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14권 나라를 지켜낸 우리 무기와 무예
  • 제2장 오백 년 사직을 지킨 고려의 무기와 무예
  • 1. 종래 무기와 무예의 계승 및 발전
  • 여진 정벌 후 무예 진흥책의 시행
김대중

여진 정벌 후 고려에서는 무예 진흥책을 내놓았다. 무예 진흥책이 나온 시기는 문종 때이다. 문종대는 귀족 정치가 발달하였던 시대이며 동시에 무반의 세력도 꾸준히 성장하였다. 1076년(문종 30)에 제정된 전시과(田柴科)에서 무반에 대한 대우가 상승되었다. 이와 같은 추세는 북방의 여진족과의 문제가 커지면서 계속되었다. 숙종대 이후에는 무관의 정치적 진출이 많이 이루어졌으며, 예종 초에는 여진과 전쟁을 치르는 과정에서 무인 세력이 상승하였다.97)변태섭, 「고려 무반 연구-무신란전의 무반을 중심으로-」, 『아세아 연구』 8-1, 1965 : 『고려 정치 제도사 연구』, 일조각, 1971, 359∼365쪽. 이러한 시대 분위기는 무예를 중시하게 만들었고, 예종도 무예를 진흥하기 위한 제도적 장치를 마련하였다. 1109년(예종 4) 무학재(武學齋)의 설치가 바로 그것이었다.98)신천식은 「고려시대 무과와 무학」, 『군사』 7, 국방부 전사 편찬 위원회, 1983, 180∼181쪽에서 무학이 국학 7재 이전부터 존치되고 있었다고 하였다.

무학재는 국학(國學) 안에 설치되었다. 이름하여 강예(講藝)라고 하였는데 시취(試取)하여 한자순(韓自純) 등 여덟 명을 나누어 거처하게 하였다. 무학재의 규모는 6재에 70명의 유학생이 소속된 유학재(儒學齋)에99)『고려사』 권74, 지28, 선거(選擧)2, 학교(學校) 국학(國學). 비하면 비교 대상조차 되기 어렵지만, 무학재의 설치는 그 자체로 큰 의미를 가진다. 그것은 국가가 무인들을 전과 달리 중요하게 여겼다는 것을 반증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무인을 양성하려면 무학 내지는 무예를 전문적으로 교육하는 기관이 필요하였던 것이다.100)변태섭은 여진에 대한 정벌로 무인 세력이 상승한 결과가 무학재의 설치로 나타났다고 보았다. 당시 문반 세력의 대두와 대여진 관계의 긴급성에 따른 시대적 요구라는 것이다(앞의 책, 362∼363쪽)

이후 유학재의 유학생은 70명에서 60명으로 줄어든 데 반해 무학생은 8명에서 9명으로 늘어났다.101)『고려사』 권74, 지28, 선거2, 학교 국학. ‘문과 무는 어느 한 쪽에 치우치거나 폐지할 수 없는 것’이라는 예종의 교육 이념이 무예 진흥책에 강력하게 반영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진흥책은 거란이나 여진족과의 전투를 통한 훈공(勳功)을 통하여 무인의 지위가 상승되었음을 말해 준다. 고려 정부로서도 이민족의 침략에 대비하려면 무인들이 필요하다는 점을 절감하였다는 것을 반증하고 있다. 1109년(예종 2)에 윤관이 9성을 축성하기 시작하였던 점도 무예의 장려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무학재, 즉 강예재에서는 어떤 내용을 공부하였을까? 이름으로 보아 강(講)과 예(藝) 즉, 병서에 대한 강독과 실기인 무예를 연마하였을 것으로 짐작된다. 병서에 공부에는 틀림없이 『김해병서(金海兵書)』가 들어 있었을 것이다. 『김해병서』의 배포는 무학재가 설치되기 이전인 1040년(정종 6) 직후에 이루어졌다. “『김해병서』는 무략(武略)의 요결이니 연변의 여러 고을과 진(鎭)에 한 권씩 하사하소서.”라고 서북로병마사(西北路兵馬使)가 청하여 정종이 그대로 시행하였다는 기록에서 알 수 있다.102)『고려사』 권81, 지35, 병1, 병제, 정종 6년 8월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별집(別集) 14, 문예전고(文藝典故) 병서류(兵書類) ;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115, 병고(兵考) 7, 병서(兵書). 『김해병서』가 배포된 시기는 고려가 거란과의 전쟁을 끝내고 여진이 자주 노략질을 일삼는 동계(東界) 지역에 축성 사업을 시작할 무렵이다. 특히 동계와 북계를 연결하는 천리장성의 축조(1033∼1044)는 북방 민족의 방어를 목적으로 이루어졌다.103)정해은, 『한국 전통 병서의 이해』, 국방부 군사 편찬 연구소, 2004. 서북로병마사가 여러 읍진에 『김해병서』를 배포하자고 왕에게 건의하였던 까닭은 이 책을 바로 ‘무략의 요결’로 이해하였기 때문이었다. 다시 말해 북방 민족의 침략에 대해 방어할 수 있는 핵심적인 내용을 알기 쉽게 풀이한 것이 『김해병서』였다고 이해해도 좋을 것이다.

