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13권 20세기 여성, 전통과 근대의 교차로에 서다
  • 제5장 붓그러하면 큰 병이 생깁니다
  • 4. 생리 휴가가 상징하는 것
  • 월경, 모성, 여성 노동
김미현

식민지 조선에서 월경에 대한 병리학적 인식은 일본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월경을 둘러싼 여러 논의는 ‘위생’과 근대 의학의 관점에서 여성 신체를 설명하였다. 근대 일본 사회에서는 식민지 조선의 방식과 다르게 월경 담론이 진행되었다.409)이하 일본 내 생리 휴가 담론의 전개 과정은 田口亞紗, 『生理休暇の誕生』 請弓社, 2003의 연구를 참고하였다. 다쿠치 이사는 생리 휴가를 요구한 여성들이 의료화 담론을 선택적·전략적으로 ‘유용(流用)’하였으며, 이를 ‘자기 확장’의 ‘동태적인 역사’로 적극 평가하고 있다. 이에 대한 서평으로는 中山いづみ, 「書評と紹介」, 『大原社會問題硏究所雜誌』 545, 2004.4를 참조할 수 있다.

일본에서 진행된 월경의 병리화 담론은 초기에는 여학생의 신체 교정과 보호를 문제 삼는 식이었다. 1910년대에 들어서면 일본의 여교원들은 월경의 병리화 담론과 모성 보호 담론을 연결시켜 월경 때의 노동을 지적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휴가를 주장하는 것은 아니었고, 여공을 포함하는 것도 아니어서 사회 문제화되지도 않았다.

그러다 『여공애사(女工哀史)』(1925)처럼 산업화의 폐해를 받는 여공들의 신체에 주목하는 인도주의적 이야기가 등장하였다. 다른 한편으로 사회주의 운동이 고양되면서 여공도 담론의 당사자로 등장하기 시작하였다. 또한 ‘모성 보호 논쟁’이 일어나서 모든 여성의 ‘모성’이 부각되고, 모성 보호 운동 논의의 대상에 여성 노동자도 포함되어 갔다.

1920년대 중반 이후 모든 여성을 당사자로 하는 생리 휴가 요구가 노동 운동가만이 아니라, 의학자를 포함한 남성 지식인 사이에도 퍼져 갔다. 월경의 병리화 담론, 인도주의적 서사, 모성 보호 담론이 결합되어 ‘월경 중의 노동 문제’라는 논점이 형성되었던 것이다. 1930년대 후반에는 ‘국민을 낳는 모성’과 ‘여성 노동력 동원’을 양립하려는 국가의 의도에 따라, 월경을 병리화하면서도 노동 현장에 노동 의학적인 감시와 보호가 필요하다는 주장도 등장하였다.

노동 현실 속에서 생리 휴가 주장이 나온 것은 1929년 7월 동경 시영 버스의 여성 차장들이 차별 대우 철폐와 함께 요구한 것이 처음이었다. 이후 센쥬(千壽) 식품 연구소(1931)와 만코 상회(万工商會, 1932)의 여성 노동자들이 생리 휴가를 획득하였다. 그러나 노동 운동 탄압 속에서 생리 휴가 요구를 내걸었던 노동조합은 극히 적었고, 이 권리를 행사할 수 있는 여성 노동자도 손꼽을 정도였다. 하지만 전후 일본 노동 운동에서 생리 휴가 투쟁, 모성 파괴에 대한 사회적 관심과 생리 휴가 필요성에 대한 여론이 형성되면서 자본가도 이런 상황을 무시할 수만은 없었기 때문에 마침내 1947년 4월 공포된 노동 기준법에 생리 휴가가 포함되게 되었다. 여성 노동자는 의사 의 판단 없이 여성 자신의 권리로서 생리 휴가를 요구하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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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민지 조선에서는 생리 휴가의 사회적 담론이 어떻게 진행되었을까? 일본에서는 모성 보호 논쟁이 있었지만, 조선에서는 논쟁이 없어서 생리 휴가 주장이 나오지 않았다는 식으로 간단히 정리해서는 안 된다. 일본에서는 여성의 야간 업무와 갱내 노동을 제한하는 공장법, 광업법 등의 여성 노동자를 보호하기 위한 최소한의 노동 관련법이 시행되고 있었다. 또한 일본 제국주의는 자본의 이익을 위해 구축한 식민지라는 착취 구조가 있었고, 이 속에서 같은 노동자라 하더라도 일본인과 조선인의 위치가 동일하지 않았다는 점도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다. 이런 상이한 사회적·구조적 배경 속에서 식민지 조선에서는 일본처럼 모든 여성을 대상으로 하는 생리 휴가 주장은 제기될 수 없었다.

