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14권 나라를 지켜낸 우리 무기와 무예
  • 제2장 오백 년 사직을 지킨 고려의 무기와 무예
  • 1. 종래 무기와 무예의 계승 및 발전
  • 건국과 강군 육성
김대중

918년 태조 왕건이 세운 고려는 1392년 이성계가 새로운 왕조 조선을 개창하기까지 존속하였다. 왕조의 수명은 475년으로 조선 왕조와 견주어 볼 때 크게 차이가 나지지 않는다. 엄밀히 따지자면 왕조의 수명이 조선은 500년을 약간 넘었으나 고려는 500년에 조금 못 미쳤을 뿐이다. 따라서 ‘고려 왕조 오백년’이라고 하여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더욱이 고려는 조선에 비해 이민족과 전쟁을 여러 차례 치렀다. 자의든 타의든 고려는 거란의 요, 여진의 금, 몽고의 원과 전쟁을 벌였던 것이다. 전쟁은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고려는 원나라의 일본 정벌에도 두 차례 동원되었으며, 홍건적(紅巾賊)의 침입도 받았다. 수많은 왜구(倭寇)의 침입과 약탈은 고려를 더없이 괴롭혔다. 크고 작은 전쟁을 벌였던 고려가 어떻게 ‘오백 년’을 버틸 수 있었을까? 이 점을 무기와 무예의 관점에서 설명해볼까 한다. ‘고려시대, 그 오백 년을 지킨 주인공’이 바로 무기와 무예라는 이야기이다.

무기는 전쟁을 수행하는 도구이다. 무예란 흔히 병기나 무력을 이용하 여 자신을 방어하고 상대와 겨루는 기예 또는 기술을 의미하지만, 전근대 사회에서의 무예는 국가 방어 체제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다시 말해 무예는 개인의 완력은 물론이고 병기를 다루는 기술을 포함한 모든 전투 능력을 의미하였다.60)심승구, 「한국 무예의 역사와 특성-도수 무예를 중심으로-」, 『군사』 43,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2001. 8. 236∼243쪽 ‘무예의 개념과 범주’ 참조. 특히 고려시대의 무예는 개인보다는 군사로서의 무적 자질과 능력의 표현인 동시에 군대의 전투력 내지 국방력의 근간이었다.

고려는 전국 각 지역의 호족(豪族)들을 연합하여 세운 국가였다. 신라 말 고려 초에는 국왕과 지방의 호족 사이에 상보적인 필요에 의해 일정한 형식과 절차를 거쳐 군신 관계를 맺는 ‘귀부(歸附)’라는 정치적 행위가 이루어졌다.61)신호철, 「신라 말 고려 초(9세기 말∼10세기 말) 호족과 국왕」, 『한국사에 있어서 중앙과 지방』, 서강 대학교 출판부, 2003. 따라서 호족과 연합하여 세운 고려 왕조는 지방과 타협을 통하여 공존을 모색하였다. 중앙은 군현제의 시행을 통하여 지방을 지배하면서 지방 세력의 공간에 대해서는 자율성을 보장해 주었던 것이다.62)박종기, 「왕조의 장기 지속성과 고려의 지방 사회」, 『한국사에 있어서 중앙과 지방』, 서강 대학교 출판부, 2003. 고려가 문·무반(文武班)을 중심으로 국가를 안정적으로 이끌어가려 했던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무반도 문반과 함께 국가 운영에 참여하였다. 유교적 정치 이념을 지향한 고려였지만 그렇다고 무(武)를 소홀히 여기지 않았다. 그것은 국가가 존립하려면 국내의 치안 유지는 물론이고 대외 국방 문제가 해결되어야 했기 때문이었다. 거란·여진·몽고·홍건적·왜구 등의 침략에 대비해야 했던 것이 고려의 현실이었다. 따라서 고려의 무기와 무예는 전쟁의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고려가 나라를 세우고 강력한 군대를 조직하면서 무기와 무예 분야에 비중을 둔 것은 당연한 것이었다.

고려의 무기와 무예는 기본적으로 삼국시대의 그것을 계승하였다. 앞서 고대 무기의 기본은 창·활·칼이라고 하였듯이, 고려에서도 이들 무기를 중요하게 여겼다. 고려가 후삼국을 통일하고 세워졌다는 점에서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후삼국을 통일한 고려의 왕건에게 귀부한 호족들 역시 후삼국시대에 성주·장군 등으로 불리던 자들이었다. 따라서 왕건과 그에게 협력했던 호족 휘하의 군사들이 소지했던 무기가 고려에 이어졌을 것임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실제로 후삼국 통일 전쟁과 관련하여 다음 기록에서 이 점을 알 수 있다.

