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14권 나라를 지켜낸 우리 무기와 무예
  • 제2장 오백 년 사직을 지킨 고려의 무기와 무예
  • 2. 무신의 세상과 대몽 항쟁
  • 몽고의 침략, 성곽전으로 항전한 고려
  • 대몽 항쟁에 쓴 고려의 무기
김대중

일곱 차례에 걸친 몽고군의 침략을 고려군은 어떻게 물리쳤을까? 고려는 삼국시대의 무기를 계승·발전시켜 사용하였다. 특히 고려의 군인들이 많이 사용하였던 과(戈, 꺾창)와 모(鉾, 투겁창)는 유용하였다.135)서긍, 『고려도경』 24, 절장 초신기대. 성곽 위주의 요새전이나 북방 기마 민족을 상대하기에는 다른 무기류보다 꺾창과 투겁창이 효과적이었다. 꺾창은 다른 병기와 달라 찍거나 긁어내릴 수가 있으며, 투겁창 역시 예리한 칼날을 이용하는 장병기란 점에서 기병전에 효과적이다.

몽고와 고려의 전쟁은 주로 성곽을 중심으로 벌어졌다. 고려는 대몽 항전에서 기본적으로 청야입보(淸野入堡) 전술을 썼다. 이는 고려의 종심(縱深)136)전방 및 후방부대를 다 포함하고 있는 어떤 대형(隊形)이나, 진지(陣地)의 전방으로부터 후방에 이르는 간격(『육군 군사 술어 사전』, 육군 본부, 1977, 477∼478쪽). 깊은 지형상의 특성을 이용한 방어 전략으로 양계(兩界)의 진(鎭) 중심 방어선이 무너진다 하여도 상대의 진출로 상에 있는 모든 지역은 해당 지역에 분산 설치되어 있는 산성으로 들어감으로써 항전을 계속하여 적의 병참선이 제대로 운용되지 못하도록 하는 방법이다. 적이 병참선을 제대로 운용하지 못하도록 고려군이 산성으로 들어갈 때 반드시 들판에 있는 먹을 것을 모두 태우거나 없애버린다. 유목 민족인 몽고군이 기병 중심으로 운용되었기 때문에 취한 전략이었다.

확대보기
운제(雲梯)
운제(雲梯)
팝업창 닫기

에구(也窟)의 침략이 시작된 1253년(고종 40) 7월의 경우만 하더라도, 몽고군이 압록강을 건너 고려를 침략하자 고려는 본토 주민을 산성 혹은 연안의 섬으로 즉각 들어가도록 하였다. 또 각지의 민호(民戶)를 다시 해도(海島)와 산성에 입보시키면서 항전의 결의를 굳게 하였다. 몽고와의 공성전(攻城戰)은 몽고의 1차 침략인 귀주성 전투의 기록에도 잘 남아 있다.

『고려사』 박서(朴犀) 열전에 따르면 “몽고가 누거와 대상(臺床)을 만들어 소가죽으로 덮어씌우고 그 안 에 군사를 감추어 성 밑으로 육박, 터널을 뚫자 박서가 성에 구멍을 내어 쇳물을 부어 누거를 불태웠다. 여기에 땅까지 꺼져 몽고군 압사자가 30여 명이나 되었으며 썩은 이엉을 불 질러 목상을 불 지르니 적이 놀라 흩어졌다. 몽고가 또 대포차 15대로 성 남쪽을 급히 공격하므로 박서가 성 위에 대를 쌓아 놓고 불을 질러 성을 공격하므로 박서는 미리 누상에 저수하였다가 물을 쏟으니 불이 꺼졌다. 몽고가 성을 포위하기를 30일, 온갖 계책으로 이를 쳤으나 박서가 임기응변하여 굳게 지켰으므로 몽고가 이기지 못하고 물러났다.”고 전하고 있다.137)『고려사』 권103, 열전16, 박서(朴犀). 몽고는 공성 장비인 누거·대상·대포차로 귀주성을 공격하였고, 박서 장군은 대우포(大于浦)를 사용하여 몽고의 운제를 격파하였다.138)『고려사』 권103, 열전16, 박서. 박서가 사용한 대우포는 커다란 칼날이 달린 긴 병기로 알려져 있으나 정확한 구조는 알 수 없다.