공장법 등도 시행되지 않으며, 각종 노동 운동을 탄압하는 식민지 조선은 일본 자본이 장시간 저임금으로 여성 노동자를 착취할 수 있는 공간이었다. 이러한 노동 조건을 개선하려는 노력은 다양하였다. 조선에서도 자본가의 착취를 비난하는 사회주의자와 민족주의자들의 다양한 요구가 있었다. 여성 단체인 근우회(槿友會, 1927∼)는 강령을 통해, 여성 노동자의 임금 차별 철폐 및 산전 4주간·산후 6주간의 휴양과 임금 지불, 여성 및 유년공의 위험 노동 및 야간 근무 폐지를 요구하였다. 이 밖에 인도주의적 입장에서 조선에서도 공장법을 실시해야 한다는 요구는 질병 감염률, 작업 중 사망률, 과중한 노동 시간 등을 지적하는 형태로 나오고 있었다. 한편 여성 노동자는 노동 쟁의를 통해, 임금 문제를 비롯하여 인격적 대우, 산전 산후 휴 가, 수유 시간의 자유, 동일 노동 동일 임금 등을 요구하기도 하였다.

일제 강점기 여성 노동자의 문제는 민족 운동 혹은 계급 운동의 일부로 설정되었다. 민족주의적 목표 혹은 사회주의적 목표가 실현되면 여성 문제도 해결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되었다. 그러나 식민지라는 조건 속에서 민족의 해방, 노동자의 노동 조건을 개선하려는 움직임이 여성 보호의 차원으로 논의되는 일은 적었다.

더군다나 여성 노동자의 보호 문제가 공개적인 매체에서 논의되는 일은 드물었다. 간혹 모성 보호를 위해 여공의 노동 조건을 개선해야 한다는 신문 기사를 볼 수 있다. 직업에 따라 신체를 파괴하는 폐해가 있다고 전제한 후, 공장 여직공들이 과격한 노동, 장시간의 노동, 비위생적 설비로 모성의 자격을 파괴당하고 있다고 비판한다. 어떤 이는 한평생 임신하지 못하게 된다고 하면서, “이들에게 공장 직공이 되지 말라고 할 수 없다. 그곳에 가지 않으면 살 방도가 없기 때문”에, 모성을 위하여 사회적으로 할 일은 노동 조건의 개선, 공장 설비의 철저한 혁신이라고 주장하고 있다.410)『동아일보』 1927년 12월 24일자.

민족 문제 차원에서 여성 노동자 보호를 호소하는 경우도 있었다. 평양의 한 기자는 지방 논단을 통해 평양의 공장주에게 10시간 노동제, 위생을 위해 씻을 수 있는 공간, 신문과 잡지를 갖춘 공간, 공장 간 연합 야유회 같은 것을 요구한다. 그러나 그는 20세 미만의 노동자들은 민족의 장래이자, 민족의 동포임을 생각하여 실행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411)『동아일보』 1929년 5월 8일자. 민족의 장래를 책임지는 것은 여성이기 때문에 ‘계집아이’일 때부터 건강하도록 관리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일제 강점기 신문, 잡지의 내용은 대개 실태를 전달하는 수준에 그쳤다. 예를 들어 일본에서 동경 시영 버스 여성 차장들의 사례를 인용하면서, 월경 불순, 무월경증, 요통 등 각종 질환이 생기고 있으며 미혼 여성에게 많이 나타난다고 강조한다. 이렇게 장시간 노동이 여성의 신체에 많은 영향을 미친다는 정보는 주고 있지만, 마지막에는 모든 부인에게 유해한 것은 아니고, 어떤 체질인가에 따라 어떤 직업에 나갈지가 다르다며 개인의 선택 문제로 마무리하고 있는 것이다.412)『중앙일보』 1932년 12월 5일자.