왕이 친히 군사를 거느리고 운주(運州, 충남 홍성)를 정벌하니, 견훤이 이 소식을 듣고 갑사(甲士) 5,000명을 뽑아 세우며 “양편의 형세가 비슷하여 서로 싸우면 무지한 병졸만 살상될까 염려되니 화친을 맺어 각기 국경을 보전 합시다.” 하였다. 왕이 장수들을 불러 의논할 때 유금필(劉黔弼)이 “오늘의 형세로는 싸우지 않을 수 없으니, 원컨대 임금께서는 신들이 적군을 부수는 것만 보시고 근심하지 마십시오.”라고 하였다. 후백제가 진을 형성하기 전에 강한 기병 수천 명으로 돌격하여 적 3,000여 명을 목 베고, 술사(術士) 종훈(宗訓)과 의사(醫師) 훈겸(訓謙) 그리고 용맹한 장수 상달(尙達)과 최필(崔弼)을 사로잡았다. 고려가 이겼다는 말을 듣고 웅진(熊津, 충남 공주) 이북의 30여 성이 스스로 항복하였다.63)『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권1, 태조 17년 9월.

이렇듯 왕건은 예하 기병 수천 명으로 견훤의 병력 3,000여 명을 참살하였다. 왕건이 정예 갑사로 구성된 견훤의 군사를 제압할 수 있었던 것은 기병의 운용에 있었다. 그렇다면 왕건의 기병 부대가 사용한 무기는 기본적으로 창·활·칼이었을 것이다. 실제 운주 전투에서 왕건은 창·활·칼로 전투를 벌여 승리를 거두었다. 이 가운데 왕건 부대가 전투에서 사용한 활은 다름 아닌 각궁(角弓)이었을 것이다.

각궁은 가장 많이 쓰던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활이라는 점에서 그러하다. 후궁(㢿弓) 또는 장궁(長弓)이라고도 하고, 작은 활을 뜻하는 고()라고 약칭하기도 하였다. 또한 동개에 넣어서 등에 짊어질 수 있기 때문에 동개활이라고도 하였다. 무소뿔·참나무·소 힘줄·실 등을 복합적으로 붙여 만든 각궁은 탄력성이 매우 강하다. 각궁은 간각(幹角)·근(筋)·교(膠)·사(絲)·칠(漆) 등의 여섯 가지 재료로 만들었다. 간은 참나무·대나 무·뽕나무를 쓰고, 각은 물소 뿔(水牛角), 근은 소 힘줄(牛筋), 교는 민어풀을 쓰는 것이 원칙이었다. 각궁의 사정거리는 약 250m에 달하였다.64)김대중, 「궁시」, 『우리나라의 전통 무기』(특별전 도록), 2004, 97쪽. 이렇듯 왕건 부대는 창칼과 함께 활을 사용하여 후백제와의 후삼국 통일 전쟁에서 수세를 공세로 바꾸는 계기를 마련하였다.65)장학근, 『고려의 북진 정책사』, 군사 편찬 연구소, 2004, 39∼4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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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가 삼국시대의 무기를 그대로 수용하였다는 점은 후삼국 통일 전쟁 최후의 결전이었던 일리천(一利川, 경북 선산) 전투에서도 알 수 있다. 일리천 전투에서 왕건 군대의 선봉에는 기병이 있었다. 왕건 휘하의 대장군 대상(大相) 공훤(公萱)과 원윤(元尹) 능필(能弼)과 장군 왕함윤(王含允) 등이 이끌던 기병 300명이 바로 그들이다. 기록에 의하면 “갑오에 일리천을 사이에 두고 진을 쳤다. …… 또 대장군 대상 공훤과 원윤 능필과 장군 왕함윤 등으로 기병 300과 여러 성의 군사 1만 4700을 거느리게 하여 삼군(三軍)의 지원병을 삼아 북을 울리며 앞으로 나아가는데 문득 칼과 창 같은 모양을 한 흰 구름이 우리 군사의 머리 위에서 일어나더니 적진을 향하여 날아갔다.”고 한다.66)『고려사』 권2, 세가(世家)2, 태조 19년 9월. 이 전투에서 왕건 휘하의 장수 및 군사들이 쓴 주무기는 바로 칼과 창이었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왕건의 후삼국 통일 전쟁에 참전하였던 병력들이 고려 전기 군대의 골간이 되었다는 사실이다. 이 사실은 고려의 무기와 무예가 삼국시대의 그것을 계승하였다는 점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고려가 후삼국을 통일하기 위하여 최후의 일전을 준비할 때 주력군은 4만 3000명이었다.67)『고려사』 권2, 세가2, 태조 19년 9월.

