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14권 나라를 지켜낸 우리 무기와 무예
  • 제3장 부국강병의 토대, 조선 전기의 무기와 무예
  • 2. 평화 속에 잠든 무기와 무예
  • 군사 무예로서 개인 무예의 쇠퇴
  • 개인 무예의 쇠퇴
박재광

이러한 조선 전기의 방어 전략과 전술 개념은 무예가 출중하거나 담력이 뛰어난 용장(勇將)을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다. 반면에 병서와 전략에 능한 문신 출신의 인장(仁將)이나 덕장(德將)이 중시하였다. 따라서 중요한 군사 지휘관에 문관이 임명되어 전쟁을 수행하기도 하였다. 그러므로 무기의 개발이나 무예의 발전에 한계를 가지고 있었다.

이는 조선 건국 초부터 드러난다. 진법이 1397년(태조 6)의 요동 수복 계획을 위한 습진에서 비롯되었지만 무예보다는 단체 행동과 집단 훈련을 강조하고 있었다. 따라서 군사 훈련의 목적이 창검이나 궁시를 다루는 전투 기법의 숙달이 아니라 금고(金鼓, 징과 북)와 기치(旗幟)의 지시에 따라 행동을 통일하고 대형을 유지하는 데에 있었다. 이는 실전 전투력 강화를 위한 전기(戰技)보다는 명령 계통의 확립에 관심을 둔 제식 훈련이 선행되었다.

이와 관련하여 정도전(鄭道傳, 1337∼1398)은 “지금의 군사 훈련은 금고와 깃발을 가지고 나아가고 물러서고 앉고 서는 절차만 자세히 가르치고, 창·칼·활을 가지고 치고 찌르고 활쏘고 말달리는 기술을 연습하지 않고 있다.”고 하며 실전 위주의 군사 훈련을 역설하였지만209)『문종실록』 권6, 문종 1년 2월 기축. 현실적으로는 보완되지 않았다. 이후 여진 정벌에 대처하기 위해서 세종대에 일부 무예가 강조되기도 하였지만, 전반적으로 지휘명령 체계가 전술의 근간을 이루었다.

특히 문종대 이후로 조선군의 전술이 국가의 전 병력을 동원하는 대규모 부대의 운영을 위한 형태로 전환되자 군사들의 군사 훈련도 무예를 중심으로 하는 전기 연마보다는 전 부대원의 명령 및 지휘 체제의 숙달에 초점을 맞추었다. 따라서 개개인 병사의 무예는 쇠퇴할 수밖에 없었다.

이처럼 무예가 침체된 요인으로는 다음의 다섯 가지를 들 수 있다. 첫째, 200여 년간에 걸쳐 평화가 이어지자 전쟁에 대한 대비, 즉 무기와 무예 개발을 등한시하였다. 변방 지역에서 몇 차례 소요는 있었지만 이는 국지전의 형태였으며 전면전으로 확대될 위험은 없었다. 둘째, 유교를 통한 도덕 지상주의는 숭문천무(崇文賤武) 사상을 낳아 군사 문제에 대한 관심이 부족하였다. 셋째, 조선의 전술 운용의 중점이 개개인의 무예보다는 지휘명령 체계를 중심으로 한 집단 운용에 두었기 때문이다. 넷째, 조선의 산업 구조는 농업 위주로 상공업이 억제되었으므로 수공업 발전은 물론 무기 기술 개발에도 직접적으로 한계를 지녔고, 이는 개인 무예의 발전을 저해하였다. 다섯째, 병사들의 일반적인 구성이 농민병으로 조직되어서 개인 무예의 질적인 낙후는 물론이고 훈련 정도도 대단히 낮았다. 이런 상황에 처해 있었기 때문에 군사 훈련으로서의 개인 무예는 점차 쇠퇴하기에 이르렀다.

무예 훈련에 큰 도움이 되었던 모구는 세조·예종·성종대에도 금군을 훈련시키기 위하여 계속 시행되었고, 왜와 중국의 사신이 왔을 때 유희 내지는 무력시위 차원에서도 시행되었다. 나아가 중종대에는 모구의 효용성을 인정받아 기사, 기창과 함께 관무재 시험 과목의 하나가 되었다. 그러나 이후 모구에 대한 기록은 거의 나타나지 않는다. 확인할 수 없지만 제대로 모구가 시행되지 않았던 것 같다.

한편 조선 전기의 무과 시험 과목이었던 격구도 중종 때부터 점차 쇠퇴하였다. 본래 격구는 무술의 한 방법으로 이를 통하여 여러 가지 기술을 보급시키고자 하였으나 갈수록 그 방법이 간단해져 그만큼 무술로서 행하기 어려웠기 때문에 점차 없어졌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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