. 이와 같이 일제 강점기부터 광복 직후까지도 부엌의 근대적 개량은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다. 식민지를 거치면서 근대 담론의 전파자들은 부엌 개량을 통해 봉건적인 유습을 비판하고 생활 개선을 유도하였으나, 근대 문화의 담당 주체 였던 신여성조차도 이상과 현실의 괴리로 갈등할 수밖에 없었다. 부엌의 변화는 단지 부엌 시설의 변화만으로 가능하지 않았다. 이러한 갈등은 이상적인 가정과 이상적 주부의 상을 만들어 나가는 과정으로서 사회적인 물적 토대가 갖추어지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었다.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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