그 4만 3000명은 지천군(支天軍) 1만, 마군 2만, 보천군(補天軍) 1만, 우천군(祐天軍) 1,000, 천무군(天武軍) 1,000, 간천군(杆天軍) 1,000으로 이루어졌다. 주력군 외에도 앞서 언급한 기병 300명과 여러 성의 군사 1만 4700명으로 편성된 예비대가 있었으며, 삼군과는 별도로 명주 대신 왕순식(王順 式), 대상 긍준(兢俊) 등은 흑수(黑水)·달고(達姑)·철륵(鐵勒) 등으로 이루어진 북방 야인 기병대 9,500명을 지휘하였다. 당시 고려가 동원한 군사는 모두 8만 7500명이었다. 이 가운데 보병을 제외한 마군 혹은 기병은 2만 9800명이었다. 마군과 기병의 역할이 다를 것이라는 점은 좀 더 검토를 요하지만, 3만 명에 달하는 마군과 기병은 매우 큰 규모의 군사력이라고 판단된다. 따라서 고려 초기의 무기와 무예는 삼국시대의 그것을 이어서 사용하였으며, 그 가운데 기병이 중심이었다. 그것은 건국 초에 강력한 군대를 양성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와 관련하여 고려를 세운 왕건에 대해서 살펴보기로 보자. 왕건은 궁예의 휘하에 들어가 발어참성(勃禦塹城)을 쌓고 그곳의 성주가 된 20세부터68)『고려사』 권1, 세가1, 태조총서(太祖總序). 936년 후삼국을 통일하는 60세까지 무장으로 활약한 인물이다. 그는 육상뿐만 아니라 해상 전투에서도 유명한 지휘관이기도 하였다. 왕건이 “정주(貞州) 포구에서 전함 70여 척을 정비하여 병사 2,000명을 싣고 나주(羅州)에 이르니 후백제와 해적들이 태조가 다시 온 것을 알고 모두가 두려워하여 감히 움직이지 못하였다.”69)『고려사』 권1, 세가1, 태조총서.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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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태조 왕건상
고려 태조 왕건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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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상과 해상을 아울렀던 왕건이 후삼국을 통일할 수 있었던 결정적 요인은 그가 기병을 투입한 데 있었다. 건국 초 고려는 기병 중심의 병기 무예가 중심이 되었을 것이다.70)한국 무예의 개념 분류에 대해서는 심승구, 앞의 글, 242쪽 참조. 따라서 기병이 주로 사용하던 창·활·도검이 주류를 이루었다.71)고구려 고분 벽화에서 가장 많이 보이는 무기는 철투겁창(鐵矛)이며, 그 다음으로는 둥근고리칼(環頭大刀), 쇠도끼(鐵斧), 단도(短刀), 쇠손칼(刀子) 순이다. 이와 관련해서는 이인철, 「4∼5세기 고구려의 남방 경영과 중장기병」, 『군사』 33, 국방 군사 연구소, 1996, 3∼13쪽 및 서영교, 「고구려 벽화에 보이는 고구려의 전술과 무기」, 『고구려 연구』 17, 고구려 연구회, 2004 참조.

후삼국 통일 전쟁에 동원되었던 이들 부대들은 후일 고려의 군대 조직에 어떤 영향을 미쳤을까 궁금해진다. 태조대에 동원된 부대들 가운데 지천군·마군의 좌강(左綱)과 보천군·마군의 우강(右綱)은 당나라에서와 같이 좌위(左衛)·우위(右衛)로 하였다가 6위(衛)로 편성하였을 것이다. 또 우천군·천무군·간천군의 중군은 병력 수로 보아 후일 응양군(鷹揚軍)과 용호군(龍虎軍), 곧 2군(軍)의 모체가 되었을 것이다.72)이기백, 「고려 경군고」, 『고려 병제사 연구』, 일조각, 1968, 51∼52쪽.