1232년(고종 19) 12월 처인성 전투에서 승장(僧將) 김윤후(金允侯)는 성민을 규합하여 적장 살리타이(撒禮塔)를 사살하였다. 이것은 바로 궁시를 대표로 하는 투사(投射) 무기로 몽고를 격퇴하였음을 알 수 있다. 지휘관을 잃은 몽고군은 부장 데구(鐵哥)의 인솔 아래 서둘러 철수하였다.

몽고의 3차 침략인 1236년(고종 23) 9월 죽주성(竹州城, 현재의 안성) 전투에서도 고려는 포차로써 몽고군을 물리쳤다. 이 전투에 대해서 『고려사』는 “몽고가 포로써 죽주성의 사면을 공격하여 성문을 무너뜨렸다. 성안에서도 포로써 몽고를 반격하여 가까이 다가오지 못하게 하였다. 몽고가 또 사람의 기름을 준비하여 짚에 뿌리고 불을 놓아 공격하였다. 이에 성중의 사졸이 일시에 성문을 열고 돌격하자 몽고의 전사자가 이루 헤아릴 수 없었다. 몽고가 여러 방법으로 공격하기를 무릇 15일이나 하였다. 그러나 끝내 성을 함락시키지 못하였다. 이에 공성 장비들을 불태우고 물러났다.”고 기록하고 있다.139)『고려사』 권103, 열전16, 박서 부(附) 송문주(宋文胄)

죽주성 공방전에서 몽고를 물리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한 포차는 목재를 올려 만든 부분에 가로로 하나의 나무를 걸치고 그 중간에 긴 봉을 끼운 구조였다. 긴 봉의 다른 한쪽 끝에는 수십 가닥에서 백여 가닥의 줄을 매달아 놓고 이 줄을 힘껏 당기면 가죽 주머니 쪽의 무거운 돌이 날아가게 되어 있다. 발사물은 무거운 돌 하나로 한정되지 않는다. 이 장치에 바퀴를 달아 이동을 편리하게 함으로써 포차라는 명칭이 붙게 된 것이다. 몽고군이 죽주성 사면을 포로 공격해 왔을 때 고려 역시 포로 반격하여 몽고의 접근을 막았던 것이다. 결국 죽주성민은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몽고군을 사살할 수 있었다. 성곽을 중심으로 벌어진 몽고와의 항전에서 고려는 공성 무기에 대응할 수 있는 무기들을 동원하였다.

확대보기
포차-선풍포(旋風砲)
포차-선풍포(旋風砲)
팝업창 닫기
확대보기
포차-차행포(車行砲)
포차-차행포(車行砲)
팝업창 닫기

몽고군을 물리치는 데는 원거리 무기인 활과 포가 유용하였다. 이민족과 전쟁이 잦았던 고려시대에는 어떤 무기보다도 활이 중요하였다. 『고려사』에 보이는 국왕이 행차하여 대장군 이하 병사에 이르기까지 과녁을 쏘게 하였다든가 백관이 활쏘기를 연습하였다는 기록이 이를 말해 준다. 쇠뇌도 고려의 대몽 항쟁에서 중요한 무기로 사용되었다. 쇠뇌는 활에 비하여 수성 작전과 매복 작전에 운용하기에 편리한 장점이 있다. 쇠뇌는 큰 동작 없이 좁은 공간에서 시위를 노기에 걸기만 하면 상대를 쏠 수 있는 무기였기 때문이었다.

개요
팝업창 닫기
책목차 글자확대 글자축소 이전페이지 다음페이지 페이지상단이동 오류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