‘무략의 요결’로 일컬어졌던 『김해병서』는 적어도 삼국시대부터 전해내려 온 각종 병서를 참고하여 찬술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삼국시대 에는 당시 중국에서 많이 익히던 『손자(孫子)』·『오자(吳子)』·『육도(六韜)』·『삼략(三略)』·『사마법(司馬法)』 등의 병서가 널리 퍼져 있었다. 이들 병서가 고려시대 병서의 간행에 참고 되었을 것임은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김해병서』보다 이후에 간행되었지만 『삼국사기』나 『삼국유사』를 편찬할 때 중국의 기록들을 참고하였다는 점이 이를 방증해 주기에 충분하다. 또한 통일신라시대에 존재하였던 『화령도(花翎圖)』, 『안국병법(安國兵法)』을 무학재에서 읽었을 것이다.104)정해은, 앞의 책, 31∼34쪽.

무예와 관련해서는 궁술을 수련하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1069년(문종 23) 3월 판(判)에 “여러 주의 일품별장(一品別將)은 부호장(副戶長) 이상으로, 교위(校衛)는 병정(兵正)·창정(倉正)·호정(戶正)·식록정(食祿正)·공수정(公須正)으로, 대정(隊正)은 부병정(副兵正)·부호정(副戶正)·제단정(諸壇正)으로 하되 궁과(弓科)로 시험 선발하여 충당케 하라.”고 하였다.105)『고려사』 권81, 지35, 병(兵)1, 병제. 궁술은 심신 수련은 물론 병기 무예에도 빼놓을 수 없다. 무인 선발을 궁과로 하였다는 점은 궁술이 무인의 역할을 하는 데 얼마나 좋은 무예인가를 말해 주고 있는 것이다. 실제로 고려는 중앙의 관리들에게 궁술을 연마하도록 하였을 뿐만 아니라,106)『고려사』 권81, 지35, 병1, 병제. 각 지방에서도 매월 활과 쇠뇌를 익히도록 하였다.107)『고려사』 권81, 지35, 병1, 병제, 현종 9년 9월. 이로 미루어 보아 예종대 무학재에서도 실기로 궁술을 연마하였다고 생각된다.

1015년(현종 6)에도 무예를 시험하여 과등(科等)을 정한 적이 있었다. 그 해 9월에 현종이 선화문에 거둥하여 3위와 응양군의 공신 자손 및 문무 6품 이하의 무예가 있는 자들을 모아 시험하여 과등을 정하였던 것이다.108)『고려사』 권81, 지35, 병1, 병제. 이때의 무예 시험도 궁술이었을 것이다. 현종대뿐만 아니라 예종대를 거쳐 그 이후의 국왕들도 궁술의 연마를 중요하게 여겼다. 문무백관들이 모여 활쏘기를 하였음은 물론이거니와 정규적으로 사열을 통하여 군사의 활쏘기를 점검하였다.109)김대중, 「궁시」, 『우리나라의 전통 무기』(특별전 도록), 전쟁 기념관, 2004.

이렇게 무학재를 설치한 까닭은 국가 방어를 서두르지 않을 수 없었던 사정과 관련이 있었다. 1032년(덕종 원년) 3월에 상사봉어(尙舍奉御) 박원작(朴元綽)의 청에 따라 혁거(革車)·수질노(繡質弩)·뇌등석포(雷藤石砲)를 만들고, 또 팔우노(八牛弩)와 24반 병기를 변방의 성에 설치하였다.110)『고려사』 권81, 지35, 병1, 병제. 이러한 무기의 제작·설치는 이민족의 침략에 대비하기 위한 것이었다. 따라서 무기를 다루기 위해서는 끊임없는 훈련과 조작이 필요로 한다. 『고려사』의 1039년(정종 5) 기사에서 전쟁을 잊어서는 안 된다고 강조하고 날래고 용감한 자들을 가려 뽑아 궁술과 마술을 교습시키라고 한 것도111)『고려사』 권81, 지35, 병1, 병제. 이와 맥락을 같이한다.