6위의 설치에 관해서는 “관청(所司)으로 하여금 각기 6위 군영을 만들어 직원과 장수를 비치(備置)하고 그 군사로 하여금 잡역을 면제토록 하라.”는 기록이 있다.73)『고려사』 권81, 지(志)35, 병(兵)1, 병제(兵制), 목종 5년 5월. 1002년(목종 5)에 6위의 군영을 지었으며 직원과 장수를 비치하였다는 것은 6위의 창설·직장(職掌)·임무에 대한 관심을 나타낸 것이다.74)이기백, 앞의 글, 67쪽.

이를 계기로 고려의 중앙군인 경군(京軍)은 2군 6위 체제를 갖추어 나갔다. 6위가 형성된 시기는 995년(성종 14)으로 생각되는데, 좌우위(左右衛)·신호위(神虎衛)·흥위위(興威衛)·금오위(金吾衛)·천우위(天牛衛)·감문위(監門衛) 등의 여섯 부대를 말한다. 6위 가운데 핵심을 이루는 좌우위·신호위·흥위위는 개경 수비는 물론 변방 방어의 임무까지 맡았다. 또 금오위는 경찰, 천우위는 의장(儀仗), 감문위는 궁성 안팎 여러 대문의 수위를 담당하였다. 6위의 병력은 4만 2000명이었다.75)이기백, 『한국사신론』(신수판), 일조각, 1990, 165쪽. 이 6위보다 약간 늦게 형성된 응양군과 용호군의 2군은 국왕의 친위군으로서 6위보다 우위에 있었다. 2군의 병력은 3,000명을 두었다.

<표> 고려 경군의 조직
단위 부대 군(軍)·위(衛) 영(領) ? 오(伍) 대(隊)
병력 수   1,000명 200명 50명 25명
지휘관 상장군 · 대장군 장군 · 중랑장 낭장 · 별장 · 산원 오(교)위 대정
합의 기구 중방 장군방 ? 낭장방 ? 산원방 교위방 ?

2군 6위에는 각기 정(正)·부(副) 지휘관으로 상장군(上將軍)·대장군(大將軍)이 있었다. 무신의 최고위를 차지하는 상장군과 대장군들은 그들의 회의 기관인 중방(重房)을 가지고 있어서 문신들의 도당(都堂)과는 대조되었다. 2군 6위는 모두 1,000명의 군인으로 조직된 영(領)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영은 병종에 의하여 보승(保勝)·정용(精勇)·역령(役領)·상령(常領)·해령(海領)·감문위령(監門衛領) 등으로 구분되었다. 모두 45령, 즉 4만 5000명이었다. 영의 지휘관은 장군(將軍)이었으며, 이들도 그들의 회의 기관인 장군방(將軍房)을 갖고 있었다.76)이기백, 앞의 책, 165쪽. 이처럼 고려 군제는 보병 중심으로 조직되었다.

고려의 병제는 건국 초기 기병 중심에서 보병 중심으로 변화하였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무예의 중심도 보병 중심으로 바뀐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보병에서 기초적으로 요구되는 도수(徒手, 맨손) 무예의 중요성은 커졌을 것이다. 군인·무반에게 요구되는 기초 체력의 유지는 매우 필수적이었다고 이해된다. 『고려사』에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는 활쏘기라든가 국왕의 사열에 대비하는 것은 일정한 체력을 유지해야 가능한 일이었다. 그렇다고 하여 병기를 다루는 무예를 소홀히 할 수는 없었다. 보병들이 임무를 수행하기 위하여 갖추는 기본 무기인 도검(刀劍)은 특히 그러하다.

도와 검은 전통 무기 가운데 대표적인 단병기(短兵器)이다. 주로 근접 전투에서 쓰는, 길이가 짧은 병기인 것이다. 도는 날이 한쪽에만 있으며 곡선 형태이다. 본디 자루가 길면서 칼집도 없었다. 주로 베어서 살상 효과를 냈다. 반면에 검은 날이 양쪽에 있으며 직선 형태이다. 도에 비해서 자루가 짧고 칼집이 있다. 검은 베는 것 외에도 살상 효과를 높일 수 있다. 전투에서는 도를 보편적으로 사용하였다. 전투용 도의 보편화 추세는 패용(佩用)하기 편리하도록 종래 검에만 있던 칼집을 도에도 갖추게 하였던 것으로 보인다.77)도와 검의 구분은 후세로 오면서 혼용되었다. 그것은 조선 1790년(정조 14)에 편찬된 『무예도보통지(武藝圖譜通志)』의 기록에서 확인된다.

