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편 궁중에서 관람용 유희의 하나로서 많이 행하던 씨름도 점차 쇠퇴하였고, 민간에서도 유희로 인식되어 천시되어 갔다. 그러나 『조선 왕조 실록』 외에도 『경도잡지(京都雜誌)』,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 『김해읍지(金海邑誌)』, 『완당집(阮堂集)』 등의 문헌을 보면 장난삼아 씨름을 하다 진 사람이 이긴 사람을 칼로 죽이는 일까지 생길 정도로 민간에서의 씨름 열기는 대단하였던 것 같다.
따라서 고려시대를 거치며 유흥과 오락의 일면을 보이던 씨름이 조선시대에 들어와 점차 마을과 마을의 대항전이나 풍년을 기원하는 숙원 행사, 단오절 씨름 놀이 등 연례적인 대규모 축제에서 이루어지는 형식의 한 가지로 자리 잡은 것이다. 단오에는 남성 놀이로서 씨름이 반드시 행해졌으며, 7월 중원절이나 8월의 한가위에도 씨름 놀이를 찾을 수 있다. 이후 씨름은 서울뿐 아니라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