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14권 나라를 지켜낸 우리 무기와 무예
  • 제3장 부국강병의 토대, 조선 전기의 무기와 무예
  • 2. 평화 속에 잠든 무기와 무예
  • 민간에서 이어진 무예
  • 격구
박재광

성종대에 이르러 격구의 유희적 측면은 배제되고 군사 훈련의 중요성은 더욱 강조되었다. 그러나 조선의 극단적 문치주의는 무를 경시하게 됨에 따라 격구는 조선 중기 이후 귀족 사회에서 점차 멀어져 쇠퇴의 길로 접어들었다. 한편 일반 민중에게는 놀이로서 격구가 아닌 장치기로 보급되어 전국적으로 퍼져 나갔다.

장치기는 애당초 군사적 목적으로 행하였으나 점차 단순한 대중 놀이로 바뀌었다. 장치기 놀이는 바로 군사적 목적에서 출발한 훈련의 한 방법으로 단순한 놀이가 아니었고, 또 귀족 사회에서는 유희의 목적으로 행해지고 보급되었다. 그러나 이후 사상적·학문적 기조의 변화가 놀이의 기능에 도 영향을 미쳤고, 장치기는 단순히 오락성만 남아 전통 놀이로 오늘날까지 이르렀다.

한편 장치기는 놀이의 방법에서 용감성, 투지, 민첩성을 키울 수 있을 뿐 아니라 체육 운동 기능을 높이며 집단주의 정신을 키우는 데 의미가 있다. 장치기를 할 때는 마을마다 풍물놀이를 잡히고 온 주민이 나와서 응원하였다. 장치기에도 일정한 놀이 규정이 있었다. 장을 쓰는 경기라 부상당할 경우도 있어 나름대로 정한 규정이었으나, 규정은 지역마다 명칭이나 내용이 달랐다.

전통 놀이로서의 장치기는 근대 이후로도 계승되었다. 1934년 2월 5일에 제1회 전 조선 얼레공 대회라는 이름으로 전국 대회가 열렸고,219)이수광, 『지봉유설(芝峰類說)』, 을유 문화사, 1994. 이후 계속 명맥을 이어 최근까지도 일부 지역에서 행해진 것으로 각 민속 조사 결과 나타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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