고려시대 보병들이 실제 갖추었던 도검은 처인성(處仁城)터에서 시굴(試掘)된 유물을 통하여 형태와 특성을 짐작할 수 있다. 이 도검의 형태는 칼끝으로 가면서 폭이 좁아지고 칼등이 일직선을 이루고 있다. 이러한 형태는 삼국시대의 도검에서 한층 발전한 것으로 보인다. 삼국시대의 둥근고리칼(環頭大刀)에는 칼을 쥔 무사의 손을 보호하기 위한 장치가 마련되지 않았던 데 반해 고려시대의 그것에는 칼날과 자루 사이에 타원형의 칼코가 있어 칼을 쥔 손목을 보호할 수 있게 제작되었다. 이는 길고 곧으며 칼코를 가진 도가 사용되었다는 『고려사』나 『고려도경(高麗圖經)』의 기록과 일치한다.78)이성제, 「도검」, 『우리나라의 전통 무기』(특별전 도록), 전쟁 기념관, 2004, 9∼30쪽 참조. 고려시대의 군인들은 처인성에서 출토된 도검과 같은 형태의 도검으로 무장하고 전투에 대비하여 도검술을 익혔던 것이다.

6위 가운데 금오위는 곤봉을 소지하였다고 여겨진다. 『사물기원(事物紀原)』에 의하면 한나라 때 집금오(執金吾)라는 벼슬이 있었는데, 여기서 금오는 봉(棒)을 의미한다고 한다. 이 점에서 금오위가 치안 유지용 곤봉을 소지한 부대였음을 알 수 있다.79)김낙진, 「곤봉」, 『우리나라의 전통 무기』(특별전 도록), 전쟁 기념관, 2004, 85쪽 참조. 그러나 금오위는 임무를 수행하는 데 필요한 무기로서 봉을 소지하였을 것이다. 따라서 이들은 봉술을 연마하였을 것이다. 이 밖에도 타격 무기 가운데 골타(骨朶)가 있었다. 골타는 타격 병기인 추(錘)의 일종으로 손잡이가 긴 형태이다. 『고려사』 「여복지(輿服志)」에는 왕의 의장 행렬에 은골타를 소지한 부대로 보이는 은골타자대(銀骨朶子隊)가 나온다.80)『고려사』 권72, 지26, 여복(輿服) 의위(儀衛). 은골타는 은을 입힌 추 모양으로 생긴 무기였을 것이다.81)은골타는 실전용이라기보다는 의장물로 주로 사용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김낙진, 「타격 무기」, 『우리나라의 전통 무기』(특별전 도록), 전쟁 기념관, 2004, 85∼89쪽). 실전용으로 보이는 골타는 철로 된 것도 있었다. 충혜왕대에 철골타가 타살 무기로 사용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고려사』 권36, 세가36, 충혜왕 후 즉위년 5월). 감문위는 궁궐 수비를 교대할 때 필요한 일정한 제식 훈련이 필수적이었을 것이다. 의장을 맡은 천우위는 기치(旗幟)라든가82)고려시대의 기치는 『고려도경(高麗圖經)』에 의하면 상기(象旗), 해마기(海馬旗), 태백기(太白旗), 응준기(鷹準旗), 봉기(鳳旗)가 있었다. 도검이라든가 창을 이용한 무예를 중요하게 여겼을 것이다. 실제로 고려의 군인들은 창을 많이 휴대하였다. 1123년(인종 1)에 고려를 방문한 송나라 사신 서긍(徐兢)이 와서 보고 기록한 『고려도경』에는 “꺾창인 과(戈)와 투겁창인 모(鉾)를 휴대한 병사가 만 명에 이른다.”83)서긍(徐兢), 『고려도경』 24, 절장(節仗) 초신기대(初神旗對).고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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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의 도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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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시대의 무기를 계승하였던 고려는 무기의 형태를 조금씩 발전시 켜 나갔던 것이다. 무예도 군제가 갖추어지면서 기병 중심에서 보병 중심으로 바뀌어 갔다. 따라서 도수 무예를 기본으로 각 위의 임무와 직결된 무예를 연마해 나갔을 것으로 여겨진다. 이러한 변화는 고려가 안정기로 접어들었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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