북방 이민족의 침략에 대비해야 하는 문제는 곧 고려의 국방과 직결되는 일이었다. 이를 위해서는 무예를 장려해야 하였으며, 이를 제도적으로 뒷받침할 목적으로 설치된 것이 바로 무학재였다. 그러나 무학제는 예종의 뜻대로 국가 방어를 전담할 제도적 장치로 계속 운용되지 못하였다. 14년 동안 존속하던 무학재가 1133년(인종 11)에 폐지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그것은 무학재가 상대적으로 등제(登第)하기에 매우 쉬워 학생들이 무학으로 많이 몰렸기 때문이었다. 무학 출신 등제자가 많아지면 문학인과 대립이 생길 것을 우려하여 폐지하였다는 것이다.112)『고려사』 권74, 지29, 선거2, 학교.

이러한 조처는 그동안 지속되어 온 무반 세력의 상승에 대한 견제와 제동이었다. 결국 무학재는 문신의 견제로 폐지되기에 이르렀다. 국가 방위를 담당할 무인을 양성하던 무학재가 1133년에 폐지된 뒤로 그와 같은 제도적 장치가 다시 마련된 것은 1371년(공민왕 20)이었다. 이때 공민왕은 교서를 내려 “문무의 채용은 한 쪽만을 폐할 수 없으니, 중앙에서는 성균관으로부터 지방에서는 향교에 이르기까지 문무 양학(兩學)을 개설하고 인재를 양성하여 탁용(擢用)에 대비하라.”113)『고려사』 권74, 지29, 선거2, 공민왕 20년 12월.고 하였다.

공민왕은 이와 같은 교서를 원나라의 오랜 정치적 간섭이 끝나고서야 내릴 수 있었다. 또한 공민왕은 1259년과 1261년 두 차례에 걸쳐 북방에서 침입한 홍건적(紅巾賊)을 힘겹게 물리쳤다.114)강성문, 「고려 말 홍건적 침구에 관한 연구」, 『육사 논문집』 31, 육군 사관학교, 1986. 이어서 남방에서 날로 거세지 는 왜구의 침탈에115)공민왕대에는 왜구의 침구가 115회였으며, 우왕대에는 378회나 되었다(나종우, 「고려 말기의 여·일 관계」, 『전북사학』 4, 전북대, 1980). 대응하기 위한 무인 양성책으로 이런 조처로 취하였다. 약화된 군사력으로 남방 국방선까지 강화가 어려웠던 사정이 이 같은 교서를 낳게 하였던 것이다.

이제까지 살펴본 것처럼 국방을 담당할 무인의 제도적 양성은 국가 운영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문제였다. 그러나 고려 전기 문벌 귀족 중심의 사회에서는 문치주의(文治主義)로 편향되어 제도적 장치를 통한 무인의 지속적 양성은 어려웠다. 특히 원나라의 간섭을 받았던 시기에는 고려에서 바라는 대로 무인을 양성할 수 없었다. 국가가 위기에 처할수록 무인의 양성은 더욱 절실하였다. 그것은 고려 말 간관(諫官) 우현보(禹玄寶, 1333∼1400)의 상소에서 확인할 수 있다.

우현보는 “군사를 쓰는 도(道)는 오로지 장수에게 달려 있는데 좋은 장수의 재능은 자고로 어렵다고 하오니 마땅히 자제로서 기량(器量)과 견식(見識)이 있는 자를 가려서 아울러 병법을 배우게 하고 무예를 익히게 하며 항상 교열(敎閱) 정예(精銳)를 가르쳐 길렀다가 그 재가 이루어질 때를 기다려 이를 쓰면 양장(良將)을 어찌 얻기 어렵고 용병(用兵)함에 규율을 잃을 걱정이 있겠습니까. 옛날에 병서(兵書)로 사람을 시취(試取)하는 과(科)가 있었음도 곧 이런 뜻에서였습니다.”116)『고려사』 권81, 지35, 병1, 오군.고 상소를 올렸다. 국방의 위기를 이끌어갈 장수를 길러 내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가를 일깨워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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