식민지 조선에서 여성의 직업은 끊임없이 가정과 연결 지어 논의되었다. 남성과 달리 여성에게 있어 직업과 모성은 선택해야 하는 어떤 것으로 대비되었다. 한 가지 생각해 볼 점은 같은 여성 노동임에도 ‘여공’과 ‘직업 부인’은 일정하게 분리하여 거론되었다는 것이다. 이는 학력, 직업적 특성과 아울러 신여성이라는 점이 연결되어 구분된 면도 있지만, 그 안에는 엄연히 계층적 차별성이 존재하고 있었다. ‘여공’은 가난하고 불쌍한 존재로 원래 그렇게 일할 수밖에 없지만, ‘직업 부인’은 (실제 노동 내용과는 거리를 둔 상태에서) 자기 일을 하는 신여성으로 논의된 면이 있었다. 그렇기에 직업 부인을 둘러싸고, 직업과 가정은 계속 저울질되었고, 양립 가능한 것에서 가정으로 돌아가야 하는 것으로 점차 바뀌었다. ‘직업 부인’이 계층적 차별성이 떨어져 가는 양상(성적 타락 여부, 기품)을 보여 감에 따라, ‘직업 부인’의 정조 문제나 직업으로 앓게 되는 부인병이 우려되고, 결국 직업보다는 유능한 가정 관리자이길 권하는 식으로 바뀌어 갔던 것은 아닐까? 이에 반하여 ‘여공’은 노동하는 여성임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처한 ‘가혹한 노동 조건’은 그들의 숙명처럼 묘사될 뿐이었다.

앞에서 볼 수 있었듯이 여성 노동자 보호의 문제는 여러 차원에서 이야기되었지만, 일본의 경우처럼 여성의 월경과 모성 보호를 연결시켜 여성 노동자를 보호해야 한다는 사회적 논의는 조선에서는 거의 일어나지 않았다.

한 가지 주목할 것은 노무 관리의 차원에서 조선인 여성 노동자의 월경을 조사한 내용이다. 1935∼1936년에 평양 지방 전매국 여공들을 대상으로 한 조사가 그것으로, 정책적 맥락보다는 일본 내 노무 관리론의 영향을 받아 ‘조선적 특징’을 살펴 보려는 것이었다. 저자가 밝힌 배경을 보면, 조선인 여성의 체위 상황을 조사하기 위하여 표본으로 평양 지방 전매국 여공이 선정되었다고 한다. 여성의 사춘기를 정신적·신체적 성숙과 변동을 완성 하는 시기로 의미화하고, 이것의 지표로 월경을 지목하면서 그 시작 시기 등을 검토 대상으로 삼고 있다. 그리고 사춘기에 있는 여성을 고용한 공장에서는 그들에게 부과하는 산업적 부담이 신체적 저항력을 파괴하지 않도록 적정한 환경을 제공해야 한다고 지적하고 있다.

이 조사는 일본 내 노무 관리론의 영향 속에서 ‘조선의 노동 자원’ 차원에서 노동력 활용을 염두에 둔 자본가의 입장을 배경으로 하고 있었다. 또한 일본인과 조선인을 비교하는 우생학적 조사의 일환이기도 하였다. 이것을 조사한 마유즈미 다케테루(黛武輝)는 평양 전매국 제조과 소속으로 1935년 9월부터 1936년 9월까지 1년 동안 평양 지방 전매국 공장에서 일하는 전체 여공 357명 중 267명을 조사하였다. 개인별 심문법을 취했는데, “수치심 때문에 조사 곤란한 것이 많으나 비교적 나이 많은 의무용 잡역부를 사용하여 상세하게 기록하는 것이 가능하였다.”고 한다. 조사 항목은 월경 시작 나이, 시작 시기의 계절적 분포도, 결혼 연령과의 관계, 도시 거주자와 농촌 거주 비율 등이다. 도출해 낸 결론은 일본 여성이 16세에 85%가, 조선 여성은 18세에 95%가 월경을 시작한 점, 조선의 조혼(早婚) 풍습 때문에 월경을 하지 않는 16세 이전에 벌써 결혼한 사람도 있다는 점이 주류를 이룬다.413)黛武輝, 「半島女工の體位狀況調査」, 『朝鮮』 1939년 8월호. 이 조사를 바탕으로 구체적인 노무 관리 대책이 나왔거나 실시되었을 것으로 보기는 힘들다. 유년 노동자의 보호 문제, 노동 조건의 개선보다는 조혼을 조선 여성 노동자의 특이성으로 지적하는 데 초점을 두고 있기 때문이다.

월경을 시작하는 나이가 늦어 결혼을 늦게 해도 되는데, 조혼 풍습 때문에 재직 연수가 짧다는 점이 조선 여성 노동자의 문제점으로 지적하는 식이었다. 그리하여 ‘적령기’에 결혼하도록 하는 것이 생활 향상과 노동 능률 향상에 중요하다는 결론으로 연결되었다.414)朝倉昇, 『朝鮮工業經濟讀本』, 朝倉經濟硏究所, 1937, 32∼40쪽 일제 자본가의 입장에서 노동 능률의 향상은 노동 조건의 개선이 아니라 조선 여성이 ‘관습’에서 벗어나는 데 달려 있다고 주장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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