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14권 나라를 지켜낸 우리 무기와 무예
  • 제3장 부국강병의 토대, 조선 전기의 무기와 무예
  • 1. 부국강병의 길
  • 조선의 장기, 활
  • 활쏘기는 사대부의 기본 덕목
박재광

조선 전기에 사대부가 반드시 익혀야 하는 무예의 하나로 활쏘기를 꼽게 된 것은 조선을 개국한 태조 이성계를 비롯한 역대 왕이 활쏘기를 즐겨하였고 장려하였기 때문이다.

이성계는 일찍부터 명궁으로 이름을 날렸다. 공민왕이 경대부(卿大夫)들에게 활을 쏘게 하고 친히 이를 구경하였는데, 이성계가 100번을 쏘아 100번 다 맞히는 것을 보고 탄복하면서 “오늘날의 활쏘기는 다만 이성계 한 사람뿐이로구나.”라고 말한 적이 있을 정도였다. 이성계의 활 솜씨와 관련된 이야기는 많이 있지만, 특히 1379년(우왕 5) 7월 운봉(雲峰)에 침입한 왜 장 아기발도(阿其拔都)와의 일화가 유명하다.189)『역대병요(歷代兵要)』 5, 국방 군사 연구소, 262∼269쪽 ; 서인한, 『한 권으로 읽는 역대병요·동국전란사』, 국방부 군사 편찬 연구소, 2003, 149∼151쪽.

당시 이성계는 운봉에 침입한 왜구를 상대로 대우전(大羽箭)·유엽전(柳葉箭) 50여 개를 발사하여 적을 모두 명중시킬 정도로 활을 잘 쏘았다고 한다. 당시 왜구 장수는 아기발도라는 미소년으로 용모도 준수하고 용맹이 매우 뛰어났다. 특히 그는 갑옷과 투구를 착용하여 화살이 들어갈 만한 틈이 없어 고려군이 매우 두려워하였다. 이에 이성계가 휘하 장수 이두란(李豆蘭·李之蘭)에게 “내가 왜장의 투구를 쏘아 벗길 것이니, 그때를 놓치지 말고 그대는 재빨리 그의 면상을 쏘아 맞히라.” 말하고, 시위를 당겨 아기발도의 투구 꼭대기를 정확히 명중시켜 투구를 땅에 떨어뜨렸다. 이에 이두란이 활을 쏘아 아기발도를 사살하여 결국 승리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물론 이 이야기에는 이성계의 뛰어난 활 솜씨를 강조하기 위해 과장된 측면이 있겠지만 그의 활 솜씨가 유달리 뛰어났던 것만은 사실이다.

이후 이성계는 한성으로 천도한 이후 활을 쏘기 위하여 궁중 후원에서도 사후(射候)를 많이 하였다. 이것은 태조가 자기의 무술을 단련하기 위하여 쏜 것으로 생각된다. 태조 이래 역대 왕 또한 활쏘기를 즐겨 무(武)에 대한 생각이 더 많아졌고 또 장려하는 바람에 문신들까지도 활을 잘 쏘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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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쏘기를 숭상한 예를 살펴보면 1409년(태종 9)에 태종이 세자에게 궁중에서 활쏘기를 익히도록 하였는데 우빈객(右賓客) 이래(李來)와 간관(諫官)들이 이를 옳지 않다고 반대하자, 태종은 “옛사람이 이르기를 활 쓰는 것으로 덕을 알아본다고 하였고, 또 이를 이르기를 그 재주를 겨루는 것이 군자의 도라 하였으니 활 쏘는 것을 중지시킬 수 없다.”고 하여 이를 일축하였다.190)『태종실록』 권17, 태종 9년 3월 기미. 이처럼 궁술은 왕실에서도 중요하게 여겼던 것이다.

세종도 경복궁에 거둥하여 경회루에서 내금위(內禁衛)·사금(司禁)·진무(鎭撫)·사복(司僕)과 충의위(忠義衛)·별시위(別侍衛)에서 활 잘 쏘는 군사를 시켜서 200보 거리에서 활을 쏘게 하였으며, 그때 부사정(副司正) 박성량(朴成良)과 부사직(副司直) 강호문(康好文)·조유례(趙由禮)가 가장 잘 쏘았으므로 각궁을 하나씩 하사하였다.191)『세종실록』 권26, 세종 6년 11월 갑신.

특히 문종 연간에서는 임금이 친히 왕림한 가운데 궁술 대회가 자주 열렸다. 1451년(문종 원년) 2월에 왕이 서현정(序賢亭)에서 동·서반 각 품관의 활쏘기를 보았다. 이때 사헌 장령(司憲掌令) 신숙주(申叔舟)가 이것을 보고 “우리나라의 향사(鄕射)들은 모두 시서예악(詩書禮樂)의 가르침을 배우며 천하에서 문명의 나라라 하는데 지금 전하는 날마다 활 쏘는 일로써 큰일을 삼고 있으니 만일 이런 풍(風)이 일어나면 고치기 어렵습니다.”라고 하면서 사후를 자주 하지 않도록 간할 정도였다.192)『문종실록』 권6, 문종 1년 2월 기축. 그러나 문종은 이듬해 3월에도 경회루 아래에서 종친과 환관에게 활쏘기를 권하며 관람하였다.193)『문종실록』 권12, 문종 2년 3월 경신. 그 후 훈련관에서 무사들의 사후도 관람하였는데,194)『단종실록』 권4, 단종 즉위년 11월 경오. 이때 봉석주(奉石柱)·신이중(辛以中) 등 45명이 사후, 치후(馳侯), 기창 등을 잘한다고 하여 선발되었다. 이때는 격구, 기사 등을 보았고 대내에서 종친을 불러 사후를 하였다. 따라서 문종 때에는 문무반을 막론하고 종친이나 각 관서의 관리들도 활을 잘 쏘았다.

세조는 종친과 공신을 궁중 후원에 불러들여 궁술 대회를 열기도 하고 때때로 문신들을 모아 놓고 활쏘기를 하여 우수한 사람에게는 상을 주거나 벼슬을 올려 주었다. 세조는 미리 알리지 않고 불시에 활쏘기를 관람하는 방식으로 훈련에 힘쓰도록 권장하였기 때문에 당시의 무사 중에는 뛰어난 이들이 많았다고 한다.

또한 1502년(연산군 8) 2월에는 연산군이 강궁 4개를 내어 놓고 “이철동 (李哲同) 등 세 명과 시위하는 장사 중에 활시위를 당길 만한 힘이 있는 이는 이것으로 과녁을 뚫으라.”고 명령하였다. 병조 판서 이극돈(李克墩)이 시위하는 장사 17명과 이철동 등 세 명을 번갈아 시험해 보았으나 모두 실패하였는데, 유일하게 겸사복(兼司僕) 박세정(朴世貞)만이 활을 당길 수 있었다고 한다.195)『연산군일기』 권42, 연산군 8년 2월 을묘 또 같은 달 기록을 보면 이틀에 걸쳐 정승과 승지들에게도 도성 문 밖에서 활쏘기를 연습하게 하고 임금이 직접 시를 지어서 내려 주었다.196)『연산군일기』 권42, 연산군 8년 2월 경신.

중종 때는 재상 가운데서도 활쏘기에 뛰어난 이가 있었다. 어유소(魚有沼)는 1품관이면서도 달리는 말 위에서 활을 쏘았다. 승지(承旨) 김세형(金世亨)도 기사에 능하였고, 최경례(崔敬禮)는 70세의 많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활쏘기와 말달리는 연습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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